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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들 Dec 28. 2020

코로나 시대를 위한 하이퍼 리얼리즘, <남극의 쉐프>

어쩌면 10년 전에 이미 집콕으로 인한 분열 사태를 예견했을 지도

*아래 글은 1인칭 시점으로 쓰인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혹시나 너무 내 이야기 같아서 마음 한 켠이 쿡 찔리더라도 당신의 이야기는 아니니 걱정 내려놓으시길!




   벌써 집에 틀어박힌 지 한 달이 넘었다.

   한 달, 고작 한 달이라고? 그 정도는 코로나 사태가 아니더라도 방학 때면 늘상 있어왔던 일 아니야?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사실이니까. 오죽하면 주변에서 나를 일컫는 별명이 ‘모태 집순이’일까. 하지만 일침을 가하는 사람들이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다. 


   <모든 일에 자의가 결여되면 그것은 머지않아 고통으로 다가온다.>


   “언니, 오늘 장 볼 거야?”


   “어. 밤 12시 전까지만 주문하면 되니까 아직 시간 조금 있어. 먹고 싶은 거 생각해봤어?”


   “잘 모르겠어. 이제는 뭐가 먹고 싶은 지도 모르겠어. 밀키트도 매번 거기서 거기잖아. 언니는 뭐 생각해본 거 있어?”


   “나도 잘 모르겠어. 야, 근데 생각해보니까 맨날 나한테만 떠맡기지 말고 너도 생각을 좀 해봐. 요리도 매번 내가 거의 다 하는데 메뉴까지 내가 생각해야 되냐?”


   “아니, 또 왜 불똥이 이런 식으로 튀어? 그냥 아무거나 먹어, 아무거나.”


   “너 맨날 아무거나 다 괜찮다고 하고는 막상 만들어 놓으면 이건 그저께도 먹었네, 이건 맛이 별로네, 이러면서 불평만 늘어놓잖아. 너 그럴 때마다 요리할 맛도 안 나고 짜증나, 진짜.”


   “그야 언니가 나보다 요리 잘 하니까 그런 거지. 내가 만들면 맛없다고 더 짜증내는 사람이 누군데. 그리고 설거지랑 쓰레기 버리는 건 내가 하잖아.”


   “야, 설거지도 제대로 해놓기나 하면 몰라. 설거지 했다면서 기름기 때문에 그릇 미끌거리고 밥그릇에 밥풀은 그대로 굳어 있고. 쓰레기도 내가 정리해서 묶어주는 거 너는 그대로 들고 나가서 버리기만 하면 되잖아. 그마저도 차일피일 미뤄서 음식물 쓰레기 냄새 나서 내가 버리고 온 것도 한 두 번이 아니고. 이래도 네가 할 말 있냐?”


   “아, 몰라 몰라. 나 신경 쓰지 말고 언니나 잘해. 각자 해, 각자! 그럼 되겠네.”  


   “야 너 미쳤냐? 안 나와? 불리하면 또 문 닫고 들어가지?”



   언니의 악다구니를 뒤로 하고 방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아버렸다. 보란 듯이, 들으란 듯이. 나도 짜증이 나지만 언니도 꽤나 열이 받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장기간 집에만 있다 보니 안 그래도 부딪힐 일 많았던 우리 자매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사건건 서로에게 트집 아닌 생트집을 잡고 있다. 


   언니는 직장에서의 재택 근무 권유로 집에 있는 시간이 늘었고, 아직 학생인 나는 그동안은 비대면 수업으로, 이제는 방학 기간이 되어 바깥 출입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출처: Unsplash.com)


   아, 집순이 생활이 이렇게나 고되고 괴로운 일이었나. 새삼 스스로의 모습에 처량해지고 우울감이 단전에서부터 머리 끝까지 뻗친다. 작년만 해도 지금 이 시기라면 한 학기 동안 고생한 날 위해 여행이라도 떠났을 텐데, 지금은 사진첩만 뒤지면서 방구석 추억 여행이나 하고 있다.


