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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리 Jul 09. 2022

[부캐대전Ⅱ]
모든 이야기는 작품이 될 수 있다.

삼일로창고극장 <부캐대전Ⅱ> 스토리 ① 책극장, 먹는 이야기

"저는 언젠가 저만의 책을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책극장, 먹는 이야기> 워크숍 현장, 한 참가자가 수줍게 말했다. 나만의 이야기를 꺼내 책으로 만든다는 것은 영원히 '언젠가'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은, 어려운 과제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틀. 과연 우리는 나만의 책을 만들 수 있을까?




이야기하는 방식의 상상,
입체책이라는 도구


워크숍 리더인 김혜원 작가와 서브 리더인 윤혜진 연출이 각자가 만든 입체책을 꺼내 보여주었다. 입체책을 만드는 재료는 의외로 아주 평범했다. 깨끗한 종이 박스와 폐지, 색지, 이곳저곳에서 수집한 종이, 먹고 남은 과자봉지 같은 것들. 


입체책을 보여주고 있는 김혜원 작가, 윤혜진 연출 (사진제공=삼일로창고극장 ⓒ이강물)


작가는 종이를 덧대 입체적으로 만든 책장을 움직이기도 하고, 책의 한 부분을 떼었다 붙이기도 하며 한 편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김혜원 작가가 소개하는 입체책들을 보며 그동안 '책'이라 불러왔던 개념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방식의 책도 있을 수 있구나!' 


오른쪽 사진의 입체책은, 돌을 떼어내면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볼 수 있는 방식이었다.


책을 만드는 방식 또한 전혀 어렵지 않다는 것 또한 작은 충격이었다. 깨끗한 박스를 비슷한 크기로 잘라 테이프로 붙이기만 하면 하나의 책을 만들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책 만들던 게 생각나요."

"맞아요. 어린이들은 이런 걸 하루에도 몇 권씩 만들잖아요."


삼일로창고극장 스튜디오에 놓인 입체책 재료들. 일상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는 박스를 자른 것이다.


워크숍을 기획하면서 김혜원 작가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었다.


"책과 같은 방식의 작업을 하는 게 사실 별 거 아닌데 기술적으로 느끼는 것 같아요. 책 혹은 팝업북을 만든다고 이야기하면 기술적인 것을 익히는 자리를 상상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저는 책은 이야기에 맞는 방식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중요한 것 같고, 그 이야기에 맞는 방식을 찾고 상상하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생각해 보면 책이라는 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본질은 도구가 아닌 '이야기' 그 자체라는 것을, 입체책을 보면서 새삼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 표현 방식을 활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아무리 사소해도 괜찮은
각자의 '먹는 이야기'


나의 음식 선택 기준은 무엇일까?

내가 먹는 것은 나의 건강, 그리고 삶과 어떻게 연결될까?

나는 누구와 함께 먹고, 어떤 것을 먹고 있을까?


김혜원 작가는 각자의 '먹기'에 대해 생각해 보자고 제안했다. 어쩐지 의미 있는 이야기, 또는 독특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만 같아서 긴장이 되었다. 그런데 작가가 예시로 보여준 두 권의 '입체책'이 어깨에 들어간 힘을 툭, 빼 주었다. '스페인에서 맥주와 오징어 튀김을 먹은 이야기', '할머니의 레시피로 요리를 해 먹은 이야기'가 너무나 사소하고 귀여워 웃음이 터졌다. 


아, 저런 것도 이야기가 될 수 있구나!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일상에서 서로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살아간다. 직접 기른 채소로 음식을 해 먹었다는 이야기, 어릴 적 즐겨 먹던 과자가 이제는 사라지고 말았다는 이야기…. 왜 그런 것은 '이야기'가 될 수 없다고, '책'으로 만들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을까?


