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위한 그림일기>를 읽고
오늘 책 한권을 읽었다. 마음이 가는 문장이 정말 많았다. 밑줄을 그은 사진을 몇 장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렸더니 많은 분들이 책의 제목을 궁금해 해주셨다. 책의 제목은 <변화를 위한 그림일기>다. 예술치료사이자 화가로 활동한다는 정은혜 작가는 자신이 믿고 사랑하는 예술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예술치료사로 활동하면서 만난 벽이, ‘치료’가 아니라 ‘예술’이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에 거부감을 갖거나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는 예술을 소통과 표현이 아닌, 재능이 있고 없음의 문제로 간주하는 우리나라의 사회적 분위기를 콕 집어 이야기한다.
나는 사람들이 그림, 미술, 또는 더 나아가 예술에 대하여 거부감이 너무나 커서 진짜 싫어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는 관심이 없는 것을 거부하거나 저항하지는 않는다. 미술에 대한 반감은 어쩌면, 사랑하는 것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본래의 언어를 빼앗겼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그것을 만나려면, 어쩌면 많은 마음의 벽들을 먼저 만나야 할지도 모른다. ‘왜 나만 못하는가?’하는 비교하는 마음, ‘나는 원래 못해’라는 낙심하는 마음, ‘나 같은 사람은 예술을 할 재능이 없어’라고 하는 판단하는 마음, 부끄러운 것을 하면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 것 같은 불안한 마음 등등.
나 또한 예술경영을 공부한다고 말했을 때 만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저는 예술은 잘 몰라서요.’, ‘예술은 너무 어려워서요.’라는 말이었다. ‘저도 잘 몰라요.’하고 히히 웃곤 했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쩐지 나만큼은 잘 알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양미술사나 유명한 아티스트의 뒷이야기 같은 것을 줄줄 꿰어야 할 것 같았지만, 그게 정말 내가 원하는 거였을까? 혼란스러웠다. 그런 쪽으로는 자신이 없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유독 예술의 본질과 의미를 질문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내가 “우리는 모두 예술가로 태어났다”고 말할 때, 나는 우리가 모두 삶의 예술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예술가는 자신의 삶 전체를 창조적으로 만드는 사람이자, 하루하루의 일상을 통해 자신을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한 평생을 쏟아 부어야 이룰 수 있는 완성된 결과물이나 숙련의 경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삶의 예술가는 삶을 창조적으로 가꾸는 사람들이고, 일상을 특별하게 하는 행위들로 채울 줄 아는 사람들이다.
‘삶의 예술가’라는 단어는 내 마음을 짜릿하게 한다. 내가 원했던 것, 내가 사랑했던 예술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것을 깨달은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나 자신에게 ‘예술가’ 또는 ‘문화기획자’라는 단어를 붙여주는 일을 오랫동안 망설여왔다. 어쩐지 대작을 만들어야만, 빛나는 재능을 가져야만, 예술계의 인정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예술하는 이유’라는 이름으로 연재를 시작한 후 글이 자꾸만 느려졌다. 쓰기 싫었다. 내면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나를 판단하고 검열했다. ‘네가 뭘 했다고 예술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해?’ 예술을 하며 살겠다고 마음 먹은 나조차도 이런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내 주변에도 그런 친구들이 많다. 분명 나에게 영감을 주고 있음에도, 삶을 대하는 시선을 풍성하게 만드는 예술적 순간을 선사해주고 있음에도 극구 자신은 ‘예술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예술가라 믿는 이들은 예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들에게 낯선 경계심을 표한다. 가끔 비즈니스 현장에서 ‘예술’은 농담거리가 되는 순간을 본다. ‘우리가 예술하는 것도 아니고~’ 라는 표현이 쓰인다.
이는 우리가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을 말해준다. 재능을 가진 선택받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것, 풍부한 지식이나 경력을 갖추지 않은 사람과는 관계없는 것,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만 몰두하는 것, 효율적이지 못한 것. 그런 마음들이 우리를, 나 자신을 예술과 멀어지게 한다. 나는 그걸 인지할 때마다 슬퍼진다.
목적이 있는 것, 용도가 있는 것, 가치가 돈으로 매겨지는 것이 아니면 다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사회 문화에서, 그러한 가치가 없는 것을 기꺼이 하는 행위가 예술이다. (여기에서, 그리고 이 책 전체에서 말하는 ‘예술’은 전문가적인 예술의 영역이 아니라 삶의 예술의 영역을 말한다.) 예술은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잘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며, 이걸 한다고 더 인정을 받거나 돈이 생기거나 명예가 생기는 것도 아니라면, 무엇 하러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삶을 통제하고자 하는 시스템 안에서는 이 같은 예술이 쓸모없는 행위이지만, 통제가 안 되고 예측 불가능한 안티프레질한 삶의 영역에서는 예술이야말로 우리를 불안에도 불구하고 온전케 하는 힘이다.
