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프로젝트들이 있었던 2월이었다. 몰랐는데 중요한 일을 하게 되면, 나는 그 일 외에는 다른 것에 신경을 기울일 여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면서도 프로젝트 외의 시간엔 축 처져 있었다. 2월의 나에게는 그저 잘했다, 고생했다, 격려해주고 싶다. 프로젝트 마감한 후에도 에너지가 잘 돌아오지 않아 이제서야 2월의 회고글을 올린다.
1월과 2월을 온전히 쏟아넣은 <WHY WE LOVE SEONGSU>를 무사히 열고 닫았다. 7일간의 전시와 3일간의 마켓. 10일 동안 현대백화점 목동점에서 거의 살았다. 평소 백화점에 오지 않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던 것이 흥미로웠고, 이런저런 이유로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던 성수동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풍경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잘 하고 싶었고, 많은 것을 고민했던 프로젝트. 틈틈이 썼던 기획노트를 이곳에도 옮겨본다.
‘FIND YOUR STORY’ 자기다운 이야기를 발견하고 세상에 표현하는 것의 가치를 전하는 필로스토리의 2022년 첫 번째 스토리 프로젝트를 공개합니다. 물건 너머 ‘사람‘과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곳, <WHY WE LOVE SEONGSU>입니다.
붉은 벽돌로 뒤덮인 좁은 골목 사이 개성 넘치는 브랜드와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숨겨진 동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 자신에게 중요한 한 가지를 찾고 몰두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네. 다른 삶의 방식을 꿈꾸고 전에 없던 문화를 만들어가는 동네. 먹고, 마시고, 소비하기 좋은 성수동이 아닌 우리가 사랑하는 ‘진짜’ 성수동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성수동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로컬 브랜드 10팀과 성수동을 사랑하는 아티스트 4팀이 모였습니다.
10일 동안 이곳은 백 가지 물건을 파는 백화점百貨店이 아닌, 백 가지 이야기를 전하는 백화점百話店이 됩니다. <WHY WE LOVE SEONGSU>를 통해 좋은 이야기를 발견하는 기쁨과 새로운 삶의 방식을 상상하는 즐거움을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획·스토리 | 필로스토리
공간 디자인 | 미용실
그래픽 디자인 | 굿퀘스쳔 스튜디오
참여 브랜드
라시트포 르타리 메쉬커피 메일팩 밑미 위드플랜츠
이스트오캄 프라이데이무브먼트 프로젝트 렌트 한강주조
참여 아티스트
Sound | 정혜수
Visual | 장비치
Drawing | 카콜
Art Print Curation | 핀즐
이야기가 있는 영수증
영수증領收證이란, ‘돈이나 물품 따위를 받은 사실을 표시하는 증서’를 의미한다. 영수증에는 보통 물건의 이름과 판매수량, 가격 같은 것이 적힌다. 여기에 이야기가 적혀 있다면 어떨까? 이 상상으로 ‘이야기 영수증’을 만든 적이 있다. 2019년 기록상점에서 열었던 <크리스마스 스토리 마켓>에서다. (우리의 첫번째 스토리 마켓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담긴 물건을 판매하고, 그 이야기를 전한 것에 대한 증명서를 발급한다는 개념이 재미있었다. 이 개념을 이어 받아 Why We Love Seongsu 비주얼 연출 모티프를 ‘이야기가 있는 영수증’으로 설정했다. 백가지 물건을 파는 백화점百貨店에서 백가지 이야기를 전하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글라스하우스에 들어서면 수많은 ‘이야기 영수증’들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성수동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터뷰에서 수집한, 각자의 Why We Love Seongsu 에 대한 이야기다.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성수동의 다양성을 담아내려고 했다.
