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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뭇잎 Aug 17. 2023

나도 한때는 어린이였었다.

어린이라는 세계

 내가 아직 어린이였던 때 내가 다닌 학교는 집에서부터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지금은 지하철역이 생겼는데 두세 정거장쯤 될 것이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 동대문 뒷골목에서부터 동묘공원 앞까지 학교를 오갈 수 있는 여러 길들 중에서 나는 장난감 도매상과 애완동물 가게들이 길게 줄지어 늘어선 청계 7가 고가도로 옆 길을 가장 좋아했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며 각 상점들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서 길거리에까지 수북이 쌓인 수많은 장난감들을 언젠가 전부 가지리라고 다짐하거나 우리에 갇힌 불쌍한 처지의 기상천외한 동물들을 구경하는 것이 학교를 오가는 재미였다. 하굣길에는 친구들과 함께 차도 옆 비좁은 우리에 갇혀 하루 종일 매연을 들이키던 원숭이에게 물 풍선을 줘 터뜨리게 하거나 나뭇가지로 건드려 성질을 돋우는 등의 못된 장난을 치기도 했다. 때때로 어린이는 잔인하다. 원숭이는 내가 얼마나 미웠을까. 아마 우리에서 나온다면 내 머리에 올라타서 얼굴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마구 할퀴고 싶었을 것이다. 한참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싶다. 원숭아. 미안해. 그런데 도대체 거기에 있던 원숭이나 악어나 이름 모를 도마뱀들은 대체 어디로 갈 운명이었던 걸까? 90년대 초반의 우리나라에서 그런 동물들을 대체 어디에 쓴다는 것인가? 내가 보기에 왠지 애완용은 절대 아닌 것 같았다. 아무튼 등교할 때는 보통 장난감 도매상 거리를 지나, 공업소와 철물점들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밥을 먹는 식당들이 늘어선 거리를 지났다. 먼지와 함께 뭉쳐 기계에 덕지덕지 붙은 매캐한 기름 냄새와 고소하게 구워지는 생선 냄새가 뒤섞인 골목을 지나 모퉁이를 돌면 학교 정문 맞은편에 있는 문방구가 보인다. 학교 앞에 문방구는 하나뿐이었다.




 학교 앞의 문방구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문방구 앞 매대는 항상 젊은 형이 지키고 있었다. 스포츠머리를 깎은 그 형의 별명은 '까치'였다. 이름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까치'라니... 마치 예능인이라도 되는 듯 멋진 예명으로 불리며 수많은 장난감과 불량식품을 관장하는 그 형이 초등학생인 우리 눈에 얼마나 위대해 보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문구점을 괜히 기웃거렸고 친근한 척 형을 별명으로 부르며 물건도 사지 않을 거면서 농담을 건네고 쓸데없이 친한 척을 했다. 그토록 대단한 까치형과 시답잖은 대화를 한다는 것이 무언가 특권인 것처럼 느껴져 나는 어깨가 으쓱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까치 형이 무자비하게 우리 동급생 친구를 문구점 안에서 두들겨 패는 모습을 본 이후로 나는 그 형에게 다시는 말을 걸지 않았다. 아니 아예 그 문구점 자체를 가지 않았다. 무서웠다. 친숙하다 생각했던 존재가 공포스럽게 돌변하던 아마도 거의 최초의 기억이었던 것 같다. 아마 얻어맞은 친구는 무언가를 훔치다 들켰을 것이다. 물론 잘못한 일인 것은 맞지만 그래도 성인이 초등학생의 몸이 날아가도록 발길질을 해대야 했을까? 어른이란 무자비했다.




