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중심으로 돌아보는 2025 연말회고
1년만에 쓰는 브런치다. 올해는 유독 숨가쁘게 흘러간 듯 하다. 이제야 나와 대화할 시간이 나서 1년 동안 쓴 일기장을 다시 읽으며 회고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2025년을 열면서 내가 반복적으로 쓴 문장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집중하고 무언가를 이뤄내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다'는 것, 그리고 '재미를 되찾고 싶다'는 것이었다. 2024년은 패치워크를 창업하고 맞은 첫번째 해였던지라 꽤 긴장하며 일하기도 했고, 회사를 0부터 다시 만들어가면서 알게 모르게 지쳤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시작한 2025년 초의 가장 큰 고민은 '하고 싶은 게 없다'는 거였다. 충격이었다. 언제나 하고 싶은 것이 가득했던 나이기에, 내 안에 반짝임이 사라진 기분이 낯설었다. 그 시기, 과감하게 포기한 일들이 많았다. 내 안의 동력이 아닌 '왠지 해야 할 것 같아서' 하는 일들을 피하고자 했다. 하면 될 것 같은 지원사업도, 보상이 확실한 일의 기회도 모두 포기했다. 외적인 이유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으로 일을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는 겨울을 보내면서 올해는 새로운 일을 벌이기보다는 그동안 해왔던 것을 알리고 이를 기반으로 독립성을 확보해보자는 목표를 정했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봤다. 일단은 가장 오랫동안 키워온 커피 브랜드, 동양가배관이 있었다. 이전까지는 동양가배관의 브랜드와 상품 라인업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면 올해는 새로운 상품을 최대한 개발하지 않고 이미 만들어진 것을 알리는 일에 집중해보고 싶었다.
패치워크는 기존에는 작은 실험을 다양하게 펼쳐왔다면 이를 하나로 엮어내는 아카이브 작업과 막연하게 느껴지는 '도시실험'이라는 개념을 구체화할 수 있는 몇 가지 굵직한 프로젝트들에 집중해 밀도를 높여 보기로 했다. 패치워크가 운영하는 공간 역시 경험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리뉴얼을 진행하기로 했다. (어쩌다 보니 매년 하고 있는 공간 만들기...)
패치워크 이전부터 운영하던 니터는 패치워크와는 구별되는 존재로 키우고 싶어 고민을 많이 했다. 사실 운영자가 동일한데다 문화예술기반 기획을 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점이 많아 굳이 이걸 분리하는 게 맞나? 생각했지만 굳이 통합하고 싶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기준은 내 마음. 패치워크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실험하고 연결되는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한다면 니터는 보다 개인적이고 내밀한 경험을 선사하는 브랜드로 운영해 나가기로 결심했다.
사실 '파는 일'은 내가 제일 어려워하는 영역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계속 해왔고 잘 하는 건 매력적인 컨셉을 개발하고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 그런데 그 이상의 영역은 도무지 모르겠다. 마케팅, 도대체 어떻게 하는거야? 올해 내내 여러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공부도 하며 나름대로 고군분투했다.
열심히 콘텐츠를 만들어 보기도 하고, 스마트 스토어를 개선해 보기도 하고, 직접 커피 이벤트를 주최하거나, 오프라인 마켓에도 참여하고, 비즈니스 제안서를 만들어서 여러 기관에 보내보기도 하고, 우연한 기회로 퍼포먼스 마케터님과 일할 수 있게 되면서 광고를 집행해보기도 했다. 일 년을 돌아보니 다양한 시도들을 했네. ... 고생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 몇 가지를 꼽자면 커피브레이커스크루와 함께 인천에서 '커피파티' 행사를 열어본 것, 대만에서 2번이나 초청을 받아 해외 출장을 다녀온 것이다. (나의 성향상 어쩔 수 없이 문화 중심이다.)
