작업 노트 10
24.06.05
1편 리뷰는 해당 책 [단독성들의 사회]에서 보편의 사회논리-특수의 사회논리가 당사자인 우리에게 어떤 수동적 상태와 교호하는지를 고려하며 정리했었다. 즉 오늘날 21세기 대도시에 거주하는 '시민'은 문화자본주의의 영향권으로부터 결코 배제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주요하게 작동하는 '정서를 자극하는' 온갖 주객체들에게 둘러싸인 채 일상을 보내기에 '가치를 배제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당사자들은 그 안에서 사실 어떠한 자율성도 발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일전에 레나타 살레츨은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선택권이 어떠한 주체적 낭만-환상과 결부되어 이데올로기화되는지를 살펴 보여줬다. 확실히 몇몇 책에서도 읽어볼 수 있는 바, 근대 인간권의 핵심 중축인 '자유'란 가치는 우리로 하여금 우선순위가 매우 높은 등급의 윤리를 고수하게 하는데, 오늘날 여러 가치 충돌 현장에서도 목도할 수 있듯 우리에게 있어 '자유에의 침해'는 매우 발작적인 알러지 반응을 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비판을 즐겨하는 학자들의 논지를 통해서 모순적인 우리네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는 있다. 자유에의 침해가 조금이라도 가시화가 된다면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즉각 반응하지만, 서서히 스며드는 침해, 착취, 은폐된 종속과 예속화에 대해서는 아주 얌전히 말을 잘 듣는다. 예시는 이렇다. 동물권 운운하며 비건과 환경 운동에 목소리를 더하고 여러 '비합리적인' 행태에 일침을 가하며 윤리적 호소를 하는 집단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일상을 둘러싼 온갖 산업 문물의 구조는, 그러한 비윤리적 환경에 일조하도록 매우 촘촘히 설계되어 있다. 아마도 일반 시민들은 이러한 '내로남불'로 그런 불편한 윤리 호소를 희석시키고 없애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텐데, 이런 모순 자체는 비판이 좋아하는 지점일 뿐, 우리네 이해관계와는 사실 별개의 사태다. 돌려 말하면 이렇다. 근대 인간의 징표라 할 수 있는 '자유에의 강박-집착'은 곧 부자유에 대한 알러지 반응과 한몸인데, 이 둘은 개인의 합리적 상태에 의거해 추구된, 돌려 말하면 그런 인간으로 모양나도록 부추기는 구조이기 때문에 이 구조의 정상 작동을 위한 비판의 유지보수가 그런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이유는 [단독성들의 사회]에서 주로 다루고자 하는 문화 현장 내 '정서 자극의 가치 투쟁 공간'에서 우리가 행위자로 흘러가는지를 좀 더 분명히 알아보기 위함이다. 해당 리뷰는 바로 그러한 취지에 맞춰 '시간성'을 덧대 정리하려고 한다. 근래 작업에만 몰두하는 일상이 아닌지라 흐름이 잘 유지되고 있는지 점검하는 개인적 목적도 있긴 하다.
2. 일회적인, 순간적인 만남
나도 '시간성'에 대한 고민을 10년이나 할 줄은 몰랐다. 도대체 언제 그만둘까 싶을 정도로 그만둬지지 않는다. 이번에 참조한 책은 존 어리의 [사회를 넘어선 사회학], 그리고 참고 문헌을 쫓아 제임스 깁슨, 마이크 마이클, 리차드 골트의 소논문을 참조했다. 일전에 시간에 대한 여러 탐색으로 후설, 루이스 멈퍼드, 가이슬러, 하이데거, 아감벤 등등을 읽기도 했다. 질문은 이렇다. '21세기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시간 의식은 어떤 것일까?' 이 질문은 거창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거칠게 뒀으며, 사실은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기 위함이었다. 지금까지의 탐구를 통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없다.
[단독성들의 사회]에서 '단독성'이라는 개념이 주요 어휘로 다뤄진다. 단독성은 보편-특수, 특이한 것과 중첩될 수 있으면서도 문자 그대로 '단독적인 것'이다. 그 대상은 주체, 객체, 사물, 사건, 시공간 등등이다. 주체도 단독화가 될 수 있고, 객체도, 사물도, 사건도, 시공간도 다 단독화가 될 수 있다. 돌려 말해 단독화란 내재적 밀도와 복잡한 의미망을 통해 '인간'에게 포착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포착의 순간이다.