 그런데 나 역시 어른의 발차기에 맞아 날아가 본 적이 있다. 아마 4학년 때였던 것 같다. 나는 반장도 아니고 부반장이었는데 그날따라 반장 녀석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학교에 오지 않았고, 공교롭게도 실과 선생님은 무슨 바쁜 일이 있는지 우리에게 자율 학습을 시켜 놓아 나는 자율적으로 친구들과 교실에서 레슬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놀고 떠들고 있는 것을 선생님께서 어떻게 아셨는지 학급 임원들은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라는 방송이 나왔다. 하지만 왜 그랬을까... 초등학교 4학년이던 나는 미쳤었나 보다. 아니면 세상에 대해서, 어른에 대해서 아직 너무 몰랐거나... 나는 방송을 듣고도 한참 진행 중이던 레슬링을 멈출 수 없었고, 볼 일을 다 마치셨는지 교실로 들어오다가 그런 내 모습을 본 실과 선생님은 슬리퍼를 신은 발로 그대로 내 배를 걷어찼고 나는 뒤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얻어맞은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고 다시 말하지만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나가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갔다고 과장을 하려다 참는다). 그리고 선생님은 곧 뭐라고 크게 소리를 쳤는데 나는 너무 얼떨떨해 그게 무슨 말인지 머릿속으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폭력의 효과란 정말 굉장해서 락 콘서트장 같던, 아니 WWF 경기장 같던 4학년 1반 교실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나는 울지도 않았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방송이 한 번 더 나왔다. 실과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불렀고 나는 밥을 몇 숟가락 먹지도 못한 채 교무실로 불려갔다. 실과 선생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동료 선생님과 웃으며 식사 중이셨다. "나뭇잎아 괜찮니?" "네." "어 그래. 가봐라." 그게 다였다. 씨발놈아. 너는 서른도 넘은 선생이란 작자가 초등학생 배를 발로 걷어차놓고는 밥도 못 먹게 불러서 네가 질 법적 책임이 있나 없나 확인이나 한 거니? 내가 없는 집 자식이라 선생님은 운이 좋은 것이었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가끔씩 우리는 어른들에게 이런 식으러 쥐어 터졌다. 지금 아이들의 위상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들을 당시의 우리들은 많이 당했는데 우리 부모님 세대는 더 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역시 아동 인권이란 날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에 새삼 가슴이 벅차오른다(방정환 선생님. 보고 계십니까...). 나는 학교에서 모르는 아저씨에게 머리통도 손바닥으로 맞은 적이 있다. 그날도 나는 뭔 빌어먹을 학급 임원이었기 때문에 초등학교 정문에서 바리케이드를 앞에 두고 학생들이 등교하는 시간에 차량이 통행하지 못하도록 막는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모님을 태운 검은색 세단이 오더니 바리케이드를 열라고 빵빵대며 크락션을 울려대는 것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무리 가진 것 없어도 말을 똑 부러지게 하는 아이였다 보니 '지금 이러이러한 사정으로 통행할 수 없으니 돌아가시라'라는 말을 우리들(4명 정도가 한 조였던 걸로 기억한다)에게 바리케이드를 치워줄 것을 촉구하러 나온 운전기사에게 하였다. 하지만 무례한 운전기사는 포기하지 않았고 그렇게 몇 차례 실랑이가 오고 갔음에도 일에 차도가 없자 이 아저씨가 참지 못하고 내 머리를 한대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너 이분이 누군지 알고 그래?" 