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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Jul 05. 2024

화해 2

작업 노트 17


24.07.05






썼다 지우길 몇 번째, 조준이 잘 안 돼 눈이 의심스러운 며칠이다. 지금 FMD도 진행하고 있는데, 몸은 몇 달이 흘러도 기억이 나는지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인격이었으면 '또 한다고? 아 알지 알지' 하는 반응이다. 2일 차에는 먹고 싶은 게 막 솟구치는데, 사로잡힘의 강도가 예전만큼은 아니다. 이번엔 기름진 고로케다. 예전에 경주에서 먹었던 볼카츠가 존나 생각났다. 한 입 베어물면 육즙이 새어나오는 그 맛이 왜 그렇게 떠오르는지. 오늘은 4일 차다. 3일 차에는 귀신같이 먹고 싶은 게 사라지고 '이대로도 괜찮아'라는 적응의 상태에 돌입한다. 음식 섭취와 관련해 신체의 조율 관계가 이런 시간 측정과 상호하고 있다면, 이걸 정신에도 적용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험도 떠오른다. (별개로 2일 차마다 먹고 싶은 음식의 카테고리는 전형적인 '패스트 푸드' 계열이다, 왜 이쪽으로 몸이 상기시키는지는 개인사와 관련해 재밌는 관찰이지 않을까?)


 이와 유사한 여러 실험들도 이런 '적응할 것이다'에 믿음을 두고 밀어 붙이는 게 아닐까. 디지털 디톡스나 정신 수양과 같은, 정신의 섭취를 제한하고 그런 환경 속에서 다시금 적응을 해내는 일. 확실히 후기 근대에 들어 무엇이든 넘쳐나기 시작한 범람-과잉의 환경에서는 예전과 달리 더 이상 '먹는 것-취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선별하고 제한하는 게 문제가 됐다. 한 개인에게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는 조건지움이 기본인 환경에서의 적응이란, 결국 즉시성으로 흘러가는 게 효율적이기는 하다. 기본적인 코드는 이렇다, '하나'조차 취하기 어려운 환경에서의 적응이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바로 그것'에 힘이 쏠린다. 이때 이것도, 저것도 될 수 있는 대상이 나타나지 않을 때는 무엇이든 나타나는 순간 '바로 그것'이 된다. 반면 하나를 취하는 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 쉬워진 상황에서 '보다 더 나은 하나'를 취할 수 있는 환경에서의 적응이란 '이것과 저것 사이의 차이'에 힘이 쏠린다. 이때의 차이는 결코 어려워선 안 된다. 왜냐하면 '환경'이라 함은, 동시다발적으로 이러한 코드가 작동되기 때문에 개인에게 주어지는 적응과 더불어 다른 개체의 적응 또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전자는 누가 '하나'를 취하면 그것을 취하는 데 필요한 수고와 불확실이 줄어들기 때문에 더욱 그것으로 수렴될 수 있고, 후자는 누가 '보다 더 나은 하나'를 취하면 차이를 솎아내는 데 필요한 수고와 불확실이 줄어들기 때문에 더욱 가속될 수 있다. 이런 구도는 왠지 타 분야에서 정식화를 해놨을 거 같다.


 나는 이 구도가 정신의 인격 입장에서 꽤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걸 느낀다. 전자는 한 사람에게 근면성실의 윤리를 채택하도록 부추기고, 후자는 한 사람에게 순간주의적 윤리를 채택하도록 부추긴다. 이런 개념화는 서순이 딱히 중요하진 않아 보인다. 다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한 개인 입장에서 어떤 환경(코드)에 주기적으로 노출될 때 무엇에 적응을 위한 저항을 일삼았는지에 따라 그것에의 고착(적응)이 일어난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언어'라는 참으로 대단한 체계가 실질로 옳다면, 이것은 자아 개념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자아에 대한 '재서술'이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자아 작업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 되는 건, 프로이트가 개념화 해 준 '초자아' 때문이다. 라캉의 '아버지의 이름' 개념과는 미묘한 구조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섬세한 차이를 일단 뭉개버리는 나이브한 일상 모드에서 초자아든 대타자든 크게 중요하진 않다. 이성 사용자의 개념 작업, 소위 '사유'라는 건 기계 장치로 비유할 수 있다. 청소기를 잘 작동시키고, 그것을 계속 사용하기 위해 유지보수를 하는 것과 그것의 구조를 뜯고 살펴 보다 업그레이드 혹은 다른 버전의 청소기를 재구성하는 건 별개의 작업이다. 후자는 소위 철학자들의 일이고, 전자는 사용자들의 일이다. 나는 우리 시대에 일반 대중이라고 하는 이 '집단'이 도대체 어떤 성격을 지닌 인격 집합체인지 사실 오래동안 고민했는데, (FMD의 도움으로 잠시나마 안정된 정신으로 말하자면), 이 집단을 나는 사용자들이라고 보고 있다. 이건 구상한 지 3년 정도된 재서술 작업인데, 실용적인지는 모르겠다.