성수를 사랑하는 이유
너는 왜 성수동이 좋아? 라고 묻는다면
정말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대표적으로는
다양한 풍경과 사람들이 뒤섞여 있다는 것(Diversity), 자기만의 문화를 만드는 사람들과 만날 수 있다는 것(Originality), 새롭게 상상하고 변주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동네라는 것(Creative)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번 행사 또한 크게 3개의 코너로 구성해 그동안 우리가 발견해 온 성수동의 매력과 이야기를 다양한 경험으로 전하고자 했다. 방문한다면 리플렛을 들고 흐름을 읽으며 둘러보기를 추천한다.
+) 깨알같은 디테일을 나누자면, 리플렛 또한 영수증을 연상케 하는 길쭉한 모양새로 디자인했다. 실제 영수증처럼 느껴지기를 바라 한쪽 면은 거칠고 한쪽 면은 매끈한 종이를 골라서 인쇄했는데… 아무도 모르는 디테일일 거 같아서 공유. 현장에 온다면 관찰해 보세요 하하핫.
브랜드 스토리
마음 같아서는 모든 방문객들에게 브랜드 스토리가 적힌 영수증을 제공하고 싶었지만 예산의 한계로 그것은 포기하고… 대신 부스마다 커다란 이야기 영수증을 걸었다. 이 작업을 위해 10개 브랜드를 직접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고, 처음 보는 사람도 이 브랜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스토리를 개발했다.
브랜드의 시작부터 전하고 있는 경험,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방향까지 한 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편집했다.브랜드의 실제 언어를 최대한 살려서 쓰는 것. 편집자가 원하는 방향대로 각색하지 않고 브랜드의 의도를 훼손하지 않는 것. 솔직하면서도 본질에 가까운 것.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행잉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많은 것을 고민했다. 제작 업체에서는 하단에도 봉 작업을 해야 빳빳하게 걸린다고 했지만 엄-청 고민하다가 ‘영수증’이라는 모티프에 맞게 끝은 살짝 날리는 느낌이면 좋을 것 같아서 하단 봉을 과감하게 포기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마음에 든다.
무심하게 걸려 있지만 재질부터 봉의 두께, 고리를 거는 위치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결과물이라는 거. 어려운 아이디어였는데 심플하면서도 아름답게 디자인해준 우유니 디자이너는 그저 빛.
Diversity
다양한 사람과 이야기들이 공존하는 곳. 성수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성수동의 다양한 장면들을 소개합니다.
DIVERSITY IN SEONGSU
필로스토리에서 성수동을 표현하는 10개의 키워드를 뽑았고, 핀즐에서 키워드에 맞춰 10점의 아트 프린트를 큐레이션했다. 섬세한 큐레이션과 핀즐의 노트가 인상적이었다.
SEONGSU SOUND SCAPE
사운드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정혜수 작가는 성수동의 다양한 소리를 수집해 사운드 스케이프 작업으로 구현했다. 행사장에서는 내내 성수동의 다양한 소리들이 흘러나와 현장감을 더했다.
ORIGINALITY
자기만의 개성이 뚜렷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는 곳. 나다운 삶의 방식을 고민하며, 새로운 문화를 제안하고 있는 10개의 로컬 브랜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마지막 3일간은,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사람들과 직접 만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스토리 마켓'이 열립니다.
CREATIVE
옛 것과 새 것이 공존하고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결합하며 새로운 매력을 만드는 동네, 성수동. 성수동을 주제로 한 아트 프로그램을 통해 나만의 이야기를 직접 표현해 보세요.
성수동 마음지도 그리기
장비치 작가가 지난 몇년 동안 작업해왔던 '마음지도'를 현장에 전시하고 작가가 성수동 곳곳을 오가며 촬영한 사진을 스티커로 제작했다. 오가는 사람들은 마음 지도 위에 스티커를 붙여 자기만의 도시를 구성해볼 수 있었다.
DRAWING IN SEONGSU
성수동을 오가는 사람들을 스케치한 카콜 작가의 작품과 함께, 작가의 작업 위에 자기만의 컬러를 칠해볼 수 있는 참여 엽서를 함께 전시했다.
