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연극을 제작하면서 행정상 필요해 덜컥 만들게 된 '니터'. 물론 당시에도 내 나름대로는 의미를 담아 이름을 지었지만 특별히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다. 이 녀석을 사업자등록증상의 이름으로만 남겨둘 것이냐, 브랜드로서 존재감을 만들어줄 것이냐를 오랜 시간 고민했다. 그러다 올해 초 필로스토리와 작별을 하게 되면서, 온전히 나만의 속도로,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영역을 유지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니터’가 어떤 존재인지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수많은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정립하는 일을 해 왔지만 내 브랜드를 구축하는 과정은 어찌나 어렵던지. 그래서 스튜디오 휴휴를 운영하고 있는 브랜드 디자이너, 유진님과 함께 고민을 시작했다. 단순히 비주얼 개발에만 머무르지 않고 브랜드의 존재 가치와 특성을 섬세하게 살펴준 유진님 덕분에 대화를 나눌 때마다, 시안을 작업할 때마다, 내 머릿속에도 니터가 점차 윤곽을 드러냈다.
특히나 나는 텍스트 중심의 사람이다 보니 내가 언어로 정의한 것을 시각/경험적으로는 어떻게 풀어나갈지 함께 고민하는 과정이 무척 소중했다. 브랜드를 만드는 과정에서 했던 고민과 정립의 과정을 기록해 둔다.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작은 힌트가 되는 글이길.
보통 브랜딩 작업을 할 때는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슬로건을 도출하는 편인데, 니터는 슬로건부터 만들어 놓고 시작했다. '니터'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와 일하는 이유가 나 스스로는 명확했기에 브랜드 기획 과정에서 중심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Rethink in Artistic Way’
문화를 만드는 것은 익숙한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예술경영을 전공한 후, 오랜 시간 예술을 중심으로 다양한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해 온 문화기획자의 철학이 담긴 문장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일과 삶에 창조적 변화를 일으키는 순간을 사랑한다. 자신이 이미 가졌던 것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예상치 못한 마음의 울림을 만났을 때 반짝이는 눈동자들. 그 순간 사람은 자신의 일과 삶을 전환시킬 수 있는 힘을 스스로 얻는다고 믿는다.
예술을 다양한 영역에 적용해보며 깨달은 것이 있다. 장르와 영역은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선이라는 것. 자신이 가진 것을 새롭게 바라보고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며 다르게 나아가는, 예술적 경험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는 것. 나는 그런 순간을 만들며 살아가고 싶다는 것.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수 있다면, 예술을 통해 자신의 주도권을 확보한 이들은 이전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질문들에 대해 새로운 물음을 던질 것입니다.” 「블루 기타 변주곡」
니터를 통해 앞으로도 내가 생각하는 예술을 실험하고 실천해 나가고 싶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쉽고 빠르게 설명하기 위해서 언어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이해받지 못하는 순간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슬로건부터 썼는지도 모른다. 나를 위해서.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하지만 모든 일을 다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일을 할 것이고, 어떤 일은 하지 않을 것인지 정해야 했다. 타인이 원하는 역할, 내가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아닌 '니터'라는 브랜드의 역할을. 이 시기에 정말 많은 거절을 했다. 거절에도 용기가 필요했다. 당장의 경제적 보상이나 성과로 이어질 수 있는 일들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현재 니터는 브랜드의 고유한 문화를 발견하고 만드는 과정에 장기적으로 기여하는 프로젝트를 주로 하고 있다. 문화적 관점으로 브랜드를 깊이 읽을 줄 알고 본질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파트너, 예술적인 방식과 콘텐츠가 필요한 문화예술공간 및 브랜드에서 니터와 함께 하는 편이다.
니터는 고유한 문화를 단단하게 만들어 나가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합니다. 오랫동안 쌓인 이야기를 새롭게 바라보고 브랜드의 또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며, 지켜나가야 할 자기만의 문화를 명확하게 정의해 경험으로 기획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몇 번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발견한 인사이트로 위의 문장을 썼다. 단순히 나의 이상만을 담고 싶지도 않았고 내가 꿈꾸고 원하는 것이 세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고 싶어 니터를 빠르게 정의 내리는 것을 경계했는데, 유진님은 그 시간을 충분히 기다려주며 바뀌어가는 내 생각들을 작업에 충분히 반영해 주셨다.
“지구는 이제 더 이상 성공적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면 더 많은 중재인과 치유사, 복원가, 이야기꾼, 모든 유형의 사랑하는 사람을 절실하게 요구한다.” 『의미의 시대』
최근 내게 영감이 되었던 문장이다. '니터'는 단순한 '결과물' 개발에만 집중하지 않는, '창조적인 과정'을 전문적으로 디자인하는 브랜드로 키워 나가고 싶다. 함께 하는 파트너들이 '과정'에서 감동을 느끼기를 바란다. 외부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단기적인 성과를 만드는 일보다 내면을 단단하게 만드는 일에 긴 호흡으로 기여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
니터와 함께 하는 이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것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자신만의 문화를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싶다. 크게 키우고 빠르게 성장하기 위한 파트너가 아닌, 중재와 치유, 복원과 이야기, 사랑이 필요할 때 니터를 떠올렸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2023년에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콘텐츠와 니터만의 기획 방법론 개발에 집중했고, 문화기획자의 관점으로 하나의 브랜드가 자신만의 고유한 문화를 확장해 나가는 일련의 경험을 함께 디자인했다. 올해는 '니터'의 이름으로 문화역서울284, 교보문고, 희녹, 밑미, 더워터멜론, 서울연극제 등의 브랜드와 함께 일했다. 모두 니터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었던 프로젝트였다. 조금은 독특하고 낯설 수 있는 접근을 믿고 받아들여 준 파트너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크다.