 여튼 자아 작업에 있어 자꾸만 가로막혀지는 건 초자아-아버지의 이름, 그러니까 단순한 인상으로는 엄격함 때문이다. 안나 프로이트의 가설에 따르면, 자아는 초자아와 이드 사이에 끼여 이리저리 휘둘리다 마침내 관계 맺기에 성공하는 중간자로 설정되는데, 이것은 자아가 직접적으로 다뤄질 때도 초자아를 뚫고 가야하는 상황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이것은 재밌게도 '기업가적 자아' 모델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자아란 것은 하나의 법인이다. 그래서 법인격으로서의 대표들은 내외부를 경계짓는 입출구를 담당한다. 그 안에 조직화된 여러 상이한 역할들과 법인격으로서의 대표들의 관계는 쉽게 밝혀지지 않는다. 자기계발서의 코드는 대체로 이러한 법인격의 '대표'로서 자기 자신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포지션을 강제하기인데, 아직까지도 유효한지는 모르겠지만 서양인들의 '개인' 개념의 코드가 여전히 남아 있기도 하다. 서양인들은 왜들 그렇게 자기 자신을 관리하고 통제하지 못해 애를 탈까 싶을 정도로 문제 설정-의식의 문법이 그런 쪽으로 흘러간다. 


 위험한 발상이긴 하지만 사실 개인적으로는 꽤나 유효하게 여겨지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은폐된 코드다. 그러니까 청소년-성인이라는 개념화, 미성숙-성숙, 발달, 인격 등과 어울러진 심리, 윤리, 사회적 '역할' 들이 대전제로서 결국 '자기 자신을 관리하고 통제해야 "옳다"'는 것이라면, 그러니까 이 근대 법의 최초 정신의 개발자들이 결국 전 지구적이라 부를 정도로 막대한 '인간 길들이기(슬로터다이크)'에 성공한 것이라면, 이 거대한 환경 안에 위치지워진 '나'라는 개인에게 있어 무엇을 취할 것인가의 문제는 어떻게 모양나는지 꽤나 익숙한 코드로만 유도될 뿐이라는 것이다. 이 대전제가 제대로 작동되고 결국 주변 대다수 사람들이 이 코드에 적극적으로 수용된 버전의 길들여진 인간이라면, 이 코드를 벗어나 일상을 살아가기란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이다(사실 게임 세계도 현실을 벗어나진 못한다, 나는 아직도 이것을 벗어난 '게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세계 몰락 체험은 필수불가결한 통로다. 이 상태와 '방황하는 추상화'는 확실히 다르다. 나는 이 차이를 인지하면서 순수한 인격 작업을 시도해야 한다, 잠시라도 긴장을 놓쳐 삼천포로 빠지다 놓치면 미끄러지듯 자아는 또 다시 미궁 속으로 홀연히 사라질 것이다.






2. 자아라는 모드, 자전自傳

 


내가 건드리고 싶은 자아의 반복적인 패턴은 크게 네 가지였다. 1. 가치박탈이라 부르는 공격성, 2. 추상적 사고로 인한 무효화, 3. 청소년기의 지성화, 4. 감각의 열등함. 먼저 이것들을 다루기 위해 나는 '자아'라는 상태에 돌입해야 한다. 지금 며칠 째 이 상태에의 돌입이 가로막혀져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수많은 학자들의 훌륭한 사유에 편승해 그저 자아 작업을 중단하고 당장 현실로의 참여로 이동하는 건 아주 믿을 만한 방향 전환이다. 나도 개인적으로는 누군가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하루 빨리 현실에 참여할 것을 권장하고 싶다.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고 있는 상태란, 그다지 권장할 만한 게 아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수렴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동어반복의 함정에 빠지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는 건 소위 '자폐'라는 위험으로,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게 갇혀 세상을 이리저리 입맛에 맞게 재단하는 걸 폐해로 여긴다. 이건 사회에 옳지 않고, 문화에도 옳지 않다. 변화나 차이에 유연하지 못한 채 경직되어 했던 말을 또하는 고집불통의 이미지를, 우리는 자폐의 상으로 귀결시킨다. 특히 바깥에서 마주할 수 있는 수많은 인간을 볼 때 우리는 그러한 면모 앞에서 모종의 불쾌감을 느끼는 걸 근거로 삼는다. 이에 대한 양상 또한 매우 다채롭다. 자폐적인 인격은, 사회에서 환영할 만한 인격이 아닌 게 기본이다.


 자기 자신에게의 몰두는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기 쉽다고, 꽤 많은 사람들이 경고한다. 반면 이런 몰두는 우리 인간에게 매우 기본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이것을 발달의 과정이라고 부르든, 특정 시기라고 부르든 기술 방식에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다수의 인간에게 있어 관찰할 수 있는 면모라는 데에는 이견이 매우 적을 것이다. 이게 뜻하는 바는, 반대로 우리가 그 시기는 통과해야 하는 것으로, 그러니까 '아직도' 그러고 있다는 데에 모종의 부정적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통해 우리가 그러한 시기를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가 드러난다. 바로 여기에 투입되는 개념이 초자아-아버지의 이름이기도 하다.


 자아는 대체로 엄격함으로 다뤄진다, 그것을 가정 모델에서 '아버지의 역할'로 귀결시켜 시니피앙화 시키는 게 그럴듯함으로 먹혀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특정 어휘로 붙들린 또 다른 의미망 속에서 확장을 해 나가는 게 아니라, 어째서 자아가 그 코드로 다뤄지는 게 문제일 수 없는가다. 만약 이것을 열어볼 수 없다면, 자아 작업은 결코 수행될 수 없고, 여러 심리 개념으로 말하면 '퇴행'의 방식 그 자체로 자기성애적으로만 밟아갈 수밖에 없다. 동어반복의 함정에 빠지게 되고, 작심삼일과 같은 도돌이표의 조준 실패가 될 수밖에 없다. 나이브하게 말해 '자아 작업'이란, 결국 실질적으로의 자기 변형이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내가 변한다는 것', 그것에의 분명함이 없다면 유효하지 않다.