포착 대상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판별하고 조사하고 해부하고 관찰하는 건 [단독성들의 사회]가 다루고 있는 내용은 아니다. 예를 들어 [소비 사회학의 탐색]이나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의 저자 조지 리치의 책을 본다면 소비 상품으로써 포착되는 대상이 어떤 정체를 갖고서 여러 기반 구조를 모양내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다. 그러니까 만남은 순간적이고 단순하다. 우린 그저 배가 고픈데 맛도 나쁘지 않고 빠른 '패스트 푸드'로써의 햄버거를 사 먹을 뿐이다. 하지만 그 햄버거가 거기에 당도하기까지 거쳐야 할 무수한 단계와 과정, 거시적으로 보면 '진화'랄까?, 그리고 유지되기 위해 지탱되어야 할 보이지 않는 전략들을 안다면 특정 햄버거가 어떻게 단독화에 성공했는지를 이모저모 뜯어볼 수 있을 것이다. 뉴진스 따위의 아이돌 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파헤치고 알아보는 건 이성 사용자들에게나 재밌는 일이고 흥미이고 노동이다. 일반 사람들, 대중은 그러한 '응시' 따윈 1도 관심없다. 그저 만나는 '순간'이 중요하다. 그리고 바로 이것의 지형도가 변하기 시작한 게 20세기 중후반부터라는 게 레크비츠의 주장이다. 문화자본주의의 주류화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그것은 절대 단순하지 않지만 어쨌든 '이미지'와 함께다. 이미지와의 만남과 더불어 단독화는 더욱 급부상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비판자들의 목소리에서 심심찮게 섞여 나오던 게 '피상-휘발'에 대한 경멸과 혐오였다. 이 구도는 불필요하게 '인간성' 따위로 번지기도 했지만, 어쨌든 우리네 정신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증언하는 목소리나 다름 없었다.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사실 여기서부터는 특정 장소를 지칭하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질 않는다. 우린 어디에서 언제든 '접속'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조건이 곧 21세기 현대 사회의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은 온갖 이미지와 만난다. 이미지와 만난다는 '사건'이 그다지 의식되지 않게 된다는 게 문자 그대로 아무렇지 않아졌다. 이미지는 더 이상 놀라운 게 아니다. 오히려 가장 비천한 것, 하찮은 것, 그래서 온갖 것들과 교환될 수 있는 화폐와 같아졌다. 이미지란 무엇인가? 탐색하던 작가, 비평가, 예술가들이 꽤 많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20세기 중후반부터다. 하지만 그것을 철학적으로 고찰한다 한들 현실은 현실로 흘러간다. 내가 느끼기론 블랑쇼나 베케트나 버거, 바르트 같은 사람들의 이미지 관심은 이성 사용자로서 재밌는 읽을 거리지만 확실히 '현실'은 아니다.
닻은 늘 현실에 내려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은 바로 관계성이다. 아직은 복잡계 이론이나 네트워크 용어들로 이 차원에 대한 묘사를 하지 않기에, 개념들이 매우 낡아 보일 수는 있다. 관계성, 상호작용, 교호, 구조접속 등등 나는 아직 이 차원을 어떻게 '일상화'할 수 있을지 모색 중이다. 여하간, 관계성이란 현실은 ANT이론 쪽에서 잘 말해주듯 하이브리드가 뒤섞인 채 무수한 네트워크를 구축한 바로 그 관계성이다. 다만 여기에서도 역시 '관찰'을 위해 배제해야 할 중요한 요소들이 있기에 해당 용어들을 적극적으로 채택하진 않는다.