각자의 이야기 재료 카드를 수집해 자기만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들 (사진제공=삼일로창고극장 ⓒ이강물)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돕기 위해 스튜디오 한쪽 벽면에는 다양한 이야기 재료 카드가 붙어 있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무엇을'에 해당하는 다양한 재료 카드를 수집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리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어린 시절 엉뚱한 방식으로 만들어 본 요리가 맛이 없었다는 이야기

학교 매점에서 파는 피자빵을 무척 좋아했는데, 부끄러움이 많아 늘 숨어서 먹은 이야기

편안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먹는 음식이 그 어떤 맛집의 요리보다 더 맛있다는 이야기….


너무나 사소하지만 그래서 더욱 의미있는,
각자의 '먹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사진제공=삼일로창고극장 ⓒ이강물


이후 그렇게 꺼낸 이야기를 4개의 '장면'으로 단순화하고, 책의 형태로 표현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사실 4시간씩 이틀 동안 진행되는 워크숍이라 길다면 긴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숨도 쉬지 않고 자기만의 책 만들기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너무 귀여웠다. 이게 뭐라고 다들 이렇게 열심이고 진지한지. 


사진제공=삼일로창고극장 ⓒ이강물


보다못한 김혜원 작가가 "여러분, 좀 쉬어요!"라고 말해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을 만큼 열정적인 현장이었다. 몇 시간 동안 스튜디오엔 사각사각, 종이를 자르고 붙이는 소리와 간간이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소리만이 울렸다.



극장이 아닌 곳이
극장이 되는 순간



드디어 각자의 책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을 때쯤, 김혜원 작가는 스튜디오의 조명을 끄고 자그마한 무선 스탠드를 꺼내 불을 밝혔다. 순식간에 아주 작은 극장이 만들어졌다. 이 워크숍의 이름이 '책극장'인 이유를 알게 됐다. 사람들은 스탠드 사이에 직접 만든 책극장을 세우고 자신의 이야기를 서로에게 들려 주었다. 기묘한 순간이었다. 극장이면서 극장이 아닌 곳이 극장이 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는 작품이 될 수 있고, 

세상 모든 곳은 무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집으로 가는 길, 워크숍에서 들었던 문장이 계속해서 마음을 울렸다. 일상에서도 이런 순간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스쳐가는 이야기를 붙잡아 나만의 책극장으로 만들고 소중한 사람들과 나누는 경험 말이다.



스토리 디렉터의 덧붙이는 말


부캐대전의 캐치프레이즈처럼, 

정말이지 이상하고 귀여운 워크숍이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워크숍을 경험할 수 있겠어.' 


김혜원 작가는 기획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었다. "정체성에 대한 규정을 내리지 못하고 항상 경계에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요. 저는 무대미술을 하면서 학생이기도 하고, 이야기를 들려 주는 공연을 하며 입체책을 만들기도 하고요."


나 역시 경계를 오가며 살아가는, 나의 정체성을 쉬이 정의내리지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처음 <부캐대전>을 기획했을 때는 '내 안에 있는 다양한 정체성을 발견해보자'는 마음이 컸다. 한 사람 안에는 다양한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내 안에 있는 다양한 정체성을 알아봐주고 인정해주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2년째 부캐대전을 함께 하면서 새롭게 느끼게 된 것이 있다. '본캐'와 '부캐'라 부르는 각각의 정체성들이 서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창작자들과 이상한 워크숍을 함께 만들면서 오히려 '고유성'에 대한 생각을 더 자주 하게 된다. 얼핏 보기엔 접점이 없어 보이는 여러 정체성들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고유한 무언가가 탄생한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김혜원 작가의 <책극장, 먹는 이야기> 또한 연극을 만드는 공연예술가이자 책의 형태로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는 무대미술가, 음식에 관심이 많고 직접 농작을 하는 자급자족러, 사회학을 공부하는 연구자의 정체성이 모두 버무려진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워크숍이었다.


아직 적당한 이름을 찾지 못했을 뿐, 한 사람의 정체성은 조각나 있는 것이 아니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부캐대전은 그러한 융합의 현장을 생생하게 목도하게 한다. 여기서만 경험할 수 있는,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상하고 귀여운 것'을 경험하는 순간의 기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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