 따라서 자아라는 걸 일종의 '모드'라고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자아 모드는 기본적으로 자기향락적인 모드다. 세상과의 간접적 연결로 인해 여러 방식으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때의 상태다. 이걸 수정한다는 건, 아마 최초의 수정 방식 때문에 초자아-아버지의 이름이 자주 채택되는 거란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당연히 어떤 엄격함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건 아니야, 저것도 아니야 따위의 규율로 정신 활동에 제한을 둠으로써 일종의 '가치 박탈', 그러니까 그것이 향락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거부시키는 자동화로 이어진다. 나는 이러한 엄격함보다는 '화해'라고 부르는 조금 다른 접근, 그러니까 라캉 식으로 말하면 '자기 증상과 잘 지내기' 따위처럼, 분명히 무언가 어긋난 서로의 입장 차이를 어떻게 중재시키고 합의점에 이를까에 대한 접근으로 시도하고자 한다. 내가 중재라는 개념을 하나의 윤리 가치로 채택한 채 끊임없이 지속가능성을 키워가는 이유는, 이것이 현실적으로 검증된 가장 덜 폭력적인 연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 사용자로서 그나마 유효한 접근이기 때문이다.


 나는 현실의 입장도 배워야 하고, 초자아-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보다 '여유가 없는' 입장도 배워야 하고, 또 자아라는 나의 내밀한(상처받기 쉬운) 치부도 아주 섬세히 보살펴야 한다. 중재는 이러한 입장들의 '착석' 후에야 발생하는 이벤트다. 자아 작업이 쉽지 않고 미끄러운 이유는, 이들이 아직 착석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식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이라면, 뭐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딱히 더 궁금해 하지 않고 신경 끄면 될 타인의 프라이버시지만, 정신 안에서의 여러 '인격화'에 따른 출현은 난도 높은 자기 관찰을 요하는 거 같다. 이게 아무렇지 않게 쉽게 될 때는 분명 있다. 비의식적으로 외부 환경과 아다리가 딱딱 맞아 떨어져 아무렇지 않게 '딸깍'되는 순간이, 분명 있다. 중요한 건 의식적으로 자행할 수 있는가인데, 이게 내 버릇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기 관찰의 코드는 '자전'이다. 자기 자신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관찰할 수 있다는 비유로, 하나의 상태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결코 작동될 수 없는 관찰이기도 하다. 나에게 자전이란 자기 관찰은 내 상태로부터 자율적이냐에 대한 문제다. 나는 현실에 적응하고 싶은 만큼 나 자신에게도 적응하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적응이란 변화나 차이에 대한 저항을 의식적으로 함으로써 어떤 일관성을 유지하고 싶음이다. 이에 대한 발달에 여러 실패나 착오, 난항을 겪었던 지난 세월이 경험치로 누적되어 있다. 지금 하려는 '순수한 인격'은, 내 삶의 뿌리에 다다르기 위한, 여태 수행한 자아 작업 중에서도 가장 멀리 간 작업이다.






3. 방황하는 추상화



시작은 일단 유년-청소년기의 기억 이미지다. 자아란 것의 정의는 쉽지 않고 불분명하다고 여겨지지만, 일단 지시 대상으로 어휘를 채택한 다음 그것의 용처를 코드화시켰을 때 분명 유효환 효과를 발생시킨다. 그런 맥락에서 자아란, 개인의 삶에 있어 서사를 이끌어 가는 한 축이다. 이 축은 보통 취약함, 무능력, 회피, 부인, 도피, 합리화, 대체 등 여러 방어 기제로 포착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우리가 흔히 흑역사라고 부르는 그런 삽화들은 자아라는 축이 지탱하고 있는데, 이를 취약한 자아라고 좀 더 좁혀볼 수 있다. 발달에 성공한 자아는 더 이상 이 취약한 자아의 축에 가담하지 않고 벗어나 있다. 이 작업에 있어 주요하게 관찰해야 할 건, 1. 취약한 자아는 절대 '발달'이 되지 않는다, 2. 취약한 자아는 현실 저항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모드다, 라는 것이다.


 나는 발달을 믿으면서도 믿지 않는다. 나 스스로를 관찰하며 가정하는 인격 모델은 모드에 따른 여러 상태의 집합체다. 또한 이것을 '분열된 인격' 따위로 분열이라는 어휘를 남발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디지털 스크린의 출현 이후 인격 혹은 자아에 대해 '분열' 따위를 남발한 무수한 학자들에게 비판적인 태도다. 애초에 우리 정신의 '자의식'으로부터 비롯된 인격, 자아, 자기 자신, "나" 등의 어휘는 늘 그때그때의, 순간적인, 항상성보다는 상시적인 모종의 의식이다. 이 접근이어야 보다 다양성을 넓힐 수 있고, 우리 자신에의 의식 또한 개방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발달을 믿으면서도 믿지 않는다는 건, 먼저 발달이라는 어휘를 잠시 버리고 환경 적응과 저항이라는 어휘로 대체했을 때 서술될 수 있다. 취약한 자아는 문자 그대로 현실이라는 외부 환경에 대해 불가능을 인지하는 상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언어 맥락으로 발생하는 효과인데, 아무리 외부 환경이 한 개체로 하여금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려 해도, 그것에의 행동 방침을 코드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전제되어야 할 것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취약한 자아라는 건 외부 환경에 대해 스스로가 '취약하다'고 모양날 수 있는 또 다른 코드를 필요로 한다. 나는 바로 이 부분이 초자아-아버지의 이름이라 부른, 최초의 정동 코드라고 일단 가정한다.