사람들이 이미지와 만나는 순간은 존 어리가 '순간주의적'이라고 부르는 구조로 설명된다. 이벤트라는 일회성, 일회용 상품, 단편적인 만남, 풍경의 이미지 소비, 정서를 자극하는 순간 등등으로 여러 방면에 걸친 인간 면모를 소개하는 일은 사실 꽤 다양하다. [단독성들의 사회]를 통해 그런 면모를 접할 수도 있고, 존 어리의 [모빌리티]나 [관광의 시선], 아니면 라투르의 주요 책, 마르코 오제의 [비장소] 등등으로도 안내를 받을 수 있다. 그만큼 20세기 중후반부터 쌓인 연구들 간 네트워크를 통해 공유된 인식이기에 그렇다. 이때 그 안에서 '시간 의식'을 추적한 사람들도 아예 없진 않았다. 존 어리가 순간주의적이라고 부르는 건 바로 이런 '시간 의식'을 포착하기 위한 매개 관념일 뿐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소비할 때 어떤 시간 의식을 갖는가? 정서를 자극받을 때 어떤 시간 의식을 갖는가? 일상을 보낼 때 순간순간의 행위들 속에 작동하고 있는 시간 의식은 어떤가? 대중 입장에서는 이 논의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할 산들이 꽤나 많다. 먼저 '기계 시간'에 대한 충분한 탐색과 고민이 이뤄져야 한다. 그저 가십거리로 현대 물리학 내용을 빌려와 유튜브로 소개하는 따위의 '시간'은 재료로 삼기에 너무 편파적이다. 시간 의식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비의식과 관계맺기 때문에 이 비의식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연습이 없고서야 시간 의식은 관찰될 리 만무하다. 루이스 멈퍼드의 노고 덕분에 학계에 전파된 일련의 인식 중 하나는 '근대의 핵심 동력이 바로 기계 시간'이라는 점이다. 기계 시간은 인간으로 하여금 푸코의 유명한 연구를 가능하게 할 여러 '역사'를 창출했다. 소위 규율적 권력을 가능케 만들었다. 시간이 기계로 추상화가 되고 나니, 사람들의 정신에서 벌어진 건 시간이라는 관념이 공간과 분리되고, 현실과 분리되고, 지시 대응되는 기하-수치로 내재된 정신과 관계 맺게 되었다는 점이다.
무엇인가의 관념이 추상화가 된다는 건 사실 놀라우리만치 막대한 변혁을 야기한다. 화폐의 창출을 가능케 할 '상징'의 출현도 그랬다. 인간 정신에게 있어 '상징'이라는 추상화가 어떻게 가능했을까?는 그 누구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되고 나니 놀랍게도 별별 이상한 짓거리가 가능해졌다. 거래나 교환이 가능해졌고, 그림이 가능해졌고, 문자가 가능해졌고, 심지어 '점'도 가능해졌다. 만약 인간에게 있어 '상징'이 없었다면, 소위 고대 문명은 구축될 수 없었을 것이다. 상징은 호모 사피엔스의 시작과 끝이랄 수 있는 엄청난 정신 기능 중 하나다.
추상화에는 여러 양상이 있다. 상징도 그렇고, 차원도 그렇고, 이미지도 그렇지만 일단 그것이 개발되고 통용될 때 인간은 꽤나 자연스럽게 학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들이 비의식에 할당되어 있기 때문에, 아주 낮은 통계치를 차지하고 있을 소수의 사람들이 이런 추상화를 남들과 같이 체득하지 못했을 때 벌어지는 일련의 면모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제대로 관찰할 수가 없다. 이것의 어긋남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크게 굴러가는 매우 정교한 기계처럼 보일 정도다. 일본 정신의학계에서 다뤄지는 '자폐 스펙트럼'의 예시들 중 어떠한 특정 단어의 강박적 표출과 사로잡힘의 사례가 있다. 이것을 라깡의 개념틀로 접근해 상징과 실제의 어긋난 대상 a의 복구 작업이라고 설명한다면 이성 사용자들에게 있어서는 '일단' 상정할 수 있게 되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저 미친 사람, 정신이상자로 보일 뿐이다. 대중은 그저 동정이나 연민 따위의 정동 작동으로 그 '구멍'을 메울 수밖에 없다. 그것이 때론 경멸이나 혐오, 없애야 할 '바퀴벌레(유대인 학살처럼)'로 메워지는 현상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내가 관찰하기론, 이 구도는 단순히 알고 모르고의 차이가 아니라 우리네 정신에서 무엇이 할당되는지의 분배 차이로 보여진다. 거칠게 말하면 합리화가 작동되지 않는 비의식의 영토에 의식이 흘러들어가야 할 때 그 부하를 무마시키고자 정동이 투여된다. 그것은 인식해야 하는 생명체 입장에서 몹시 불리한 조건, 생존에 직결되는 무언가를 건드리는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 인간은 다른 생명체에 비해 많은 걸 포기하는 대신 '인식'에 도박을 건 생명체다. 그렇기 때문에 인식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리스크 있게 다가오는지, 이런 구도로 인간을 다시 보면 꽤 많은 것들이 다시 보인다. 공포, 두려움, 불안, 온갖 부정적 감정, 합리화, 환상, 망상, 꿈 등이 바로 그러한 채널이다.