커피파티 행사는 우리가 '커피'라는 주제로 열어본 첫 행사였다. 사실 그동안 나의 가설은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자연스레 거점이 되는 공간의 커피 소비로 이어질 거라는 거였는데 꼭 그렇만은 않다는 걸 지난 몇 년간의 실험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결국에는 동양가배관이 팔고 있는 것, '커피'라는 본질을 더욱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에 커피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해보기로 한 것.
다양한 지역에서 온 로스터리들과 만나 교류할 수 있었던 것도 좋았고, 대부분 로컬 커뮤니티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라 동네에서 커피 문화를 만들어간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동네 분들이 정말 정말 좋아해주셨고, 즐겨주셔서 놀랐다. 지금까지 우리가 진행한 행사 중 가장 반응이 컸던 행사가 아닐까 싶다. 단골 손님들 중에는 하루 종일 머무시는 분들도 계셨다. (여러분, 이런 걸 좋아하셨군요.)
그 뒤로 우리도 커피 이야기에 재미를 붙여 커피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콘텐츠로 만들어보기도 하고, 다양한 싱글 오리진 커피를 소개하거나, 아시아의 커피를 소개하는 소소한 기획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내년에도 커피를 주제로 일을 만들어보고 싶다.
지난 6월에는 초청을 받아 타이베이에서 열리는 YANEURA COFFEE&ART FESTIVAL에 참여하게 되었다. 우리를 어떻게 알았는지 너무 신기할 따름이었다. 한국에서 온 커피팀은 3팀뿐이었는데 묘한 동료애가... 다들 에너지가 너무 좋아서 이틀 동안 곁에서 부스를 운영하면서 많이 배웠다. 부산의 레이지모먼트 커피스탠드와는 같이 식사도 하면서 커피 브랜드 운영에 대한 이런저런 조언도 들을 수 있었다. 어떤 분야든 선배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신이 가진 노하우를 나누어주는 사람과 만난다는 건 참으로 귀하고 감사한 기회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또 다른 이벤트에 초청을 받아 11월에 다시 타이베이에 다녀왔다.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디자인 중심의 이벤트였는데, F&B팀 중에서는 우리가 유일한 한국팀이었다. PINKOI라는 디자인 플랫폼에서 10년째 주최하는 이벤트인데다 최대 규모, 최초 무료 행사여서 사람들이 정말 물밀듯이 왔다. 얼떨떨하게 3일이 지났는데, 이 일은 또 어디로 이어질지 궁금하다.
그 외에도 작년에 이어 아트 인 커피, 제물포웨이브마켓 등의 오프라인 마켓에도 꾸준히 참여했는데 마켓에 참여할 때마다 즉각적으로 대중적인 반응을 확인할 수 있어서 새로운 자극을 얻게 된다. 어떤 것에 반응하는지, 어떻게 이야기를 건네야 하는지 등 '시장'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다. 올해의 배움으로 내년에는 더욱 잘 팔아봐야지. 욕심을 내보자면, 올해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게 동양가배관의 공예 프로젝트다. 내년에는 작게라도 꼭 해보고 싶다.
패치워크의 올해 가장 상징적인 사건을 꼽자면 출판이 아닐까. 지난 4년 동안 인천 배다리 지역을 기반으로 해왔던 다양한 실험들을 엮어 책을 펴냈다. 작년, 브랜드 아카이브북을 만들자는 나에게 '본인의 이야기가 아니면 재미없다'며 원고를 쓰게 한 필호님의 공이 크다.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가며 주셨다. 소장각에서 정말 멋지게 디자인해주셨고, 텀블벅으로 펀딩을 받아 출간하게 되었다.
