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퇴사를 하고 벌써 4년이 흘렀다. 그 사이 난 창업도 했고, 개인으로서의 일도 놓지 않으며 계속해서 나만의 일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최근 나에게 일어난 변화들을 읽어내는 일에 소홀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3월과 4월 회고를 몰아서 할 겸 최근의 생각 주제들을 정리해 보았다.
최근 '리밸런싱'이라는 투자 용어를 알게 됐다. 월별, 분기별, 년별 등 일정 기간마다 포트폴리오 안에 있는 자산의 비율을 조정해 리스크를 관리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일을 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이 '리밸런싱' 과정은 꼭 필요한 것 같다. 내가 나의 에너지와 시간을 어디에 '투자'하고 있는지, 그 투자의 효과가 어떠한지 살펴보고, 나에게 조금 더 맞는 방식으로 비율을 조정하는 것.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이 콘텐츠를 중심으로 일한다. 이것이 내가 퇴사하면서 세운 원칙이었다. 필로스토리에서 스토리 툴킷을 지속적으로 개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원칙이 종종 흔들린다. 물론 외주 작업도 좋아하는 일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명확하게 도움이 될 때, 정말 뿌듯하다. 당장의 수익으로 이어지기에 경제적 안정감을 느끼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비율이 100%에 가까워지는 건 좋지 않다. 외부의 요구에 의해서만 내가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 날, 위기감이 솟아올랐다. '아, 이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싶다.
4월 한달 동안 기록상점에서 전시를 했다. 처음에는 우리의 메시지를 중심으로 여러 크리에이터들의 이야기를 전시해 보면 어떨까? 했었는데 생각을 바꿨다. 그냥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보여주자. '이야기 수집가의 방'이라는 부제를 달고 전시를 셋업하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를 전시하는 게 그러고 보니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이 감각을 잃고 싶지 않다. 살다 보면, '나'보다는 '타인'의 요구에 응하는 일이 많다. 가끔은 그게 편하기도 하다.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고, 당장의 성과가 눈 앞에 드러나 보이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점점 뒷전으로 밀린다. 나에게 정말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 성장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거절하는 연습을 해보려고 한다.
내가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앞으로 나의 과제일 것 같다. 최근 혼자서는 도저히 그 시간을 확보할 수 없을 것 같아 데드라인 컴퍼니를 1년만에 부활시켰다. 창작하는 사람들, 창작을 하며 살고 싶은 사람들이 위클리로 모여 서로의 창작을 독려하고 창작물에 대한 피드백을 나눈다. 그 덕에 1년 동안 미뤘던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동료 최고! 개인의 콘텐츠도 그렇지만 필로스토리 차원에서도 만들고 싶은 콘텐츠와 해보고 싶은 실험들이 많다.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 쓰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른 일들에서 손을 덜고 콘텐츠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보고 싶다.
브랜드 워크숍을 진행하다보면 브랜드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야기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와 내 브랜드는 어떠한가, 따라서 진단해보게 된다. 어느 워크숍 현장에서 영감을 받아 써내려간 문장을 여기에도 옮겨본다.
지난 3년간 필로스토리는 기업의 경영적 고민(브랜드 정체성, 비전 정립, 버벌 자산 구축, 조직문화)을 듣고 크리에이티브 솔루션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 왔다. 또한, 기업에 제공해왔던 솔루션을 개인의 삶에 적용해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창조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콘텐츠를 만들어왔다. 라이프스타일, AC, F&B, 금융 등 다양한 산업군을 경험했고 비즈니스 환경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브랜드 정립의 의미는, 루틴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나'를 돌아보고 나의 '존재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는 낯선 자극과 환기가 필요하고, 그건 예술의 대표적인 기능이기도 하다. 여러 산업군과 비즈니스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에는 예술과 연계하여 더욱 다양한 크리에이티브 솔루션을 개발하고 싶다.
3월에 예술경영지원센터와 함께 작업하면서 이런 생각을 더욱 단단하게 하게 됐다. 예술과 비즈니스 사이에서 분명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겠다는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예술경영지원센터 최종 보고 현장에서 받았던 피드백이 내게도 큰 힘이 됐다. 여러 피드백이 있었지만 가장 유의미하게 느껴졌던 말들은 아래와 같다.
예술 현장에서 브랜딩이나 마케팅을 하려다 보면 산제적 언어에 괴리감을 느낄 때가 많았는데 브랜드 전문가이면서 예술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참여하니 서로 간의 언어에 접점을 찾아준 것이 좋았다.
예술 현장에서 산업의 언어를 쓰는 것이 우려스러웠는데 예술의 가치를 짚으며 그 거부감을 부드럽게 넘어서서 공감할 수 있는 언어를 찾은 것 같다.