인식에 도박을 건 생명체로서의 인간. 이것은 돌려 말하면 인식의 섬세함, 취약함, 연약함을 가정케 한다. 그러니까 무엇을 발달시키고 진화시켰다는, 그래서 영구적인 강화가 이뤄졌다는 전제를 깔지 않는다면 말이다. 가장 최신의 고전으로 도착한 여러 철학자들은 이러한 증거를 제공해준다. 특히 '차이'에 대한 민감도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 정신이 차이를 알아볼 수 있다는 건 반대로 말해 유약함, 열등함의 징표다. 왜냐하면 바로 그 조건이어야 비로소 차이에의 인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차이란, 그것이 같지 않고 달라야 함을 가리킨다. 다르다는 것은 구분된다는 것이고, 구분된다는 것은 정신 입장에서 부하다. 이것의 순기능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인류의 진보이자 발전이다. 이것의 역기능은 우리가 배척하고 배제하도록 작동하는 '가치 박탈'의 현장에서 발견된다. 내가 느끼기론 이것은 그저 의식과 비의식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일 뿐이지만, 현실은 이 관계를 매우 역동적으로 다룬다.
시간 의식을 얘기하다 추상화로 넘어가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건, 바로 이 역동의 조건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우리네 일상에서 시간 의식이 왜 요구될까? 이 질문은 자체의 정당화로 답변될 수 없고, 현실 조건들이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시간 의식을 요구하는지의 환경 인식으로 전환된다. 그러니까 질문이 수정되어야 한다. 우리네 환경은 어째서 우리에게 시간 의식을 부하로 느끼게 하는가?다. 기계 시간은 전적으로 추상화된 시간 의식이다. 이것은 끊임없이 우리네 정신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바깥에 '실제'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시간 수치와 상시 조율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골트 말마따나 '시간 밖에서 살아가기'가 된다. 우리는 결코 시간 안에서 살아가질 않는다. 시간은 늘 '확인'해야 하고, '대응'해야 하고, '관리'해야 하는 무언가로 여겨진다. 반대로 시간 안에서 살아간다는 건 단순 비유로 물에 사는 수중 생명체를 들 수 있다. 그들은 물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우리 인간이 공기를 의식할 때는 관념으로 추상화가 진행되고 나서였다. 특히 건강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식으로 '산소'라든지, '미세먼지'라든지, '생화학 가스'라든지 등등.
몇몇 에세이론자들의 권유대로 시간 안에서 산다는 건 곧 시간을 잊고 산다는 걸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무얼 해야 하는가? 따위를 즐겨 말하는 에세이론자들은 자신의 삶 태도를 하나의 본보기로 내세우길 은밀히 욕망하기 때문에(사실 이정도는 은밀히도 아니긴 하다. 완전 대놓고다) 자신이 언어화한 것들을 사람들에게 제시하려고 중간중간 합리화에 열심이다. 몰입이나 자유, 행복과 기쁨, 구속받지 않는 시간 등등 그러한 언어 제공은 우리에게 '이미지화'가 될 뿐, 시간 의식을 인식하도록 돕는 건 아니다. 레크비츠가 말하듯 결국 단독화로서의 이미지는 시공간도 포함이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이든 '순간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환경에 놓여 있다.
이미지 자체의 코드가 '순간'이라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건 이미지에 있다기보다 이미지를 인식하는 우리네 기반 조건에 있다. 노련한 이성 사용자들은 바르트의 푼크툼 개념을 실천적으로 수행할 수도 있다. 다만, 현실은 그 반대다. 사람들이 순간성이라는 시간 의식에 목말라하기 때문에 순간적인 이미지를 끊임없이 제공해주는 모습, 사람들이 순간적인 이미지에 적응할 수 있도록 여러 합리화로(효율이라는 둥 즐거움이라는 둥 생산성이라는 둥 재미나 자극이라는 둥 돈이 된다는 둥) 그러한 이미지 제작에 '지속성'을 부여하는 모습, 바로 이 두 모습으로 일단 현실을 그릴 수 있다.