4년간의 이야기를 정리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지난 시간의 의미를 스스로 소화해야만 했으니까 말이다. 책을 쓰고 나니 '도시에서 실험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과연 어떤 분야에서 존재감을 만들어가야할까' 라는 새로운 질문이 생겨났다. 막연한 그림은 있었지만 말 그대로 막연한 그림이어서 내가 현실과 동 떨어진 상상을 하는 건 아닐까, 종종 우울해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미래에 만들어질 예술공간의 브랜드 컨셉 개발과 더불어 문화예술계의 다양한 주체들의 의견을 듣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더군다나 해당 공간은 완전히 새롭게 짓는 것이 아닌, 쓰임을 잃은 공간을 재생해서 만드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예정이라 했다. 킥오프 미팅을 준비하던 날,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공공예술, 브랜딩, 도시재생, 참여 디자인 등 내가 지속해온 활동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진심으로 흥미를 느끼는 영역에 꾸준히 물을 주면 언젠가는 싹이 튼다는 걸 느꼈다.
그리하여 진행하게 된 '미래의 예술공간 함께 상상하기' 워크숍! 우리도 처음 해보는 방식이었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각종 크리에이티브한 도구들을 정성들여 만들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다양한 관점이 한 자리에 모여드는 현장, 다채로운 주체가 도시에 개입하는 현장을 만드는 일을 더욱 잘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최고의 파트너십을 자랑하는 팀을 꾸렸던 것도 좋았다.
그 후 신기하게도 인천테크노파크의 의뢰로 '도시실험'을 키워드로 개발하고 있는 플랫폼에 대한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로드맵을 수립하는, 정말 어렵고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도시실험'을 실제로 진행하고 있는 전세계의 기획자, 디자이너, 개발자들과 연결되며 지적으로 엄청난 자극을 받게 된다. (그들이 하는 말의 반도 못 알아듣는 것이 현실이었다...)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하고 논문과 책을 찾아 읽기도 하고 전국의 도시실험가와 행정가들을 초청해 만나고 연구하는 자리도 만들며 꽤 긴 호흡으로 진행하고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프로젝트이긴 한데, 자발적으로는 절대로 하지 않을 도시 연구를 강제로 하고 있어서 정말 고통스럽고, 정말 도움이 된다(?)... 자발적으로는 절대로 안 했을 일이다. 머릿속에 산재해 있는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계기가 될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의미 있었던 프로젝트는 패치워크 공간 리뉴얼과 언노운 북 페스티벌이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날을 새도 다 못할 것 같아서, 가장 크게 느낀 점만 기록해본다. 오래 전 '사람의 발걸음이 끊어진 곳에서 좋은 콘텐츠를 만들었을 때 사람들이 다시 왔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궁금했던 기억이 있다. 과연 콘텐츠가 그런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오랫동안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해왔지만 내가 만드는 콘텐츠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지 확신하기 어려웠던 시점이었다.
오래 전의 이야기를 지금 하는 건, 이번 언노운 북 페스티벌에서 나 또한 콘텐츠의 힘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축제의 메인 이벤트가 열리는 이틀 동안 끊임없이 사람들이 동네를 찾아주었고 지역의 책방 사장님들 또한 눈이 휘둥그레져서 무슨 일을 벌인 거냐고 물어보실 정도였다. 리뉴얼한 패치워크 공간은 이들이 동네를 여행할 수 있도록 돕는 베이스캠프가 되어주었다. 지난 몇년 동안 지역에서 실험하면서 배운 것들을 모두 털어넣은 기획이었는데, 그게 통했다는 것에서 오는 짜릿함이 있었다.
동시에 '축제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강하게 느끼기도 했다. 함께 해준 파트너들과 크루들, 지역을 지켜온 책방과 초대 받고 온 크리에이터들과 브랜드들까지. 이들이 없었다면 축제는 시작할 수도, 완성될 수 없었다. 올해의 남은 시간 동안 축제라는 것의 본질에 대해서 더 생각을 이어가게 될 것 같다. 마침 올해는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의 파트너로도 (10년 만에 다시) 일하기도 했는데, 연말에 생각을 같이 모아봐야겠다.