 나의 경우에 그것은 어머니와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다, 엄마가 실수로 어떤 아이를 칠 뻔했다가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 뭐라뭐라 소리를 듣는 사건을 지켜봐야만 했을 때다. 이것이 나의 기억에 각인되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할 '아빠의 고함' 이미지, 어떤 지켜야 할 무언가에 대한 경각심 이미지, 소중하다고 여겼던 존재의 힘없는 모습에 대한 이미지 등등 나도 모르게 유년 때부터 누적시킨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의미 맥락으로 '딸깍' 연결된 바로 그 순간이 곧 각인일진데, 그것은 내 정신에 있어 모종의 효과를 발생시켰다. 바로 '무력감'에 따른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어떤 순간(폭력적인 순간)에의 삽화로 자리잡고, 복잡한 의미망이 구축되며 최초로 자리잡는다. 이 최초의 두려움은 특징적인 맥락 속에서 인격과 연결되어, 나로 하여금 '취약한 자아'의 면모로 의식하게 만든다. 이 취약한 자아는 내가 유사한 상황(외부 환경)에 노출될 때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아주 자연스러운 '저항'으로 작동할 것이고, 실제로 삶에 있어 자주 작동했다. 아마 그때가 5살 언저리니, 점차 할 줄 아는 게 늘어가는 경험과 더불어 더 이상 그런 상황에 취약한 자아 상태로만 있지 않을 수 있는, 저항을 적응으로 전환시킨(소위 발달한) 상태들이 하나둘 늘어감에 따라 나의 자아-인격은 다채로워지고 더 이상 취약한 자아는 전체 중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일반적인 심리학으로써의 자아 모델 중 하나다.


 다만 나는 이 취약한 자아가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우리가 이제 '발달'했으니 나는 이제 그때의 내가 아니야! 따위로 여겨지는 건 그리 좋은 태도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내가 느끼기로 취약한 자아는 절대 발달되지 않는다, 또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때 입력된, 연결 확장된 의식은 분명 외부 환경을 인식하는 주요한 열쇠다. 그것의 맥락이 '나를 향한 위협'이 아닌 '내가 의존하는 대상을 향한 위협'으로 자리잡혀 있었을 때 나는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당연히 '즉각' 반응할 것이고, 이에 대한 발달에 힘을 쓸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관계성 가치관이나 중재자 가치관의 구조 기저에 스며들어 있을 수밖에 없는 코드인 것이다. 즉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고, 또 앞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이 취약한 자아는 필요하고, 어쩌면 삶의 측면에서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취약한 자아의 특정 면모를 부정하고 함부로 대할 게 아니라 지켜주는 것이다. 이제 이 코드에 다른 옷을 입히면, '내가 의존하는 대상을 향한 위협'은 곧 '내가 의미와 가치를 느낄 수 있는 대상을 향한 위협(가치박탈)'이 된다. 이건 내가 1번 증상이라고 부른 가치박탈이라는 공격성이다. 나는 살면서 아주 수많은 가치박탈을 하며 살았다. 이걸 이렇게 문장으로 만들면 '법 의식'이 발동돼 꽤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지만, (이게 에크리튀르의 힘이지만), 일반적으로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치박탈을 하며 살 수밖에 없다. 이걸 하지 않는 인간이 과연 있을까? 하면 내가 알기론 '인격' 안에서 절대 찾을 수 없다. 예수나 부처도 가치박탈을 하는 와중에 이걸 안 하고도 한 인격으로서 현실에 적응해 살 수 있다는 건 도무지 상상하기 힘들다. 때로 몇몇 철학자들이 대가리 꽃밭인 바보 천치들에게 이런 특권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그건 이성 열등 코드로 지향된 낙관론에 가깝다. 가치설정-가치박탈은 정신 개폐의 신호이지, 어떤 개념화로 억압할 수 있는 게 아닌 거 같다.


 내가 증상이라고 부르는 가치박탈=공격성은 기본적으로 내가 소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소모는, 취약한 자아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가치박탈을 하지 않고서는 나의 자아가 견디기 힘들어 한다. 그래서 공격하는 것이다. 이 구도는 정말이지 밀봉된 금고처럼 무뚝뚝하다. 견디기 힘들다, 공격한다. 그냥 사로잡힘 말고는 어떠한 거리 두기-관찰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그러한 흡입력이다. 왜 견디기 힘들 수밖에 없는지, 왜 공격하지 않고는 어쩔 수 없는지 따위의 다른 코드화는 도무지 자생하지 않는 것만 같다. 나는 이걸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의미 중층과 함께 복잡도를 끌어 올려 전반적인 안정화를 꾀하는 건, 그러니까 큰 그림을 그림으로써 가치박탈이라는 아주 사소하고 국지적인 반응에 휘둘리지 않는 걸 피하는 건 꽤 훌륭한 접근이다. 예를 들어 타인을 향한 여러 각도의 관점을 허용함으로써 부분만 보지 않고 전체를 보려는 태도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듦으로써 컴플렉스화시키는 것, 그러니까 단순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 복잡하게 다뤘을 때 단순한 문제로 보였던 것이 해소될 수 있다(중요도가 희석될 수 있다)에 가깝다. 이는 리비도라 부르는 에너지론에 입각한 발상으로, 힘의 집중을 완화시키고 분산시켜 그것에 사로잡히는 걸 해결하는 접근이기도 하다. 실질적으로 우리의 정신은 어떤 특정 사안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고 있을 때, 그것을 덜어냄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로 전환될 수 있다. 이건 의식과 정신 관계에 있어 매우 중요한 기술이다. 우리는 사로잡힘으로 벗어나기 위해 다른 것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전환을 도모한다(특히 상실과 관련된 상태일 때 자주 채택한다).


