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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Sep 16. 2017

늙은 신입생의 설렘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개강일을 앞두고 밤을 빨갛게 새웠다. 오랜만에 양을 세려고 노력하다가 포기했다. 어스름하게 밝아지는 창문을 바라보다 이불을 걷어차고 나왔다. 


'저 유학 가요.' 

캐나다로 오기 전에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말을 꺼내면 다들 반사적으로 물었다. 


'어디로? 미국? 영국? 석사 아니면 박사?' 


당연한 질문을 받고도 나는 숨을 천천히 골라야 했다. 어디서부터 설명하면 좋을까. 앞으로 우리 관계가 어떻게 될지 잠깐 상상하고 이야기의 깊이를 정해야 했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뿐인데 스스로 흔들리는 자신이 바라보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지, 겪어본 사람은 안다. 구구절절 길어지는 설명은 구차한 변명일 뿐 말은 단호하고 짧을수록 좋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학부 수준의 공부를 다시 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이라는 걸 받아들였다. (많이들 그렇겠지만) 19살에 정한 전공의 무게를 4년간 견디고 취업을 하고 남들처럼 살다 보니 대학 공부의 의미는 점점 흐려지고 투자했던 돈과 시간의 흔적만 살며시 남아 있었다. 퇴직할 때까지 4년간 공부했던 전공, 아니면 대학과 전공의 이름값으로 버티며 사는 게 우리 부모님 세대에는 당연했다. 석사나 박사 같은 더 높은 지향점을 두지 않는 이상 다시 공부를 한다는 건 어찌 보면 과거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과 같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 치열한 시간을 건너 첫 등교날 아침 도시락을 싸들고 길을 나섰다. 몇 번을 이미 되짚어 본 길이라 구글맵이 없어도 걸어갈 수 있지만 괜히 급한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10년 전 대학에 갓 입학했던 신입생처럼 가벼운 차림에 배낭을 메고 머리에는 걱정이 가득했지만 마음은 그때와 달리 두근거렸다. 


학교 가는 길


친구는 사귈 수 있을까. 

영어 수업은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나는 잘할 수 있을까. 


소극적인 성격 탓에 친구는 어차피 쉽게 만들지는 못할 것 같고 영어는 일단 해보는 거고 내가 잘할지는 무슨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를 거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그래. 마음아 고맙다. 


띠링. 교수에게 메일이 왔다. 

'오늘 첫날이네, 우리 가볍게 만나서 인터뷰할 거야. Meat locker에서 9시에 만나.'

대체 인터뷰는 뭐고 Meat locker는 어디지, 길을 걸으면서 중얼중얼 영어로 자기소개를 연습했다.

'난 한국에서 왔어. 북한이 왜 그러는지는 나도 모르니 묻지 마. 하하. 앞으로 잘해보자.' 


Meat locker는 1333호 강의실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캠퍼스의 다른 강의실이 아름다운 뷰를 자랑하는 반면 1333호실만 어둡고 습한 구석에 처박혀 있고 에어컨만 쌩쌩 나오는 냉장고 같아서 Meat locker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그냥 디자인 강의실이라고 하면 될 텐데. 괜히 졸았네. 


인터뷰는 2명의 교수를 앞에 두고 10분 만에 끝났다. 그들은 정말 친절하게도 '너는 우리의 첫 번째 국제학생이야.'라고 말하며 나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내가 말할 때마다 얼굴을 가까이 대고 듣는 시늉을 해서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들은 내 포트폴리오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는 칭찬을 남겼지만 전반적으로 좋은 말만 한다는 걸 봤을 때 그게 진심인지는 잘 모르겠다. 


20명 남짓한 학생들의 인터뷰가 끝나고 우리는 Meat locker에 차곡차곡 모여 서로의 초상화를 그렸다. 나는 옆에 앉아있던 Kelvin에게 말을 걸었고 인스타 계정을 물어서 사진을 보며 그의 개와 그의 얼굴을 한가득 그렸다. Kelvin은 친절했지만 내 얼굴 대신 그림자만 비행기에 태워 이상한 섬에 도착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다음 날 예쁘고 친절하고 영어도 잘하는 여학생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로의 괴상한 초상화를 한편에 붙여놓고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둘러서서 '아이엠 그라운드'류의 이름 외우기 게임을 했다. 이름을 쉽게 연상하기 위해 이니셜에 해당하는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음식이나 물건을 같이 말해야 하는 게 규칙이었다. (크리스탈 - 크리스피 칩, 티앤드라 - 티라미슈 같은 식이었다.) 하지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에게는 단어를 하나 더 외우는 셈이라 짜증이 났다. 내 차례가 됐는데 Y로 시작하는 음식이 언뜻 생각나지 않아 머뭇거렸다. 친절한 크리스탈이 Yam이 딱이라고 추천했고 덕분에 모든 사람들이 내 이름을 외웠다. 그래서 난 그 후로 유진 대신 Yam이라고 불리고 있다. (Yam이 고구마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아, 물론 다른 과가 모두 이처럼 특이한 첫 날을 보내지는 않았다. 원래 첫날은 오리엔테이션이 있기 때문에 다 같이 강당에 모여 학교생활에 대해 설명을 듣고 질문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그렇게 첫 날이 지나갔다.


천장의 국기는 장식용이 아니라 진짜 저 많은 국적의 학생들이 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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