이것은 현실이라는 관계성을 그리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다. 한쪽은 피동적으로, 다른 한쪽은 자동적으로 그리는 것. (여담이지만 내가 시에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여건도 여기에 있다. 여태 만난 작가들도 그랬지만, 인간이 자신의 정서나 감정을 다룰 때 늘 '능동적인 주체'로 상정하는 집요한 버릇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들이 21세기에 걸맞은 인간 유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피동성과 수동성에 대한 인식이 너무 왜소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시간 의식은 부하를 느낀다. 현실에서 마주할 수 있는 대상들이 '순간성'의 코드로 만들어졌다면, 그것과의 접촉은 우리를 곧 그런 상태로 만든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강력한 증거이기도 하다. 무엇을 인식한다는 건 곧 그러한 상태가 됐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긋났을 때를 상상할 수 있게 돕는 건 역시 우리의 이웃인 소수자들이다. 물론 그들과의 '만남'은 현실적으로 이성 용법 외에는 그다지 재생산되고 있지는 않다.
존 어리가 순간주의적이라고 부른 일련의 문법은 레크비츠가 각종 문화 생산물이 어떻게 유통되고, 소비되고, 인식되는지에 강력한 동력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것은 각종 삶 제반에 확장되어 있다. 여건이 이럴진데, 당연히 에세이론자들을 필두로 우리는 삶을 명시하려는 부담의 해소로 각종 순간성 해독법을 처방받길 바란다. 미래에 대한 불안, 주거권을 둘러싼 통념, 지구-국가-공동체에 대한 근시안, 즉각적인 보상으로 연명하는 움직임, 그 안에서 파생되는 온갖 '새로움'. 이것에의 대항과 저항으로 지속성, 존 어리가 '빙하의 시간'이라 부르는 바로 그러한 시간을 추구하고 구축하는 건 현대 사회 입장에서 아주 좋은 먹잇감이다. 단편적으로만 봐도 그러한 일련의 양태는 문제 해결을 위해 문제를 덮는 데 성공한 격이다. 당연히 훌륭한 이성 사용자들은 얘기한다. '우리에겐 작금의 현실을 위한 "언어"가 필요하다'고.
나는 이에 적극 동의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물질이 아니라 언어다. 기계 문물 운운하며 책임 전가를 하는 건 지적 태만일 뿐, 언어 생산에 하등 도움이 되질 않는다. 스마트폰과 아이패드, 노트북이 우리네 정신을 순간주의적으로 붙들기 때문에 이것들을 멀리해야 한다는 말. 각종 소비 양태들이 우리로 하여금 정신이 마취된 상태를 야기하기 때문에 절제해야 한다는 말. 이동할 수 있다는 특권이 소비 계층의 차등화를 비롯해 '여유'라는 시간 특권까지 내포하기에 관광 산업을 중심으로 각종 진정성-낭만성에의 역설을 알아야 한다는 말. 이러한 일련의 비판들은 모두 기존 언어에 대한 반응일 뿐, 현실이 아니다. 현실이라 함은, 어쨌든 사람들은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고 있다는 것. 이것은 결코 허물어져서는 안 되는 경계다.
정신 입장에서 현실은 늘 알 수 없기에 가정하고 상정해야 하는 무엇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언어가 그 중간에서 스펀지같은 역할을 한다. 돌려 말하면, 새로운 언어를 창안해야 현실이 달리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더욱이, 개인의 권할도 아니다. 그렇기에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결국 에세이론자들처럼)자신의 삶을 언어로 꺼내놓는 일이다. 이런 일련의 행위가 무얼 의미하는지는 꽤 많은 걸 함축하고 있다.