   카페는 포장과 배달만 가능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 건 마음이 불안해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 배달 음식도 하루 이틀이지 1년 가까이 지속되는 코로나 사태 때문에 이제는 신물이 난다. 돈도 아낄 겸 함께 자취하는 친언니와 인터넷으로 장을 보고 집에서 직접 요리를 해먹기로 했다. 


   처음에는 별 문제 없었다. 요즘에는 밀키트가 잘 나와서 식당에서처럼 번듯하게 해먹을 수도 있고 뒤처리도 쉽다. 여러 종류의 밀키트를 하나씩 섭렵한 후에는 이마저도 지겨워져 유튜브에서 각종 요리 유튜버들의 레시피를 찾아 이렇게 저렇게 해먹어보곤 했다. 물론 맛은 그들의 것과 다소 달랐겠지만, 나름대로 해먹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니 집에서 해먹기 어렵고, 배달도 어려운 음식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비단 먹는 문제 뿐만 아니라 카페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누리던 여유도, 친구들과 만나 수다 떨며 맛집 탐방하고, 엄마 아빠와 가족여행을 떠나던 그 평범한 시간들이 그리워졌다. 그리움으로 시작한 감정은 어느새 한탄, 짜증, 불만 등으로 번져갔다. 그리고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은 어느새 내가 아닌 타인을 향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혼자 살았다면 그저 말 못할 우울감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에게로 화살을 돌린 감정은 둘 이상의 사람을 괴롭게 했다.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우린 20년 이상 함께 산 자매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행동에서 트집거리를 잡아내기 시작했다.



   양말은 벗으면 바로 빨래바구니에 넣으면 안돼?

   먹은 그릇은 제때 좀 치우지?

   티비만 보면서 그저 늘어져 있지 말고 창문 열고 환기 시키면서 청소 좀 해. 아니면 수건이라도 좀 개키던지.

   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냐?

   야, 나 화상회의 할 때는 조용히 하라고 했지? 네가 얼마나 시끄러우면 집에서 개 키우냐고 하더라.

   화장실 청소 저번 주에 내가 했으니까 이번 주에는 언니가 해라.

   머리 감으면 머리카락 바로 바로 치우라고! 한 번만 더 안 치우면 머리카락 밀어버린다, 아주!



   서로를 향해 뾰족한 말들을 서슴없이 던졌고 한껏 예민해진 상태에서 상대를 향해 던져진 발언은 점점 수위를 높여갔다. 그렇게 며칠 동안 밥도 따로 먹고 한 집에 살면서도 각자 방문을 닫고 들어가 없는 사람처럼 취급을 했다. 


   컵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는 일이 잦아졌고 냉동 생지를 에어프라이어에 돌린 후 입에 물고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마음에 안 드는 것 많고 짜증나게 하는 존재인 언니였지만, 바깥에 나가지도 못하면서 그나마 집에 있는 사람과도 말을 하지 않고 지내니 심리적 고립감이 점차 커졌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언니에게 내가 먼저 화해를 청하고 싶지는 않았다. 언니는 자존심이 굉장히 세서 싸우면 매번 내가 먼저 애교를 부리면서 다가가야 풀어지곤 했다. 그러니 이번 만큼은 잘못한 게 없는 나도 먼저 다가가진 않겠다, 다짐했다.






   식빵에 땅콩버터잼을 발라서 우유 한 잔을 들고 방으로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았다. 아이패드를 열어 넷플릭스를 터치했고, 뭘 볼까 하다가 오늘 업로드 되었다고 알림이 뜬 <남극의 쉐프>라는 영화가 흥미로워 보여서 재생했다.