내년에 패치워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올해 남은 시간 동안 천천히 생각해보고 대화도 많이 나누어보려고 한다. 최근 새삼, 패치워크가 자리잡은 지역의 특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사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도시 실험인 거 같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원도심에서 공간을 운영하는 것. 그곳에 온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하나 하나가 전부 도시실험 같다.... 역시 뭐든 익숙해지면 스스로가 잘 보이지 않나보다. 올해의 도시 실험을 갈무리한 결과물을 하나 만들려고 하고 있어서, 그걸 하다보면 생각이 더 정리될 것 같다.
패치워크에서 많은 일을 하다보니 니터에는 물리적으로 시간을 쓰기가 어려웠던 게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니터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많이 물어봤는데 처음 니터를 브랜딩할 때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할머니가 되어도 할 수 있는 일, 온전히 나만의 영역인 일을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니터를 통해서는 나의 가장 소중한 욕망들을 풀어내고 싶었다.
패치워크는 나에게 혼자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실험적인 일들을 '함께' 해나가는 곳 같다. 평생 살아온 서울을 벗어나 인천의 원도심에 공간을 만들게 된 것도 그렇고, 사람들을 모아서 함께 도시와 공간에 대한 상상을 펼치는 일도 그렇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경험하는 지역 기반 축제를 만들게 된 것도 신기하기만 하다. 도시, 지역, 사회, 커뮤니티와 맞닿아 있는 일들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도 '나도 두려워. 나도 처음이야. 어렵지만, 함께 하니까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며 손을 내밀게 된다.
니터는 나에게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어' 라며 소중하게 간직했던 꿈, 내면에 깊이 숨어 있던 욕망을 꺼내는 곳에 가깝다. 독립출판도 그랬고, 회고를 돕는 도구를 만드는 일도, 공연을 만드는 일도... 그리고 니터를 통해 만드는 콘텐츠는 한 명 한 명의 개인들과 연결되는 일 같다. 나의 세계와 그들의 세계가 서로 마주하며 내밀하게 연결되는 느낌이랄까.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그래서 마음을 울리는 그런 '장면'을 만들고 싶다.
올해 니터로 많은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조용히 꾸준히 해온 일이 있었으니 바로 사운드 이머시브 오디오극 <땅 밑에>를 프로듀싱하는 일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운드 아티스트 정혜수와의 장기적 협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연극 만드는 동료로 만나 친구가 된 혜수가 아티스트로서 걷는 여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비전을 같이 그려보고, 서로의 방향성을 공유하며 작품을 만들고 알리는 과정을 함께 해보기로 한 것이다. 작품 하나를 만드는 일과는 조금 다른, 더 장기적인 관점으로 일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다.
그 결실을 맺게 된 것이 <땅 밑에>를 쿼드에서 공연하게 된 것. 극장 공연도 너무 오랜만이고, 사운드 이머시브 오디오극은 국내에 사례도 거의 없는 작품이고, 해외에서 아티스트들이 들어와서 함께 작업하는 글로벌 프로젝트이기도 하고, 작품을 유통해본 일은 없는데 <땅 밑에>는 적극적으로 유통을 계획하고 있기 때문에 이모저모 나에게 새로운 생각들을 많이 안겨주는 고마운 프로젝트다. 다시 공연예술작품도 많이 보고 있고 새로운 가능성을 자주 꿈꿔보게 된다. (내년엔 진짜 베를린에 가고 싶다.)
올해는 나에게 이미 가진 것을 드러내기 위해 해보지 않은 일들, 나의 몫이 아니라 생각했던 일들에 뛰어들어 본 해였던 것 같다. 모든 게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당연하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니까. 그러면서 배운 게 많았다. 지금 나의 상황도 조금은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됐다는 점도 큰 변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회고의 계절, 겨울이 왔다. 이 글을 시작으로 올해 남은 시간 동안 계속 생각을 쌓아올리며 2026년으로 넘어가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