순간성과 지속성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시간 의식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언제부터인지는 아는 바가 없지만, 추정컨데 근대부터 구축된 '개인사'부터 삶은 지속적인 무언가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날 지배적인 삶에의 언어는 지속성이다. 그것이 유효하게 여겨지고, 추구되어야 할 행복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자연을 찾고, 귀농을 하든 교외지로 나가든 '땅'과 가깝게 살든 영속성을 대변하는 무언가를 곁에 둔 채 사는 걸 좋게 여긴다. 인간 정신이 실로 그러한가에 대해서는 일단 봉인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이 논리에는 아주 막대한 아군이 붙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주 생활을 시작한 인류 문명의 역사적 시간이 뒷배로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입장을 절대 불변의 유일함으로 여기기보다는 그저 한 입장으로 여기는 편이다. 일상으로 적용한다면, 나의 어머니가 간혹가다 시골에서 말년을 보내고 싶다고 할 때 그 뜻을 적극적으로 동의해준다. 나무를 좋아하고, 숲과 산을 사랑하며, 자연 생태계라 부를 순 없지만 어쨌든 다른 생명체가 각자의 생명활동을 영위하는 공간을 곁에 두고 싶다.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는 이미지다. 나는 어쨌든 지금 바로 여기의 환경에 얼마나 적응할 수 있을지에 도박을 걸고 있다.
순간성과 지속성이라는 시간 의식은 정신의 상태로 보면 꽤나 다른 층위라는 게 쉽게 관찰된다. 니코틴 중독으로 담배가 땡겨서 아무런 의식도 없이 담배를 피는 순간의 정신 상태와 여러 의미들을 곱씹으며 언어망을 관찰하고 더듬고 어디가 어디까지 막혀 있는지를 의식할 때의 정신 상태는 명백히 다른 층위다. 이것을 시간 의식으로 치환해도 괜찮은지는 일단 차치하고, 카이로스적 시간관과 크로노스적 시간관으로 구분지어 지시되기도 했다. 카이로스적 시간은 사건의 시간성이다. 그 시간은 '시간 안에' 있으며, 매우 순간적인 상태의 연속이다. 이때의 정신 상태를 나는 게임, 도박, 무언가에의 중독, 축제, 스포츠, 몰입, 집중, 사냥, 조종, 운전 등으로 연결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인간이 외부 현실과 '거리 없이' 접촉해 무언가를 주고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상태를 카이로스적 시간관이라고 묶어 부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골트가 '카이로지컬'이라고 조합한, 로컬적 상태까지 덧대면 지속성과 순간성의 조합이다.
사실 이런 일련의 어휘들은 별로 생산적인 것들이 아니긴 하다. 우리 인간의 비의식을 하나씩 열다 보면 당연히 연결되어 있고, 조합되어 있고, 중첩되어 있음을 확인한 것일 뿐이니까 말이다. 문제는 이것들이 의식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다. 지속성, 그것은 확실히 21세기 현대 도시와는 거리가 먼 시간 의식이다. 무엇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 붙든다는 것. 정지한다는 것은 흥분 상태로 살아가는 도시인에게 있어 불가능한 상태로 보인다. 한 가지 노동만, 그것도 근대 산업 때 구축된 제조업을 일평생 하라고 하면 버틸 수 있을까? 요리에 있어서 '장인 정신'은 소비자의 '이미지로서의 맛'에 첨가되는 조미료이기에 권장되는 것이지 삶으로서 권장되는 건 아니다. 즉 흥분 상태의 도시인에게 지속성이란 시간 의식은 '나만 아니면 돼'의 삶 문법이다. 이것이 어째서 구축되고, 또 작동될 수 있도록 무엇이 도와주고 있는지의 비판들은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초점을 옮겨야 하는 건 관계성이다. 순간주의적인 21세기 현대 도시의 모든 양상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지속성'과 몰래 만나고 있다. 이미지의 순간성을 위해 생산하는 창조 노동자들을 상상할 수 있다면, 꽤 유용한 예시가 될 것이다. 나 또한 20대 초반 애새끼일 때 창작을 접하면서 그러한 마인드를 습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품이 독자, 관객, 고객과 만나는 '순간'은 매우 잠깐이다. 바로 그 잠깐을 위해 나는 막대한 (비)물질노동을 부가한다. 이것을 긍정할 수 있어야만이, 창작을 이어갈 수 있다고.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당사자로 하여금 수긍되어 '지속'되기 때문에, '현실'은 유지되고 굴러간다. 각종 산업계, 도시의 인프라, 제도와 행정의 처리, 익명의 거리에서 한 명의 행인이 손해, 손실,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기 위한 affordance(제임스 깁스의 용어인데 적확한 번역어를 찾지 못하겠다). 존 어리의 관점이나 ANT 이론의 관점을 수긍하면 이러한 관계성에 보다 많은 관찰을 시도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일상화'가 어떻게 가능한가는 여전히 미지수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지속되기 때문에 순간성이 발현될 수 있다는 것. 이 연속체를 상상할 수 있는 힘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나의 구상으로는, 이것이 가능해지면 우리네 일상에서 비의식의 구멍으로 소모될 수밖에 없는 부정적 정동들에게 매개로써의 언어를 놔줌으로 우리가 좀 더 긍정할 수 있게 될 거란 희망이다.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이나 존 어리의 이동성은 언어적으로 좀 비효율로 여겨진다. 이 비효율은 과도한 이성 사용에서 유발된다. 그러니까, 알아야 할 게 존나게 많아진다.