   의도치 않은 선택이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10년 전에 이 영화 만들었다는 사람, 사실 미래에서 온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아니면 직접 이런 일을 겪어봤거나. 그렇지 않고서야 좁은 공간에 고립되어 꼭 맞지 않는 사람들끼리 투닥거리면서 사는 요즘의 모습을 이렇게 실감나게 그려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싫어도 미워도, 짜증나고 꼴보기 싫어도, 한 공간 안에 사는 이들은 매일 같은 시간에 식탁에 모여 서로를 바라보며 식사를 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남극의 쉐프> 스틸컷)


   마음에 안 들어도 한 공간에 함께 해야 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 항상 내 옆에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맞지 않는 사람과 생활하다 보면 사사건건 마음에 안 들게 행동하고, 또 나를 짜증나게 하는 일을 자처하는 게 눈에 보이기도 한다. 그럴 때면 곧바로 지적하고 싶다가도 몇 번은 참고 넘어간다. 하지만 이내 참을 수 있는 한계점을 넘으면, 그때부터는 나도 모르는 내가 툭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그 사람과 다투면 드디어 퍼부었다는 생각에 속이 시원하다가도 내일부터는 또 어떻게 얼굴을 봐야 하나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같은 공간 안에 계속해서 거주해야 한다면 무엇이 계기가 되었든 화해는 하게 된다. 죽도록 미워도, 죽기보다 싫어도, 꼬집어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워도 결국 ‘동료니까’, ‘친구니까’, ‘가족이니까’.


영화 <남극의 쉐프> 속 자가제면 라멘과 새우 튀김 모양으로 만든 랍스터 요리. 보기만 해도 눈이 휘둥그레, 침이 꼴깍 넘어간다.  (출처: 네이버 영화 <남극의 쉐프> 스틸컷)


   <남극의 쉐프>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상 관측, 통신, 연구 등 각자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남극 기지에서 1년 동안 함께 하게 된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을 담고 있다. 좁은 기지에 고립되어 매일 같은 얼굴만 보며 살아가고, 물자조차 한 사람이 1년 동안 소비할 것으로 <예상>되는 양을 365로 나눈 양만을 매일 사용하며 살아가는 삶은 마치 코로나 사태에 어디도 갈 수 없어 집에 고립되어 인터넷 쇼핑만 하고 있는 우리네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게 느껴진다.


   평소였다면 전혀 문제되지 않을 것들이, 좁은 공간에서 자꾸 시선이 마주치고 몸이 맞부딪히면서 예민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 누구도 나쁜 사람은 없다. 그저 좋지 못한 <상황>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모두 선의의 피해자일 뿐이다.






   빵과 우유는 진작 다 먹어버린 지 오래다. 2시간 동안 화면 안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다 보니 창 밖은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다. 겨울이라 그런지 아직 5시일 뿐인데 해가 빨리 진다.


   분명 방문을 꾹 닫아두었는데 기름진 냄새가 코를 찌른다. 언니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궁금하기도 하고 오늘 먹은 게 빵 밖에 없어 슬슬 배가 고파져 슬며시 문을 열었다.


   “야, 너 문 열고 몰래 보고 있는 거 다 알거든? 김치전 먹을 건데 너도 먹을 거지?”


   싸우고도 평생 먼저 손 내민 적 없는 언니가 드디어 처음으로 자신만의 화해 방법을 찾은 것 같다.


   “나 김치 많이 넣어줘.”


   “알겠어. 식탁 닦고 젓가락이나 둬.”


   감동 폭발하고 눈물 펑펑, 가슴 찡한 그런 전개는 아니지만, 이게 바로 현실 자매의 쿨한 화해 방법이다. 오글거리는 걸 못 참는 우리 자매에게는 이렇게 미적지근한 온도가 딱이다.


   비록 영화에서처럼 성대한 랍스터 요리, 직화로 구운 통구이, 초코펜으로 글씨를 써서 올린 케이크, 직접 반죽해 뽑은 면으로 만든 수제 라면은 아니지만, 소박한 김치전이면 됐다. 이거면 됐다.


(출처: 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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