 내가 수정하고 싶은 건 그 안으로 들어가기다. 리비도라면, 왜 거기에 리비도가 쏠리는가?이다. 나에게 있어 가치박탈은 수용할 수 없는,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인지에의 공격이다. 그것은 이미 내 정신에서 '거부'된 것, 그러니까 가치가 없다고 여겨져 닫아버린, 끝내버린 어떤 인지로 여겨진다. 현실에서의 극단적 예시는 각종 중범죄다. 살인, 성폭행, 소아성폭행, 상해 등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무언가를 '해도 된다'고 인지해서 벌어진 일련의 행위들을 이미지로 접했을 때 나는 가치박탈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그 정신은 철저히 배제해야 하고, 부정해야 하고, 거기에 '용인된 공격성'이 전염되어 나 또한 그 공격성으로 말미암아 그 대상에게 '허용'된다. 그러니까, 이미 주디스 슈클라의 [일상의 악덕]과 같이 인간의 공격성-폭력성을 다룬 여러 훌륭한 저서를 통해 알 수 있듯, 우리네 정신의 역동에는 '공격성의 전염'을 관찰할 수 있다.


 이것을 다시 초자아-아버지의 이름으로 서술하려고 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취약한 자아에게는 거부되고 억압된 '공격성(안나 프로이트의 '이드')'이, 누군가에게는 용인되고 허락되어 있다. 그것을 발견한 자아는 '어? 해도 된다고? 그럼 나도'가 아니라 전이와 투내사를 발휘해 '그럼 저 새끼를 공격하면 되는구나'가 된다. 공격성이 용인된, 그러니까 초자아가 사라진 듯 보이는 자아를 보면 늘상 당하고 제한되기만 했던 자아가 이제 초자아로 대리되어 그 자아를 조질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것이다. 이런 서술이 '실제'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일단 현실에서 이런 면모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얌전한 대중은 언제 그랬냐는 듯 모난 돌을 말그대로 양심의 가책 없이 난도질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정신 순환을 문화로 만들어 유지시킨 역사 속 사례는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만약 이 서술 전제가 유효한 것이라면, 지금 내가 증상이라고 포착한 나의 공격성은 쉽게 말해 나 스스로의 공격성을 억압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문화적으로 아주 가벼운 수준에까지 확장되어 있는, 예를 들어 '베스트셀러 읽는 사람'이나 '유행하는 맛집에 득달같이 몰려드는 인간들' 따위로도 번져 있다. 이 코드는 융이 집단 의식이라고 부른 바로 그런 의식 상태들인데, 내가 이것에의 가치박탈이 자극되는 이유를 융은 '개성화 작업'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라고 말할 뿐이다. 융 또한 집단 의식에 대한 가치 박탈을 부지런히 수행했고, 또 권고하기도 한다. 개인의 정신 입장에서 집단 정신은 유해할 뿐이다. 왜냐하면 집단 정신은 개인 정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대시는 그쪽이 먼저 했으니 나도 한다, 따위의 공격성 전염 코드다.


 하지만 이걸 작업으로 가져가기 위해선, 계속 축을 놓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취약한 자아 입장, 바로 그 입장을 관찰해야 한다. 내가 느끼기로 일반 대중을 향한 가치박탈이 왜 나로 하여금 공격성 발작 버튼으로 자리잡았는지는 잘못된 문제 설정인 거 같다. 그것들의 뿌리는 사실 다른 데서 올라온 것이지만 표면에 드러난 줄기가 서로 얼키고 설켜 한몸인 것처럼 보이는 문제 같다. 이것은 추상적 사고에 따른 무효화나 청소년기의 지성화라 부르는 일련의 자아 방어 기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나는 이걸 방황하는 추상화라고 부르고자 한다. 청소년기의 지성화라 함은 관찰되는 현실에 대해 이성이 발달하면서 자주 거쳐가는 단계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특히 이 추상으로의 도피가 용이한 성향(이걸 내향이라고 부르든 사고 지향이라고 부르든)에게 있어 이 단계는 기본적으로 현실과의 안전 거리 확보다. 현실의 다양성과 변화무쌍은 대응하기 까다롭고 대처에 늘 실패할 확률이 높다. 그럴 거면 차라리 안전하고 가능하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이미지로 현실을 둔갑시키는 게 자아에게 있어 기부니가 좋다. 여기에 현실 한 숟갈씩 넣다 보면 '청소년기의 지성화'가 만들어진다. 철학자로 발달한 사람들의 청소년기는 대체로 이 지성화 특징을 빠짐없이 내보인다. 개념이 거칠고 사납다. 일반화가 아주 당돌하다. 선별적인 차이 인지-배제가 아주 기깔난다. 이런 걸 그냥 퉁쳐서 '어렸을 때의 이성'이라고 부르든, 질풍노도의 사유라고 부르든 그 자체로는 크게 문제는 아니다. (융의 유형론에 입각하면 열등한 상태의 사고, 혹은 열등한 상태의 로고스라고 부를 수 있는 면모들이기도 하다)