초등학생과의 말싸움으로 인한 답답함 끝에 터져 나온 분노의 단말마이겠지만 그래도 사건의 당사자로서 이 사건에 대한 나의 견해를 늦게나마 담담히 밝히자면, 미친놈아 내가 너 따위 놈들을 알바가 뭐야. 나이 처먹고도 애들 앞에서 체면도 못 지키는 한심한 퇴물 아줌마랑 그 집에서 빌어먹는 종놈이겠지! 여기는 초등학교 정문이고 우리 구역이야!라고 당시에도 소리쳤지만 그건 내 마음속에서였을 뿐이고 겉으로는 아무리 참으려 해도 눈물이 꾸역 꾸역 흘러나왔다. 내가 눈물까지 보이자 당황했는지 놈들은 그대로 물러갔다. 놈들이 사라지자 불시의 폭력사태에 얼어있던 친구들이 다가와 위로해 주었다. "아팠어?" "야. 아파서 울겠냐. 억울해서 울지." 그래. 역시 친구들 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때도 선생이란 작자들은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아아. 정말 눈물이 나는구나. 하지만 이때 말고도 학교에서 눈물이 났던 적은 한 번이 더 있었다. 다름 아닌 점심을 혼자 굶은 날이었다. 이제 써놓고 보니 모든 비극은 학급 임원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을 보니 학급 임원이었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던 것도 같다(나는 임원을 뽑지 않는 1학년 때를 제외하고는 졸업할 때까지 매년 임원이 되었다). 당시 우리 학교는 급식을 막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초기이다 보니 따로 식당 건물이 없었다.  그래서 4교시가 끝나기 전에 지정된 인원이 급식실에 가서 큰 통에 점심 식사를 받아다가 교실 앞 복도에서 배급을 해 주고, 학급 인원들은 줄을 서서 배식을 받아 자기 자리에서 식사를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어린아이들이다 보니 갖은 장난을 치느라 급식 배급이 원활하지 못할 때가 있었고 이에 우리 반의 지도자이신 H 선생님께서는 반장/부반장이 돌아가며 앞/뒷문에 서서(앞문으로 나가서 음식을 받아서 뒷문으로 들어온다) 급식 인원들을 통제하라는 지시를 내리신 것이었다. 긴급 행정명령이 발동되고 며칠 후 드디어 비극이 발생하고 말았다. 부반장이었던 나는 뒷문 통제를 맡고 있었는데, 무사히 모든 인원들에게 식사가 배급되고, 드디어 임무(라고 해봤자 그냥 뒷문에 서서 쳐다보는 게 다였음)를 마친 내가 식판을 들고 배식 줄 맨 뒤에 서자 감쪽같이 모든 보급이 바닥나고 만 것이다. 그날의 배급은 앞문을 담당했던 반장에게 까지만 돌아갔고 나는 빈 식판을 들고 자리로 가 앉을 수밖에 없었다. 큰일이 났다. 대체 이 사실을 어떻게 선생님께 알려야 할까... 황당하게도 나는 왠지 나만 밥이 없다는 사실이 창피했다. 그래도 전능하신 선생님이라면 이 사태를 지혜롭게 수습하실 수 있을 거야... 맞아. 그럴 것이 분명해... 나는 용기를 냈다. "선생님... 저 밥이 없어요." 나는 말했고 드디어 밝혀지고 말았다. 나만 밥이 없다는 사실이... 나는 초조하게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조금 놀란 듯 잠깐의 뜸을 들인 젊고 창백한 여자 선생님의 답변은 기대 밖이었다. 심지어 자못 잔인하기까지 했다. "어... 그렇구나. 그럼 내일부터는 반장, 부반장이 먼저 밥을 타도록 하자. 알았지?" 이것이 선생님의 대답 전부였다. 나는 다들 식사를 하고 있는 그 교실에 나만 밥이 없는 채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아마 어떤 친구들이 밥을 같이 먹자고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창피했다. 무엇보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교실을 나와 반대쪽으로 학교 건물 맨 끝까지 갔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 1층 현관 앞에 섰다. 이곳이 학교의 가장 후미진 곳이었다. 그곳에 도착해 서 있자니 눈물이 아래 눈꺼풀을 억지로 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참아봐도 소용없었다. 사실 나는 내가 우는 모습을 누군가가 볼까 봐 여기까지 도망친 것이었다.  혼자만 밥을 먹지 못했다는 사실도 창피한데 그 때문에 눈물까지 난다는 것은 더욱더 참을 수 없이 창피했다. 너무 창피해서 부모님께조차 말할 수 없었다.