나에게 예술은 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필로스토리의 일 또한 나는 예술의 관점에서 해나가고 있다. 예술과 비즈니스 양쪽을 오가며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 나의 오랜 바람이었는데, 조금씩 그 그림을 구체화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서 뿌듯하다. 이 마음을 이렇게 오랫동안 놓지 않고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 기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관점과 태도를 유지하며 일상을 살아 갑니다. … 누구나 살다보면 홀로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상황이나 한계에 부딪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순간을 만나게 되지요. 관성대로만 살다보면, 눈앞의 문제에 매몰되어 답을 찾기 힘듭니다. 그럴 때 예술은 우리가 좀 더 넓고 새로운 시야를 가지도록 도와 줍니다. 얼어붙은 삶의 감각을 깨워주는 것이지요." (예술의 쓸모)
5월 말에 이사를 간다. 나의 첫 독립이다. 나와 오랜 시간 함께 살아갈 가구들을 고르고 있다. 원래도 좋아했던 아트&빈티지를 공식적으로(?) 디깅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각종 빈티지 웨어하우스와 골동품 상점, 갤러리, 아트페어를 드나들고 있다. 정말 행복... 사실 가장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고르라면 디깅이 아닐까 싶다. 나에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탐구하고, 고심 끝에 나의 삶 한 켠을 내어주는 것. 컬렉팅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모두 시간을 들여 쌓아올린 것들이다. 그 시간을 존중하고, 또 사랑한다.
취향이 같은 사람들을 만나 친구가 되는 느낌도 유쾌하다. 최근 <마이 디어 빈티지>를 읽으며 유럽 빈티지 이야기에 푹 빠져 있고, 골동계의 거장(?)님을 만나 잔뜩 들떴다. 콜렉터 정체성은 나의 메인 아이덴티티인 것 같다. 소름인 건, 대학생 때 블로그에 '콜렉터가 되고 싶다'고 적었던 것. 역시 사람은 자신이 욕망하는 길로 결국 가나보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계속해서 컬렉팅하고 싶다. 여러 공간들을 보면서 내가 이런 갤러리나 아트페어를 운영한다면 어떤 작업들을 어떤 태도로 소개할까? 상상해보기도 하고, 어쩐지 이것이 나의 또다른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요즘 '조직문화'라는 키워드에 꽂혀 있다. 문화는 문화인데 조직의 문화라... 문화기획자로 활동하는 나이기에 '조직'과 '문화'라는 조금 낯설다면 낯선 이 조합이 궁금해졌다. 조직의 브랜드를 만들고 사업을 키우는 것과 조직문화를 만드는 건 또 별개의 문제 같다. 최근 요즘사와 데이나님의 영상을 보고 너무 재밌었는데 :) 조직문화를 만든다는 건 전하고 싶은 가치를 명확하게 정하고, 이를 조직 내에서 집요할 정도로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왜 일하는지, 어디로 나아가는지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 내가 일하고 있는 조직에서는 어떤 문화를 공유하고 있을까? 나는 스스로 문화기획자라 말하면서 조직문화에 대해서는 얼마나 주도적으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자문하게 되었다. 아주 작은 조직이지만, 만약 우리 외에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조직에 합류한다면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가치를 어떤 방식으로 공유할 수 있을까? 그것을 공통의 문화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일들을 할 수 있을까? 그동안 독립적으로 일하는 법을 고민해왔다면, 이제는 '함께' 일하는 법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이 주제는 앞으로 공부해야 할 것이 많을 듯.
내게는 사람이 가장 큰 자산이다. 한 사람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이 살아온 세계를 알게 된다. 나와는 다른 삶의 태도나 모양을 보며 힌트를 얻는다. 3월과 4월에는 의도적으로도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나와 비슷한 취향을 지닌 사람들의 세계에 적극적으로 조인했다. 당장에는 '노는' 것처럼 보여도, 시간이 흘렀을 때 나에게 가장 많은 영감과 변화를 안겨주는 것이 바로 이런 만남들이었다. 다양성과 상상력을 잃지 않는 것. 그게 내겐 가장 중요하다.
낙을 찾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다 무용한 것들에서 온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 사람은 정서로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양다솔 작가의 인터뷰 중
일견 무용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일들을 지속하고 싶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정서를 채집한다. 내 감정이 파르르 떨려오는 순간에 주목한다. 인간은 결국 정서로서 살아간다는 말이 내겐 영감이 된다. 중요한 자리에 바짝 긴장해서 갔을 때, 결국은 이 사람들도 '사람'이다. 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을 때가 있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은 인간적인 것들이다. 나는 이런 정서와 경험을 디자인하는 사람이고 싶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일들을 하고 싶다.
이렇게 정리하는 과정에서 매일 썼던 회고록이 큰 도움이 됐다. 그때그때의 감정과 생각들을 꾸준히 기록했던 과거의 나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회고노트 제작 소식도 살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