니터는 브랜드를 단순히 '비즈니스' 또는 '조직'으로 해석하지 않고, '고유한 문화를 전하는 매개'로 정의하며 문화적 관점으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정립해 일관된 맥락의 경험을 설계한다. 해당 브랜드만이 가진 철학과 관점, 고유성을 끌어내기 위한 창조적인 방법론(워크숍, 인터뷰, 아트 프로젝트 등)을 제안하고 명확하고 체계적인 솔루션을 제공한다. 내년에도 이러한 방식과 관점을 유지하며 일하고 싶다.
기획 초기에 유진님과 브랜드 인터뷰를 진행했고 이 인터뷰를 통해 세 가지 핵심 가치를 정의했다. 니터가 되고 싶은 모습으로 성장하기 위해 지켜야 할 '일하는 기준'과 '태도'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브랜드 페이지에도 'Attitude' 탭을 만들어 이 세 가지 태도를 공표했다. 한 번에 쉽게 이해되지 않더라도, 진짜로 니터에서 믿는 것, 오래도록 지속할 가치를 담으려고 노력했다.
Cretive Ways-of-Seeing
창조적 재해석을 통한 가능성의 확장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는 새로운 관점을 갖기 어렵습니다. 니터는 고정된 생각과 환경에서 벗어나 브랜드의 맥락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도록 돕는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개발합니다. 평소에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과 독창적 접근, 비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브랜드가 '지금, 여기'를 넘어 또다른 가능성을 바라보고 상상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Change Through Arts
예술적 상상력으로 일으키는 구체적인 변화
예술과 비즈니스를 결합해 손에 닿는 변화를 일으키는 경험을 설계하는 것이 니터만의 독특한 방식입니다. 서로 다른 것을 연결하고 엮는 실험적인 방식을 고수하되, 해결과제 및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해 체계적으로 프로젝트를 관리합니다.
Wide-Awakeness
주체적 경험 설계를 통한 연관성 강화
니터는 참여자를 '주체'로 바라보고 브랜드와 참여자 사이의 연관성을 높이는 기획을 지향합니다. 한 순간에 반짝이는 경험이 아닌 브랜드의 자산과 장기적 성장에 기여하는 '모멘텀'을 만들고자 합니다.
올해 자체 브랜드들을 여럿 만들면서 체감하게 된 것이 있다. 내가 만드는 브랜드는 (어쩔 수 없이) 나를 닮았다. 하지만 나의 전부는 아니다. (나는 이것을 종종 해리포터에 나오는 ‘호크룩스’에 비유하곤 한다.) 니터 역시 그랬다. 나의 모든 면을 반영할 수는 없지만 나의 특정한 부분을 상징하는 녀석이었다. 그렇다면 니터는 나의 어떤 면을 상징할까? 니터는 어떤 존재일까? '나'와 '브랜드'를 분리해서 보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스튜디오 휴휴의 도움이 컸다. 시각적 관점으로 브랜드를 바라보며 자연스레 '나'와 '니터' 사이에 거리두기를 해볼 수 있었다. 니터의 3가지 핵심 가치를 시각적 컨셉으로 치환해 구현해 가는 과정이 흥미롭고 또 감동적이었다.
스튜디오 휴휴에서는 중요한 이야기에 방점을 찍고 명료하게 정리하면서도 틀에 얽매이지 않고 실험적인 방식을 시도하는 니터만의 태도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씀해 주셨다. 단정하고 정제된 그리드 안에서 자유롭게 톡톡 튀는 이미지를 담아 아래의 로고타입이 완성되었다. 예술적 상상력으로 서로 다른 것들을 엮고 연결하는 특성을 반영한 심볼도 함께 개발했다.
나의 일터가 어떤 곳인지, 어떤 브랜드이고,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는지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정립했던 이 일이 올해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에 꼭 기록해 두고 싶었다. 잘 기록하고 싶은 마음에 묵혀 두다 한 해의 끝자락에 맺음해 본다. (더 늦으면 발행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앞으로 '니터'로서 다양한 프로젝트와 콘텐츠들을 시도하고 싶다. 그게 나의 예술이자 작업일 것이다. 장르와 영역을 불문하고 예술적 상상력이 필요한 곳이라면, 언제든 니터를 찾아주기를. 내년에는 어떤 파트너들과 어떤 변화들을 만들어 나갈지! 니터의 2024년이 기대된다.
니터 홈페이지 & 포트폴리오 보러가기 : http://knitter.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