 다만 이 상태 또한 '취약한 자아'와 마찬가지로, 절대 발달될 수 없는 상태이자 저항 모드라는 것, 이걸 염두에 두고자 한다. 이 기초적인 추상화 단계의 코드가 고착화됐을 때는 아무리 발달한 것처럼 보여도 그 흔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 이것을 미성숙한 면모, 어리숙한 면모, 이성-사유의 코드라면 '맹점'이라고 부르더라도 이건 일반적인 발달론 문법과 매우 유사할 뿐, 별다른 인식을 제공해주진 않는다.


 나에게 있어 청소년기의 지성화는 '자아 발달'과 결을 같이 한 최초의 현실화 중 하나다. 당시 내가 '나'에 대해 눈을 뜨고, 그러니까 '진정성'을 막 발달시키려고 할 때 바로 이 지성화와 함께였다. 당시의 기록들을 보면 아주 가관이다. 오만하고, 당돌하고, 발기된 대가리로 달려드는 코뿔소같다. 세상에 대한 환멸, 공격, 옳고 그름에 대한 경직성. 학부 때 철학 교수가 상담으로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젊은 애들이 니체에 빠지는 건 흔하지'라고. 당시의 나는 이 가치박탈을 몹시 견디기 힘들어 했고 실제로 그닥 인정하지도 않았지만, 다 이유가 있는 관찰이기도 하다. 당시 나의 불만은 그 내용을 다루고 논하는 게 아닌 그 바깥의 거리두기로 그저 '남 일처럼' 말하는 태도에 있었으나, 어쨌든 이 구도(나-남)가 다채로울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전무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청소년기의 지성화와 맞물린 취약한 자아는 나에게 있어 (타인) 정신의 향락이기도 했다. 중요한 건 타인이 괄호쳐졌다는 것이고, 이것의 의미는 곧 내가 취약한 자아로서 추상화를 수행한다는 걸 가리킨다. 이 코드가 나에게 매우 뿌리 깊기 때문에, 내가 시 쓰기에 있어 '같지만 다른 현실'로 압축시킨 문장이 나오는 건 매우 일관성 있는 연결이기도 하다. 즉, 나에게 있어 외부 현실이란 '나'가 맞서기에 너무 견디기 힘든 무엇이기 때문에 나의 추상화는 이것의 판본, 그러니 '현실 한 숟갈 한 숟갈을 계속 넣어 다른 현실로' 중재하는 전략이다. 여기에 내 개인사의 특징적인 사건, 아버지로 인한 가정 몰락 체험이 '최초'로 각인됨을 고려한다면, 이게 왜 뿌리가 깊을 수밖에 없는지 그 맥락을 살피는 덴 크게 어렵지 않다.


 이건 나에게 무력감을 야기하는 주요한 뿌리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 인간 정신의 참으로 기묘한 특징 하나를 살피자면, (아마 심리학에서 여러 신드롬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바로 그 코드지만), 무력하고 취약한 외부 현실에서 그에 따른 대응 전략으로 어떤 구조화가 벌어졌을 때, 그 구조화를 반복적으로 채택하는 건 정신의 생리 입장에서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더 이상 외부 현실이 최초의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구조를 채택할 때 '최초의 현실 상황'이 딸려나온다는 것이다. 즉, 무력한 상황일 때 무력한 자아로서 취한 기제는, 이후 그 기제를 사용할 때마다 무력한 상태와 맞물린다는 것이다. 이 우로보로스 매듭/고르디우스 매듭은 마치 인식론-존재론의 위상 매듭과 같이 우리 인간 정신에 있어 매우 혼동스럽게 여겨지는 재귀성 중 하나다.


 그러나 정신 역동을 잘 관찰하다 보면 이러한 재귀성이 혼동스럽게 여겨지는 이유가 바로 논리적 접근으로 이를 바라보려 하기 때문에 비롯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즉, 코드가 맞질 않은데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할 때 발생하는 난처함이다. 나는 재귀성이 하나의 효과라고 관찰하는데, 만약 무력한 외부 현실에의 방어 기제가 곧 나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으로 맞물려 있다면 이것은 하나의 순환으로, 같지만 다른 매듭을 관찰할 수 있게 돕는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따위의 순환 코드는 파훼법이 있다기보다 인과성 그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효과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치 어떠한 '~~충동'처럼, 무력화 충동이라도 있는 듯 할 수 없는 데도 할 수 없음을 확인하고 승인받기 위해 그것으로 달려가는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을 '이드로 돌아간다' 또는 증상으로의 회귀, 퇴행한다라고 부르는 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거 같다. 이 역동성 그 자체를 잘 관찰하기 위해 시도되는 나의 몸부림은, 일단 매듭 자체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 '발달되지 않는다'는 건 그런 측면에서의 풀이다. 아마 이런 태도는 20세기 중후반 여러 학자들에게서 태동되기 시작한 코드 중 하나일진데, 후기 라캉도 그런 면모를 내보이기도 하지만 일단 일상 속에서 사용자로서 이걸 활용할 수 있는지의 실용적 측면은 아직 보급되지 않은 실정이다. 순수한 인격 작업은 그런 측면에서의 도전이기도 하다.


