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산책

책, 시와 산책

by 전퐁카

고양이들이 밤에 몸을 누이는 장소, 열매를 기대해볼 수 있는 나무, 울다가 잠든 사람들의 집......산책할 때 내가 기웃거리고 궁금해하는 것들도 모두 그렇게 하찮다. 그러나 내 마음에 거대한 것과 함께 그토록 소소한 것이 있어, 나는 덜 다치고 오래 아프지 않을 수 있다. 일상의 폭력과 구태의연에 함부로 물들지 않을 수 있다.

(한정원, 시와 산책, p.25)



딸 같은 동생이 있다. 네 살 터울에 딸이라면 좀 우습지만 10대 때부터도 이미 그런 생각을 했었다.


딸 같은 아들도 있다.

용건 없이는 부모에게 전화 한 통 안하는 내가

<딸 같은>이라는 관용어구를 써도 될 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내가 말하는 <딸 같다>는 공통점은 이 둘의 습성이나 외모라기보다는, 대상을 대하는 나의 시선의 같음이다. 그 둘을 대할 때 내가 <딸 가진 어미>가 된다는 뜻이다.


그 애들의 마음이 다칠까봐 전전긍긍하고, 가능하다면 온실에서 따뜻하고 촉촉하게 상처하나 없이 키우고 싶은 심정이 매순간 들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로 평생 살 수 있다면 그러라고 하고 싶었다.


정작 나는 세상에 긁히고 엎어져서 콱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드는 날에도 그 애들이 너무나 슬퍼할까봐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살리려고 하는 것들이 나를 살게다.



여튼 그 딸같은 동생이 결혼을 하겠다며 친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동생, 남친, 나, 내남편 이렇게 넷이서 작고 조용한 횟집엘 갔다. 조그맣고 고소한 문어튀김이 나왔고, 칼칼한 어묵탕도 먹었다. 모듬회를 시켰더니 방어며 돔이며 아귀간도 나왔다. 아귀간에서는 통조림 참치맛이 났다.


웃는 눈을 가진 선한 인상의 남자애가 어쩐지 나는 좀 어려웠다. 나보다는 그 애가 더 불편할 자리였으므로 나는 농담을 좀 더 하려고했지만 잘되지는 않았다.

- 오늘 한 번으로 실망하지 말고, 우리 세 번만 만나자. 세 번 만나고 나면 날 좋아하게 될거야. 두고봐 처형집에 가자고 조르게 될테니까.


결혼식도 신행도 없이 그저 시작한다는 애들이 미더웠다. 하와이에 가지 않아도 함께걷는 집앞 산책로의 밤이 충분히 행복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듯 해서였다.


같이 해먹는 밥, 퇴근 후 마시는 맥주한 잔, 오늘의 진상을 함께 공유하고 같이 욕해주며 잠들게 될 소소한 나날들이 눈에 선했다.


사위같기도 동생같기도 한 제부에게 나는 자꾸만 부탁하고 싶었다. 너도 그 애를 딸같이 여겨주기를. 그래서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은 날에도 그 애를 생각하며 끝끝내 살아내를.



일상은 너무나 거대하고 구조적인 폭력 속에 있지만, 문어튀김을 나눠먹고, 빈 그릇에 국물을 채워주 살다보면 우리는 덜 다칠수 있다.

하찮은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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