나는 4월 초에 일본 나고야에 여행을 다녀 왔다. 대가리가 커진 이후로 처음 가는 '외국'이었다. 레크비츠가 말하는 신중간계급의 특권이 나에겐 없었으므로, 당연히 나는 해외 여행에 대해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다는 듯 마치 옆 동네에 산책가는 듯 여기지 않았다. 해외 여행이란 막대한 조직들이 방대한 복잡도로 결합해 구축된 행위라는 걸 먼저 알고 있는 이상, 일반 관람객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저 생각없이 비행기를 끊고, 숙소를 예약하고, 관광 이미지를 소비하고, 음식을 먹고, 사진을 찍고, 존나게 찍어서 누군가 볼 수 있게 걸어두고, 자신이 '환기'도 할 겸 해외 여행을 다녀왔다는 표식을 남기는 일련의 행위'만'으로 갔다 올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앞서 묘사한 모습은 오늘날 젊은 인간들의 매우 일반적인 모습이다. 일반화의 오류랄 것도 없이 전 세계 신중간계급 인간들은 거진 모두가 이러고 있다.
그러니까, 진정성-낭만성뿐인 한 사람에게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그저 '순간성'일 뿐이다. 지속성 쪽에 있는 이해관계자들은 바로 이 순간성을 위해 거진 모든 걸 매끄럽게 만들어놨다. 여권, 예약, 이동, 이동, 소비, 이동, 소비, 안전, 보험. 세계 여행을 다니는 목적은 무엇일까? 다른 문화권을 체험하고 이국적인 풍경을 보고 음식을 맛보고 각국의 환경에 노출되는 데에 낭만성이 달라붙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을 동경하고 또 그것이 다시 상품화되는 이유는? 이런 질문은 비판의 취지에 아주 맛있는 재료다. 내가 느끼기론 21세기 현대 사회에서의 적응이란 이런 블랙박스들을 하나하나 벗기며 그것에 이성 언어를 부여해 세상을 살아가는 게 아니다. 장단에 휘둘리지 않고 구도를 달리해야 하는, 초점의 이동이 중요해 보인다. 가만보면 순간성을 위한 매끄러운 흐름에는 절단된 흔적, 마감되지 않은 이음새들이 많다. 이것들은 바로 지속성이 새어나오는 틈새다. 우리는 그러한 '만남'을 사실 비의식으로 흘려보낼 뿐이다. 그저 의식하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지나치는 것이다.
지나쳐도 괜찮은 것들은 지나쳐도 좋아야 한다. 그것이 현실이다. 이 문법이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관계성을 그려낼 수 있다고 여겨진다. 예를 들어 윤리적 소비를 추구하며 거칠게 비의식을 찢어 이미지를 투하하는 전략은 관계성을 위한 게 아닌 권력의 성격을 갖는다. 정보라 부르지만 사실은 이미지의 과잉 범람인 환경 속에서 가장 먼저 발작적 알러지 반응을 일으켰던 건 이성 사용자들이었다. 그리고 이 과잉 범람 속에 녹아들어 호환에 의심조차 품지 않는 일반 사람들도 서서히 그런 징후를 내비추고 있다. 현실이란 관계성은 한쪽에 치우치는 게 아닌, 그렇다고 상대성에 의존하는 게 아닌 애매모호한 기예를 요구한다.