 나에게 있어 가치박탈은 곧 추상화의 무력화와 맞물린 뿌리로 이어진다. 그리고 공격성은, 이와 별개로 현실에의 무력화와 맞물린 뿌리로 이어진다. 이 둘은 각기 다른 뿌리로 보인다. 취약한 자아가 하나의 기제를 획득했던 최초의 의미 연결 순간, 그것은 나에게 있어 저항의 정체 중 하나다. 그것들은 나에게 '저항'을 자극하고, 또 그러한 상황이 곧 현실과의 연결임을 인지하게 돕는다. 그러니까 현실을 어떻게 인지하냐?에 따른 개인의 고유성이 나에겐 이런 코드들이다. 나는 현실을 대체로 타 정신의 인지로 인식하고, 또 그런 인지들의 코드들이 현실을 어떻게 인지하는지로 인식한다. 그러다 보니 '욕망'이 중요한 기제로 포착되고, 어떤 인간이 세상을 향해 무슨 말을 할 때 그 이면을 감지하는 게 자동화되어 있다. 이 모델링이 나에게 기제로 작동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증상이라고 부른 것들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재귀성 매듭을 인정한다면, 나는 다시 출발해야 한다. '견디기 힘든'이라는 건 무엇인가? 가치박탈과 추상화 등으로 표면에 드러난 바로 그 취약한 자아의 반응은 나에게 있어 그러한 인지에 휘말리는 모종의 취약함이다. 빌헬름 보링거의 [추상과 감정 이입]을 해제하는 융의 서술에서 포착한 열쇠 중 하나가 여기에 잘 맞아떨어지는 거 같다. 그것은 바로 '자기 소외'다. 자기 소외란 하나의 거울을 연상케 한다. 취약한 자아에게 있어 거울은 이상의 [자화상]에서 나타난 코드와 유사하다. 자신이 비춰진 면모에서 '반대되는' 행위를 보며 이상함을 감지하는 바로 그 정동 반응은 곧 자기 소외로 풀이되는데, 이것을 관찰할 수 없을 때, 그러니까 '동일시'나 '투사'가 활용된 '감정 이입-공감' 혹은 '추상화'가 수행될 때 이 정동 반응은 은폐된다. 이 은폐는 하이데거의 존재자 은폐 코드와도 잘 연결되어 있는데, 우리가 이것을 탈은폐시킬 때 요구되는 어떤 의식 상태는 그것의 이면을 포착하는 현실계의 시니피앙 출현으로 덕을 볼 수도 있지만 내가 느끼기로 그때의 의식 상태란 취약한 자아의 무력화 너머에 당도한 상태에 가깝다. 즉, 무력함 너머의 초연함이라 불리는 바로 그 '벗어남'이 모종의 관찰을 가능케 만들고, 이런 거리 두기가 발생할 때의 이격을 '자기 소외'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이를 어떠한 이격도 없이 '딱 맞아 떨어지는' 체험을 했을 때를 '현존의 체험'이라고 부른다면, 앞서 말한 '견디기 힘든'은 곧 (라캉식으로 말한다면)현존의 체험의 결여로 인한 불안 상태로 풀이될 수 있다. 이걸 다시 일상 코드로 회부시키면, 견디기 힘든 순간 속에서 취약한 자아가 겪는 상태란 '자기 자신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 그러니까 정신 입장에서 보면 의미망 기제가 확인되지 않는 상태에 가깝다. 이걸 견디기 힘들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전제 중 하나는, 바로 '현실 참여'다. 


 보통 일상에서 이러한 현실 참여는 타인이 시전한다. '야 이거 어때?'라는 반응의 호출이라든지, '야 이거 재밌지 않냐?' 따위의 체험 호출이라든지 타인들의 표현에는 늘 '나의 의미'를 요청한다. 우리는 이걸 대화라고 부르고, 가십이라고 부르고, 의사소통이라고 부르는데 정신 입장에서 보면 이것에의 주도성과 수동성, 교환과 실패 등 다채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내가 취약한 자아로 붙들고서 문제삼는 '견디기 힘든'은, 아무래도 과도한 수동성, 과도한 실패 경험으로 점철된 그러한 상황들의 연속이다. 


 딱 잘라 말해, 건강한 정신의 인간은 주변 사람과 환경에 두루두루 적응하며 아무런 허들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들은 집단 정신의 현존재다. 반면 건강하지 못한, 그래서 늘 저항을 자극받고 소외를 자극받고 끊임없이 기제를 활성화시켜야 하는 정신의 인간은 문자 그대로 '개인화'된 정신이다. 이 구분 없이 '발달'을 말할 수는 없다. 사회문화적 올바른 발달이란 집단 정신으로의 발달, 그러니까 철저히 개인화로부터 멀어지는 정신 발달이다. 반면 이성 사용자들이 누누히 지향하는 발달은 늘 개인화된 정신 발달이다. 이들은 의식 분화를 힘써 세상에 만연한 권력과 폭력에 저항해야 하고, 착취와 예속 코드에 식별력을 갖춰야 하며, 무엇보다 인식의 힘을 지향한다. 추상화나 가치박탈이 갖고 있는 뿌리는 바로 이 구도를 혼동함으로써 비롯된 것이다.


