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에서!
이십세기약방을 되살리는 역할을 도맡아 하신 민순복 선생님과 만나 공간 곳곳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최대한 원형을 유지하며 되살린 건물뿐 아니라, 시어머니가 남겨주신 이불이나 옷장까지 버리지 않고 새로운 쓰임을 넣는 모습이 내게 큰 영감이 되었다. 창고가 있던 자리에는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계셨는데, 대부분의 공간이 타인에게 내보이지 않는 일상의 공간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자신이 있는 자리와 일상의 영역을 정성스럽게 보살피는 태도를 닮고 싶었다.
그 이후 몇번 더 이곳을 드나들며 우리는 점점 더 이 동네가 좋아졌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간판과 건물들이 흥미로웠고, 곳곳에 숨은 이야기가 많다는 것도 재미있었다. 오래된 것과 이야기, 문화를 좋아하는 우리와 잘 어울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곧, 배다리 이십세기약방(現 초록한의원) 옆 건물 1층과 2층을 계약하게 되었다.
계약 후 오픈하기까지 많은 과정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 이곳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였다. 돌이켜 보니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이 뿌리가 되어 지금까지 자라온 것 같다. 우리가 주목했던 건, 지역에 매력적인 이야깃거리와 자산이 많은데 이를 쉽게 경험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콘텐츠는 많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관심 있는 사람이 일부러 찾아봐야지만 알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우리가 발견한 지역의 매력을 공간을 통해 전하고 싶었다.
하나,
은은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나'에게 집중하게 되는 곳으로
신기하게도 배다리에 있으면 시간이 느슨하게 흘러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거리는 정말 조용하고 깨끗하다. 그렇게 자극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다 보면 나에게 집중하게 되고 미루어 둔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어쩐지 이 곳에선 상대방에게 조금 더 집중할 수 있고 평소라면 하지 못할 이야기를 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 배다리의 정서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에서 이렇거 저렇게 기물들을 놓고 이곳저곳에 앉아보며 '여기 이렇게 있으면 이런 기분이겠다.', '테이블은 이 정도 높이였으면 좋겠어.', '이쯤에는 전시대가 있으면 좋겠다.' 끊임없이 상상하며 공간을 만들었다.
둘,
요즘 감성으로 전하는
오래된 것의 매력
오래된 것을 쉽게 부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새로운 의미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우리가 평소 추구하는 것이자 배다리가 이러한 가치를 잘 느낄 수 있는 동네였기 때문이다. 젊은 작가들이 옛 정서에 영감을 받아 만든 소품들을 활용하거나, 오래된 사물들에 새로운 쓰임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꾸몄다.
셋,
지역에서 영감을 받아
큐레이션한 물건들
동양가배관 한 켠에는 큐레이션 코너를 마련했다. 책과 문구의 거리 배다리에 없었던 책과 문구, 우리 문화 기반의 콘텐츠들을 소개하기로 했다. 개성 있는 독립출판물과 로컬 문구 브랜드, 옛 문화를 새롭게 되살려 만든 창작물들을 선별해 전시했다.
넷,
무엇이든 해보는
창작자들의 기지基地
우리가 이 동네에 자리를 잡기로 결심하면서 유독 몰입했던 것은 배다리 헌책방 거리가 책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거리라는 점이다. 책 자체가 귀하던 시절, 가진 것은 없지만 꿈이 있는 젊은이들이 모여들던 거리라는 사실이 어쩐지 그 당시의 우리에게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던 곳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한 것이다. '무언가가 하고 싶은 사람들이 다시 이곳에 모여 무엇이든 해보는 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날엔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다. "여기 오는 사람들은 뭔가가 막 하고싶어졌으면 좋겠어. 나도 뭔가 해보고 싶다, 이런 걸 해볼까? 저런 걸 해볼까? 그런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이 지역에서 뭔가를 해보고 싶어졌을 때 우리를 떠올려줬으면 좋겠어." 그래서 2층은 창조적인 사람들을 위한 ‘기지基地’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꺼내고 작당모의하고 교류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1층은 누구나 편안하게 들어와 앉을 수 있는 열린 느낌의 공간으로 기획했다면, 2층은 조금 더 내밀한 느낌이 되었으면 했다. 때로는 공연장으로, 때로는 모임 공간으로 변화하는 다양한 가능성을 품은 문화공간으로 기획했다.
이렇게 결과적으로 쓰니 매우 쉽게 기획한 것 같지만 진행 과정은 다사다난했다. 공사비를 아끼기 위해 많은 것을 직접 시공했고, 공사 중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면서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부족하다는 생각에 오픈하는 것이 자꾸만 뒤로 미루어졌고, 마감일을 정해야 오픈할 수 있을 것 같아서 2021년 8월 15일, 가까운 이들을 초대해 프리 오픈 행사를 하기로 했다. 2층에 가구를 들여 놓기도 전인데, 아쉬운 대로 동양가배관의 문을 열었다. 배다리 생활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