일본 나고야로 여행을 갔다 올 때는 당연히 비판자들이 가치 박탈하는 '관람객'으로 다녀왔다. 이동, 소비. 머리 한 켠에서는 그것들이 권장되기 위해 구축된 온갖 산업계의 접촉들을 그리지만, 무시한다. 하지만 여기에 지속성을 부여한다. 즉, 의미의 역사적 인식을 붙인다. 관계성을 중심으로 사회를 관찰하는 일련의 학자들 태도에는 모종의 인류애가 묻어나는데, 그것은 만남이라는 순간적 접촉이 어떻게 재생산되고 소위 '지속'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데서 피어난다.
시간 의식이라 함은 곧 자신의 정신 상태를 가리킬 뿐, 실재의 대상은 아닌 거 같다. 순간성, 지속성은 사실 21세기 현대 도시부터 갑자기 나타난 이질적인 무언가가 아닌데도, 이에 대한 코드나 언어, 개념을 우리가 변용가능하게 물려받질 못해 비롯된 오해가 많은 게 아닐까 싶다. 당사자도 자신이 왜 순간적으로만 살아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면모만을 내비출 수밖에 없고, 관찰자도 그런 면모만 보기 때문에 사람들과 세상이 정말로 그런 거라고만 여기게 되는 순환이 나타난다. 그래서 앞서 말한 일반화가 가능해진다. 레크비츠의 [단독성들의 사회]는 딱 이 측면에서 도움이 된다. 다만 책에서 다뤄지지 않는 중요한 지점은, 그것이 절대, 절대로 고정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 고정성은 후기 근대에 들어서야 가치 박탈을 당하고 있는 개념이다. 하지만 고정성은 필요하다. 바로 고정된 게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 필요하고, 때로는 고정된 것으로 여겨야 하기 때문에 필요하다.
나 또한 이런 탐구가 정리되기 위해선 꽤 많은 시간과 관찰이 요구된다는 걸 늘상 느끼게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관계성이란 건 늘 애매모호하다. 돌려 말하면, 늘 열려 있어야 하고, 그때그때의 순간주의적 코드가 기본적이다. 그럼에도 지속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과도한 부하로 여겨지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인간 정신의 반응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나의 성향이, 이를 밀고가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과거 인류의 어떤 누군가는 남들이 부하로 느끼는 무언가를 밀고 가서 상징 따위의 추상화에 도달했을 거라고. 다른 인간이 그것과 만날 때는 당연히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 무언가가 (오늘날 표현대로라면) 소비되었을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자주 느끼지만, (뭐 그렇다고 다른 국가 교육 체계는 다를 거라고 상정하는 건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배우지 못한 균형이 너무 많다고 여겨진다. 하나의 개념적 실천을 배울 때 배우지 못한 것들은 거진 통념상 사람들의 모방으로 배우게 된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이 안좋게 여기는 것들은 나도 안좋게 여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겪은 환경에의 부적응을 환경 탓으로 돌릴 마음은 없다. 적응은 늘 이런 것이기 때문이다. 적응은 부적응이기에 적응이지, 애초에 필요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적응이다. '시간 안에 산다는 것'과 같다.
아마 다음 진도는 정서를 자극한다는 문장부터 할 거 같다. 즉, 우리는 어째서 '감정-정동'을 이미지나 순간적인 것들에 연결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다. 이게 나에게는 가장 핵심적인 블랙박스였다. 현재 가정하고 있는 비의식과 정동의 매몰관계로는 부족하게 여겨진다. '정서를 자극하기'와 '가치를 느낀다'는 것의 블랙박스를 열 수 있어야, 21세기 현대 도시에 적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에 대해서는 몇몇 선배들이 있다. 보들레르나 벤야민, 조르주 페렉. 발견한 책으로는 [도시의 시학] - 다나카 준, 앙리 르페브르의 책 등등이다. 조금 유치한 버전으로는 [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 - 셰리 터클도 있다. [스크린 위의 삶]을 쓴 저자인데, 몇몇 책들에서 간혹 발견할 수 있는 저자다. 전형적인 20세기 중후반 미국인의 인격인지라 도움되는 건 별로 없긴 하다. 즉, 디지털 네이티브가 아니라서 코드가 맞질 않는데도 억지로 끼워 맞추려다 보니 낭만성으로 메우려고 애를 쓰는 게 티가 난다. 좀 더 분명하고 유의미한 선배나 동료를 알게 되면 기쁘고 반가울 텐데, 아직은 찾질 못했다. 일단 손에 붙들리는 걸로 추적을 이어나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