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상반기를 회고하며
상반기를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조금 더 나에게 솔직하기 위해 애썼던 6개월이었다. 연초에 진행했던 기질 검사가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나라는 사람의 타고난 특성을 온전히 인정해주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랜 시간,
내가 가진 모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자주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어하는 일은 세상과는 맞지 않을지도 몰라.'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조금 이상한 것 같아.'
그래서일까. 그걸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두려웠고 조금은 타협을 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무의식 중에 품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가진 기질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면서 내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올해는 더욱 나답게 살자'고 다짐했고, 더욱 나에게 맞는 일과 삶의 환경을 꾸려나가겠다고 결심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오랫동안 해왔던 일을 멈춘 것이었다. 본질적으로 내가 가려는 방향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선택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한 순간에 정리가 되지도 않았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건 아닐까, 마음 속에서는 계속해서 불안감이 솟아올랐고 그 이후로는 불안을 덮기 위해 당장의 보상과 인정으로 이어지는 (하지만 나와 맞지 않는) 일들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스스로의 목소리를 들어 주기 시작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신기하게도, 그러면서부터 일의 풍경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상반기가 훌쩍 지났다. 요즘의 나는 '만드는 일'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해 애썼던 지난 6개월을 기념하며 기록을 남겨 본다. 상반기에 집중했던 베스트 5!
문화역서울284로부터 연락을 받았던 순간이 상반기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다. 더군다나 나에게는 멀게만 느껴졌던 기획감독이라는 포지션으로 제안을 받고, '왜 저와 작업을 하고 싶으신가요'를 물었다. '다양한 장르와 문화를 다룰 수 있다는 점'을 가장 큰 장점으로 꼽아 주셨는데, 특정 장르의 전문성이 없고 모든 장르를 넘나든다는 게 어떤 면에서는 나의 컴플렉스이기도 했던지라 그 답변이 나에겐 큰 위로가 되었다. 이 경험을 통해, 진짜 내 목소리를 들어 주고 용기를 내고 꾸준히 지속하면 기회는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심으로 감사하다.
몇 개월쯤 지나니 사람들 사이에서 'RTO의 색깔이 생겨난 것 같다.', '요즘 재미있는 것 많이 하는 것 같다.', '공간이 살아난 것 같다.'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와 정말 뿌듯하다. RTO 기획을 맡게 되면서 '공간'과 '경험'이라는 키워드에도 더욱 집중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년을 운영한 후 어떤 변화가 생겨날지 궁금했는데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해보자!
상반기에 가장 많은 시간을 썼던 일이 바로 진 메이킹 프로젝트다. 함께 진을 만드는 진 메이커 동료들과 함께 진(zine)을 하나의 문화로 정의하고 국내에 'Zine Making Culture'를 제안하는 프로젝트를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다. 텀블벅 프로젝트부터 밑미와의 콜라보 프로젝트, 인사이트 트립, 북 페어 부스 운영과 abc zine school까지, 일이 될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오로지 즐거움만으로 이어온 일이 예상치 못한 수많은 가능성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꾸준히 창작자로서 활동하고 있는 것, 창작자로서의 정체성이 커진 것 또한 큰 변화 중 하나다. 이렇게 된 <Hide&Seek>, <Honeymoon in Belleville>, <나의 일에 대한 힌트 찾기> 등 진(Zine)을 꾸준히 만들며 진 메이커로서의 색깔을 만들어 가고 있고, 작년부터 함께 작업한 책 『작가들의 글쓰기 워크북』이 세상에 나왔다. 내년에 출간될 책의 원고를 마감했고, 그 동안 내가 만들어왔던 툴킷과 이야기를 정리한 툴킷북을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글을 쓰고 있다. (첫 단행본 계약!) 하반기에는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될 수 있을까』의 리커버 및 후속편을 독립출판하려고 준비 중이다.
'경험 디자인' 영역에서 전문성을 키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상반기에 공부도 많이 하고 관련 프로젝트도 진행하며 나름의 프로세스를 구축하고 있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툴킷도 만들어 실무에 적용 중이고, 신뢰하는 동료들과 콘텐츠도 개발했다. 『연관성의 예술』도 다시 읽고, 문화기획자로서 경험을 기획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생각도 쌓아나가고 있다. 최근 '경험을 만든다는 것은 한 편의 연극을 만든다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발견하고 혼자 감격 중. 서로 떨어져 있는 줄 알았던 나의 경험들이 연결되는 기쁨을 또다시 느낄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이 영역은 뭐랄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잘 하고 싶은 일인 것 같다. 보여주기 위한 일이라기보다 순수한 호기심과 열정, 잘 해내고 싶은 욕심 같은 것이 공존한다.
올해 상반기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내 브랜드'를 만들고 키우는 일에 에너지를 쓰기로 결심한 것이 아닐까. 오랫동안 브랜드 컨설팅, 문화 기획 일을 해왔기 때문에 '나의 콘텐츠', '나의 브랜드'에 시간을 쓰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나다. 스스로는 '체질 개선'이라 표현할 만큼 어려웠는데, 요즘은 부쩍 나의 브랜드를 정립해 나가는 데에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나에게 약한, 비주얼적인 부분을 담당해 주는 좋은 파트너들과 만나 어렵지만 재미있게 하고 있다. 일부러 느린 속도를 유지하고 있다. 급하게 가고 싶지 않아서. 충분한 시간을 들여 고민하고, 진짜 내 것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하반기에는 다양한 결과물들을 오픈할 수 있을 것 같다.
7월에 써놓고 이제야 발행하는 상반기 회고. 어느새 7월도 다 갔다. 남은 하반기도 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