 요즘에는 청소년 유해업소들이 학교 근처 몇백 미터 안에서는 영업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데 그 유해업종 중에 혹시 보신탕집이나 고물상도 있나 모르겠다. 왜 보신탕집과 고물상이냐 하면, 저 유서 깊은 청계천에는 철물점과 고물상들이 참 많기도 많아서 학교 옆으로도 아예 학교 담벼락을 따라서 쭉 고물들과 폐 자원들이 늘어놓아져 있는데, 거기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은 보신탕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예 그 자리에서 개를 몽둥이로 두들겨서 잡는 모습이나 개를 매달아놓고 토치로 그을리는 모습들이 여러 차례 여과 없이 우리 숭신 초등학교 학생들의 등하교 시간에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살육의 현장. 유치원을 갖 졸업한 아이들에게 보여지는 이런 장면이란 평생 동안 도무지 잊혀질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며칠이나 악몽까지 꾸었다. 마구 몸부림치며 움직이는 자루를 서너 명의 불콰한 인상의 아저씨들이 쇠 파이프로 두들길 때마다 맞은 자리에서 피가 배어 나오며 개 멱따는 비명이 울려 퍼지는 초등학교 정문 옆 담벼락이라는 것을 요즘은 누군들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그 담벼락 맞은편에는 분식집이 있었다. 맞은편이래 봤자 폭은 2차선 도로 정도밖에 안되는데 거기에서 아이들이 먹을 떡꼬치에 빨간 양념이 발라지는 동안에 반대편 담벼락 아래서는 처절한 비명과 함께 사방으로 발버둥 치는 자루에서 새빨간 피가 잔인스럽게 배어 나오는 것이다. 완벽하게 결박되어 어디로도 피하지 못하는 죽음의 매질. 그 처절하고도 끔찍한 비명과 몸부림. 자루 속으로부터 전해지는 절망과 고통과 공포에 얼어붙어 떡꼬치를 문 우리의 입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대로 굳어버린 나의 손등 위로 새빨간 떡꼬치 소스가 흘러내릴 때 나는 내가 이 살육 현장의 가담자라도 된 양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나는 지금도 개 식용에 반대한다. 여태껏 보아도 개 식용을 하는 인간들은 대개 주위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미개한 방법을 사용하는 작자들이기 일쑤다. 그들이 고작 개의 고기를 먹겠다는 이유로 범죄까지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자면 나는 개를 패 죽이고 토치로 그을린 후 먹는 그들의 일련의 행위가(또한 그러한 잔인성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어떠한 주술적 목적을 완수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어린이의 입장에서 이런 야만적인 어른들도 싫지만 또 다른 진짜 싫은 종류의 어른들은 아이들이 노는데 와서 재미 삼아 끼어들어 방해하는 철없는 인간들이다. 이 인간들의 한심함이란 정말이지 지겨워서 죽고 싶어질 지경인데 지금 생각해도 1980~90년대의 서울시 종로구에 대체 왜 이렇게 형편없는 인간들이 많았는지 모르겠다. 보통 야구를 할 때 이런 똥파리들이 가장 많이 꼬였던 것 같다. 우리는 평일이건 주말이건 몰려다니며 야구를 했다. 골목에서, 주차장에서, 학교 운동장에서, 동묘공원에서, 도서관 운동장에서. 하여튼 조금이라도 공터가 있다면 친구를 모아 온종일 야구를 하고 다녔다. 그러다 보면 꼭 지나가다가 한 번만 쳐 보겠다는 인간들이 나타난다. 그러면 당연히 우리는 싫다고 그냥 가시라고 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어떤 인간들을 어깃장을 놓고 화난 척을 해 협박을 하거나, 또 어떤 인간들은 가던 길 가지도 않고 끈질기게 질척대며 '한 번만. 한 번만 쳐 볼게.'라는 말을 반복하며 초등학생이 들고 있는 야구 방망이를 잡고 매달린다. 상상이나 가는가? 다 큰 어른이 초등학생들 야구 경기하는데 끼어들어 한 번만 쳐 보자며 방망이를 붙잡고 늘어지거나 화를 내는 모습이? 그런데 이런 일이 정말 지겹도록 많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공을 던져주면 어떤 때는 그 머저리들이 친 공이 이상한 곳으로 날아가 다시 찾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주차장이라면 주로 건물과 건물 틈새로, 골목이라면 지붕 위로 많이 올라간다. 그렇게 되면 이 머저리들이 어떻게 하느냐! 이때야말로 그냥 쿨하게 가던 길로 가버린다. 공 사놓으라고 원성을 내는 초등학생들을 뒤로하고 말이다. 말 그대로 생 양아치들이지. 어른들. 이것이 어른이라니... 말도 안 돼... 우리가 커서 정말 어른이 된단 말이야? 당시 우리는 어렸고 다들 찢어지게 가난한 동네에 살았다. 야구할 때 쓰는 테니스공 하나하나가 우리에겐 보석과도 같았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나 좀 제외하고 나면 어린이였던 시절은 아마도 다들 비슷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놀 때는 즐겁고, 숙제는 하기 싫으며,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관심받고 싶고, 무언가를 뽐내고는 싶지만 좋아하는 아이 앞에서는 벙어리가 되던... 뒷골목의 깡패 형들이 무섭고, 화난 어른들이 무섭던, 보호와 관심이 필요한 작은 존재들. 그래도 우리 어릴 적에는 놀 친구들이 많았다. 학교에 가서도, 학원에 가서도, 친구들과 놀았다. 집에 오면 동네 골목엔 아이들이 가득했다. 놀 거리는 어디에나 널려 있었다.