내가 ‘예술한다’고 흔쾌히 말할 수 없었던 것은 돈이 되는 일도 아니고, 안정적인 일도 아닌데, 이 일을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물질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자라났고 유능함, 능숙함, 쓸모 있음, 용도 있음이 가장 큰 가치라 믿으며 성장했다.
눈앞에 반짝이는 성과를 즉각 내놓을 수 없는 문화예술을 한다는 것의 의미는 설명하기가 어렵고 그런 언어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비즈니스의 의미와 가치를 설명하는 목소리는 크지만 예술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작다.
인간은 미학적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인류학자 디사나야케는 예술을 ‘특별하게 하기’라고 정의한다. 나는 이에 몇 가지 특징을 덧붙이고자 한다. 삶의 예술은, 일상 너머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예술을 다시 삶의 영역 안으로 들여놓는 것으로, 크게 다음 세 가지의 특징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그것은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행위들을 특별하게 만든다. 이것이 다른 말로는 의식(ritual)이다. 둘째로, 그 행위를 하는 사람과 행위 사이에 일치감 또는 몰입이 있다. 셋째로, 그 행위의 결과물이 가시적인지 비가시적인지를 막론하고 내면이 충만해지는 경험을 한다.
이 문장을 보고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 관점으로 나라는 사람을 다시 이야기해보자면 ‘일상 너머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예술을 다시 삶의 영역 안으로 들여놓는 방법을 가이드하는 사람’이지 않을까? 다시 마음이 뛰었다. 그리고 최근 가장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밑미(Meetme)’를 떠올렸다.
밑미에서는 다양한 크리에이터와 연계한 ‘리추얼’ 프로그램을 제안하는 비즈니스를 운영한다. 기존 예술의 틀에 전혀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가장 예술적인 방식으로 비즈니스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너무 멋지다. 요즘 사회에서 문화예술이 발휘할 수 있는 힘과 역할을 밑미가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년 생활예술의 관점에서 밑미 손하빈 대표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새로운 삶의 모델을 고민하며 만들어가는 그의 모습에서 뜻밖의 위로를 받아 울컥한 순간이었다. 오늘 갑자기 생각나 다시 꺼내어 봤다.
이성적 기질이 있는 사람이 감수성을 부드럽고 느슨하게 넣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런 접근이 있어서 지금 밑미에서하는 리추얼 프로그램도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어요.
우리는 주입식 교육에 익숙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뭐든지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안심하는 것 같아요. 근데 그게 익숙해지면 한편으로 무능력해지는 거 같거든요. 내 일상을 남에게 외주를 주는 것이니까요. 리추얼 프로그램을 처음 기획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게 자발성을 주는 거였어요. 자기 스타일을 찾아갈 수 있도록요. 그 고민을 제일 많이 해요. 어떻게 하면 열심히는 하게 하되, 빡세게는 하지 않게 할까. 그 중간을 찾는 것. 계속 피드백도 받고요. 중간에 못한 사람들이 있으면 왜 못했는지 물어보고요.
자기 방식을 찾도록 자발성을 만들어 주는 것, 그런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게 쉽지는 않을 거 같아요.
그래서 그게 가능하도록 촘촘하게 판을 만드는 편이에요. 각 리추얼 프로그램마다 리추얼을 만드는 '리추얼 메이커'가 있는데요. 리딩 하거나 가르치거나 코칭 하는 역할보다는 그들 스스로도 일상이 조금씩 변화할 수 있도록 같이 참여를 해요. 누군가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면 묘하게 탑다운 방식이 형성되거든요. 그래서 수료증이나 인증하는 방식도 만들지 않았어요. 한 달의 리추얼을 꾸준히 해내면 아주 소소한 포스터를 증정하죠. 상장을 물론 받으면 좋긴 한데요. 성공과 실패로 나누는 느낌이 들 것 같았어요. 리추얼을 만드는 것은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라 스스로 설계를 하고, 실행을 할 때 살짝 도움을 받는 수준으로 해보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해요.
손하빈 대표 인터뷰에서
밑미는 모두가 자기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자기다움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다. 리추얼 메이커는 그 과정에 답이 아닌 힌트와 영감을 제공할 뿐이다.
예술의 의미를 묻는 일에 조금 의기소침해져 있던 나에게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준 책 <변화를 위한 그림일기>, ‘밑미’, 그리고 꾸준히 글쓰기를 독려해준 #데드라인컴퍼니 친구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오늘의 글을 마무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