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가 기획서를 그대로 믿으면 생기는 문제

디자이너는 기획서를 '시각화' 해서는 안된다.

by Ponyo

처음 외주를 시작했을 때는 운이 좋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초반에 만났던 클라이언트들은 대부분 내 디자인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좋아요.”
“마음에 들어요.”
“이 부분 내용만 조금 추가해 주세요.”

대부분 이런 피드백이었다.


그래서인지 디자인에 대한 자신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열심히 노력한 덕분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내가 꽤 괜찮은 디자이너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으로 예상하지 못한 피드백을 받게 되었다.




클라이언트와의 대화


“기획을 대폭 수정해서 다시 진행하거나, 외주를 철회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충격이었다. 분명 기획서를 꼼꼼히 읽었고, 전달받은 레퍼런스의 느낌도 최대한 살려 디자인했다. 수정 요청도 아니고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다시 하거나 아예 취소할 수도 있다는 말은, 처음으로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나에게 꽤 큰 상처이자 충격이었고, 청천벽력 같은 쇼크였다.

이 말을 듣자마자 심장 뿌리부터 느껴지는 창피함의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매번 디자인을 넘기면 칭찬만 받던 내가, 클라이언트에게 의뢰 거절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니...

너무 자만했던 것이었다.


이대로 프로젝트가 끝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그냥 놓치면, 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도 똑같이 무너질 것 같다.’

그래서 클라이언트에게 조심스럽게 여쭤봤다.

어떤 부분이 문제였는지,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솔직하게 알려주실 수 있는지 장문의 메시지로 회신을 보냈다. 다행히 클라이언트는 피드백을 꽤 상세하게 정리해서 전달해 주었다.



나는 디자인이 아니라 시각화를 한 것뿐이었다.


피드백을 하나씩 읽어 내려가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다. 문제는 디자인 실력 이전에, 내가 일을 하는 방식에 있었다. 나는 그동안 클라이언트가 전달해 준 기획서를 기준으로, 그들이 원하는 방향을 최대한 정확하게 구현하는 데 집중해 왔다. 말하자면 기획서를 기반으로 '디자인'한 것이 아니라 기획서를 '시각화' 한 것에 가까운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에서 클라이언트가 기대했던 것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단순히 기획서를 그대로 구현해 줄 사람이 아니라, 디자이너의 시선으로 더 다양한 가능성을 제안해 줄 사람을 원하고 있었다. 기획을 그대로 시각화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을 통해 더 좋은 방향을 함께 찾아가길 기대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는 접근 방식을 완전히 바꿨다. 기획서에 맞는 디자인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을 기반으로 여러 베리에이션 및 세부 기획까지 함께 고민했다.

기존 디자인을 발전시킨 버전, 전혀 다른 느낌의 디자인, 레퍼런스를 확장한 시안 등 다양한 방향을 만들어 클라이언트에게 제안했다. 단순히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런 디자인이 나왔는지,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함께 설명하며 평소보다 더 과하고 열정적으로 소통했다. 자만했던 나의 창피함을 열정으로 숨기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수정된 배리에이션에 대한 클라이언트의 반응


“이 방향이 훨씬 좋은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 마지막 시안을 보여드렸을 때,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반응을 들을 수 있었다.

기존에 제안했던 디자인에서 훨씬 다양하고 고도화된 디자인들을 제안했다. 클라이언트가 최대한 만족해할 만한 방향을 고민하고 그제야 올바르게 '디자인'하는 일을 했던 것이다.


그 프로젝트 이후로 나는 외주를 진행하는 방식을 바꾸게 되었다.

디자인을 모두 완성하고 나서 처음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작업 중간 단계에서 시안을 공유하고 클라이언트와 방향을 맞추는 과정을 반드시 거친다. 처음과 끝도 중요하지만, 그 사이의 과정에서 얼마나 충분히 소통하느냐에 따라 최종 결과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그 프로젝트는 나에게 꽤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디자인이 처음으로 부정당했던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내가 일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준 경험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처음으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던 것 같다.



나는 단순히 디자인을 ‘만드는 사람’인가,

아니면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디자이너’인가.

그 질문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