 조금만 생각을 해 보아도 세상에 산타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무리 어리더라도 알 것은 알아야지. 산타는 부잣집 아이들이 선물을 받기 위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임이 분명했다. 프로야구 어린이 회원이 되어 야구단 모자를 쓰고 가방을 매는 아이들은 부러웠다. 보이 스카웃은 전혀 부럽지 않았다. 유난스런 도련님들이나 하는 이상한 모임 같았다(유니폼도 이상했다). 소매에 시보리가 잡힌 점퍼를 입는 것은 싫었다. 왠지 창피했다. 다른 이유는 없이 단지 메이커가 아니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속이 시커먼 어린이였던 것 같다. 조숙한 척을 했다. 가요보다는 팝을 들었고 괜스레 종로 극장가 앞이나 혜화동을 서성이며 팜플렛을 모았다. 어려운 책들을 읽고 아는 척을 했고 그래서 선생님들의 관심도 많이 받았다. 관심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어린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안정이었다. 안심하고 쉴 수 있는 집과, 함께 있으면 편안한 부모님이 있는 화목한 가정의 아이들이 가장 부러웠다. 엄마가 미싱 공장으로 일을 나가시면서 천 원, 이천 원을 주시면 그 돈으로 오후에 동생과 간식을 사 먹었다. 동대문 뒷골목의 만둣집에서 만두를 사거나 이스턴 호텔로 가는 큰 길 초입에 있는 리어카에서 튀겨 파는 도너츠를 자주 사 먹었다(겉바속쫄(깃)의 정석인 이 도너츠는 지금도 가끔 먹고 싶다). 이윽고 아이들로 시끄럽던 골목이 조용해지는 저녁때가 되면 동생과 나는 각각 분홍, 파랑 내복을 입고 우리 네 식구가 살던 창신동의 작은 단칸방을 기어다니며 청소하고 엄마, 아빠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족이 모두 모이는 저녁이 꼭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온 아빠가 엄마와 소리를 지르고 몸싸움을 할 때면 나와 동생은 자다 일어나 구석에 앉아 서로 기대 떨어야 했다. 내복을 입은 어린 두 남매는 영문도 모른채 구석에 웅크리고 떨며 술 취한 아빠가 사들고 온 반쯤 녹아 죽이 되어버린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눈물과 함께 입에 퍼 넣었다. 좁은 단칸방이라 피할 데도 없었다. 무서웠다. 단 아이스크림을 뜬 숟가락을 입에 넣을 때마다 짠 눈물의 맛이 났다. 웅크리고 앉아 올려다 본 부모님은 거인처럼 커 보였고, 세상을 전부 부숴버릴 듯 소리치고 싸우는 순간만큼은 부모님의 세상에 우리는 없는 것 같았다. 매일이 그랬다. 작은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한살이라도 더 자란 나보다 당연히 모든 것이 더 힘들고 무서웠을 어린 시절의 동생을 더 잘 돌봐줄 걸 그랬다는 생각이 아직도 가끔 든다. 무서워 떨던 작은 나와 내 동생을 안아주고 싶다. 작았던 우리에겐 도움이 필요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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