 정작 내가 분화시켜야 할 것은 '대중'과 '나'의 분화가 아니다. 내가 중재라는 가치를 의미망의 핵심으로 잘 끼워 넣어 모든 걸 재구축하는, 이 방대한 자기 작업에 삶을 걸어버린 이상 수행해야 할 분화는 취약한 자아를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게 아니라 상이한 재귀성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의 분화다. 분명한 건, 자아를 자아로서(사실은 초자아로서) 다루려고 할 때 반드시 문제가 심해진다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 나의 증상이라고 부르는 것들과 취약한 자아 간 관계는, 각각의 매듭을 서로 끊어내지 않는 게 관계의 약속이다. 이것은 진부한 대안이기도 한데, 자아 모델링과 자기 증상에 있어 활용할 수 있을지는 몰랐다. 되는 건지도 모른다.


 정리하면 이렇다. 가치 박탈이라는 공격성은 인지의 출발점을 수정하면 해결된다. 추상화라는 무력감도 마찬가지다. 어디서부터 출발할 것인가가, 사실 재귀성 코드의 핵심이다. 서로 얼키고 설킨 매듭이라면, 그것을 끊어낼 게 아니라 어디서 출발해 순환에 도달할 것인지, 그러니까 '매듭을 체험할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이걸 '과정'이라고 부른다면, 이건 정신 입장에서 (마뚜라나 바렐라 선생들의 인지 모델을 채택한다면)자기생성조직의 새로운 구조접속을 야기한다. 이게 과연 진짜일까? 실용적일까? 하는 건 '인과성 인지'에 있어 필패다. 우리에게 재귀성이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건, 그만한 인지의 탄력과 가소성을 트래킹할 수 있는 분화가 부족하기 때문인 거 같다. 히사오의 인지 모델에서 빌려올 수 있는 '미분-적분 회로'에서 중요한 메타포 중 하나는 바로 '소음 처리'다. 노이즈를 얼마나 혹은 어떻게 처리하는지의 그 방법에 따라 미분-적분 회로는 상이한 인지로 나아간다. 여기서 말하는 소음 처리는 바로 외부 환경에서 도착하는 또다른 '구조', 그러니까 나의 개인사로 비추어 말하면 아직 나에게 형성되지 않은 의미망 연결이다. 


 어디서 인지를 출발할 것인가, 이것은 순간주의 시대에 매우 불리한 전술인 거 같다. 사실 나는 20대 중후반에 이걸 하다 포기했다. 자꾸만 실패해서 포기한 게 아니라 너무 지쳤기 때문이었다. 지쳐 나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건 당연했다. 중심이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멀리, 자신이 갈 수 있는 미지에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는,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희망'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건 인격의 기본이기도 하다. 오늘날 21세기 젊은 세대의 정체성-인격을 분열로 보든 '미래 없는' 걸로 보든 기존의 '희망'과는 확실히 다르게 구성되고 있다는 건 현실이고 사실이다. 그렇다고 구성 핵심이 빠져 있다는 식으로 위기나 절망을 운운하기엔 아직 이르다. 우리에게 희망이 무엇인가? 하는 건, 희망이라는 어휘가 갖는 의미의 무게, 정신 입장에서 그 의미가 어떤 주요한 기능을 발생시키는지의 효과, 그러니까 인격과 자의식을 운용하는 데 있어 얼마나 핵심적인 것인지를 묻는 일과 같다. 이것은 대개 의식적으로 할 필요가 없어야 하는 게 맞지만, 내가 '어긋난 사람'이라고 부르는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선 그 필요가 요구되기도 한다. 나에게 있어 희망은 중재다. 그것은 미래를 기다릴 수 있게 만드는 힘이다. 내가 의식적으로 이걸 충분히 매만지고 가다듬은 뒤 이제 더 이상 꺼내 매만질 필요도 없이 단단한 의미가 되었을 때 내 정신은 더 이상 중재라는 어휘를 운운하지 않을 것이기도 하다. 아직은 더 매만지고 가다듬어야 할 시기인 거 같다.


 감각의 열등함은 추후로 미루기로 한다. 심각할 정도의 증상도 아닐뿐더러, 정신 운용에 있어 약간 퇴행 1번로 같은 느낌이라 시급하지도 않다. 즉 가장 열등하기 때문에 그만큼 막대하지도 않다. 새끼발가락 같달까. 없으면 문제되겠지만, 때로 자주 찧이지만, 그래도 딱 거기까지다. 실제로 나는 어릴 때부터 왜 그렇게 문턱에 새끼발가락'만' 찧어댔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새끼발가락이 말리고 발톱마저 분화되어 자란다. 나의 새끼발가락의 발톱은 2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한 쪽은 '자주 찧기 때문에' 껍질같이 자라는 발톱 부분이 있고, 다른 쪽은 다른 발톱처럼 자라는 부분이 있다. 이건 그저 내 증상과 잘 지내기로, 일단 지내도 크게 문제는 없기 때문에 유보하기로 한다.


 인지의 출발 조정을 일상에서 수행하는 연습을 다시 시작하기로 하며 이번 관찰을 마친다. 취약한 자아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다는 느낌이다. 굳이 롤플레이로 묘사하면, '뭐 괜찮네'라는 퉁명스러움이랄까. 자신의 뭔가를 건드리지 않고도 상황이 변할 수 있다는 데에 어떤 편안함이 있달까. 여튼, 쓰기 작업에도 이 희망이 연결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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