FIND YOUR STORY
마지막은 필로스토리의 기록의 부스로 마무리. 이곳을 찾은 이들이 마지막은 '나'의 이야기에 집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부스를 마련했다.
2. MBN Y FORUM
내 긴장의 원인 중 하나. MBN Y FORUM <와이쇼>에 좌장으로 함께 했다. 조기은퇴, 주 3일 출근 등 자기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일을 만들어나가는 사람들과 함께 선 자리라 더욱 의미있었다.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될 수 있을까>의 연장선에서 하게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래는 주최측에서 준 시나리오를 나에게 맞춰서 바꾸어 썼던 오프닝 시나리오다. 현장에서는 상황에 맞게 바꿔 말했지만, 기념으로 아카이빙해본다. “나의 일을 만들어가는 과정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빛나는 이야기가 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브랜드, 필로스토리의 대표이자 문화기획자, 크리에이터까지 - 다양한 정체성으로 일하고 있는 김해리입니다. MBN Y포럼 두번째 세션, 와이쇼를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나다운 일’에 대한 고민을 참 많이 합니다. 그 생각을 담아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될 수 있을까>라는 책을 만들기도 했는데요. 제가 이 자리에 오게 된 이유이기도 하죠. 그런데 ‘좋아하는 일’을 찾는 과정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있겠냐’, ‘좋아하는 걸 하면 싫어진다더라’... 이런 남들의 시선, 남들의 평가, 남들이 가는 길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오롯이 내가 원하는 걸 찾는 것이 정말 어렵잖아요.
하지만 꼭 필요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지금 나는 나다운 일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우리 모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남의 시선이나 의견 때문에 주저하고 포기한 적이 한번쯤은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의 문학가, 마크 트웨인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20년 후 당신은 했던 일보다 하지 않았던 일을 더 후회하게 될 것이다.”
저도 이 문장에 많이 공감을 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퇴사를 결정했던 이유도 바로 이거였거든요. 더 많이 시도해보지 못하고, 두려움과 불안함에 안전한 선택을 했던 것이 정말 후회가 됐어요. 더 늦기 전에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죠. 요즘의 저는, 일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은 세상에 없는 일일 수도 있고 , 내가 만들어서 할 수도 있고, 지금의 저처럼 여러 가지 정체성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오늘 모신 두 분의 이야기가 ‘나만의 일’을 만드는 과정에 큰 힌트가 될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니 매달 워크숍을 했지만 이렇게 강연 형태로 이야기를 들려드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포트폴리오의 태도, 포트폴리오의 기획, 포트폴리오의 전략. 세 가지 꼭지로 이야기를 준비했고 가장 강조했던 건 ‘나를 중심으로 내 일 이야기를 쓰자’는 것이었다.
내가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던 건, 사실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또는 취업이나 이직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도대체 나는 뭐 하는 사람일까? 혼란스러워서 잠시 멈춰 나의 일을 시시콜콜하게 회고하고 내가 믿는 나의 이야기를 정리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내가 나에게 ‘문화기획자’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 후로 그 이름에 책임지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것이 말만이 되지 않게 하려고 그 이름으로 계속해서 일하려고 애썼고, 나의 일하는 태도나 캐릭터를 찾기 위해 - 지금도 - 늘 고민한다.
나도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지난 일 경험이 눈앞에 촤르륵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포트폴리오를 만들려고 했을 뿐인데 심리 치료를 받은 기분이다’, ‘따뜻한 강연’ 이라는 말에 또 빵 터짐. 포트폴리오와 커리어, 다정함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게 나라는 사람의 재미 같다 ㅋㅋㅋ ‘포트폴리오’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하지만 ‘포트폴리오 이렇게만 만들면 성공한다’ 같은 메시지는 나는… 정말 못하겠음. 좋은 포트폴리오가 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나 스스로가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재밌어지는 포트폴리오’라고 답했다.
+) 내가 믿는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너무나 스윗한 헤이조이스 멤버들이 오! 하면서 맞장구 쳐주셔서 쑥스럽지만 되게 행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