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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두렵지만, 언젠가는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요

- 김한민 <<아무튼, 비건>>을 읽는 밤

by 목요일그녀

설 연휴 1박 2일 동안 삼시 세끼 고기를 먹고 나는 지금 부른 배를 둥둥 두드리며 이 글을 쓴다.

아침엔 시어른들과 함께 앉아 MBC에서 방송된 '휴머니멀'을 보면서 LA갈비를 구웠다.


그러니까 나는, 이 책에 대해 아주 조금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머, 어머, 이런' 하면서 포스트잇을 잔뜩 붙여 둔 책장 사이사이를 다시 넘기면서 '내가 적는 어떤 문장도 솔직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의심할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기어이 『아무튼, 비건』에 대해 적고 말겠다.


참으로 사람다운 삶은
사람답게 하는 삶은
타자에 눈뜨고 거듭 깨어나는 삶이다
- 책 속에 인용된 글, 철학자 레비나스의 말 p7


요즘 나는 '사회학'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 때문이었다.

'타인, 타자와의 관계' 맺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학문이라는 것.


상호 행위를 상세하게 검토함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그 무언가'를 밝힌다는 것은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또는 이해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배후에 있기 때문일까요? 확실히 타인을 이해하려는 생각은 있겠지요. 하지만 타인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언제 어디서나 필요할까요? 그것은 과연 행복한 일일까요? 오히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같은 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서로가 그 거리에 익숙해지는 관계성을 조용하고 은밀하게, 냉철한 시선으로 꿰뚫어 보는 행위가 더 사회학적이지 않을까요?
-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것 : 관계성> 중에서, p29

최근에 읽었던 『일상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책 속에서 만난 이 문장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아무튼, 비건』을 읽으면서 이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나를 비롯한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비건'에 대해 잘 몰라서 어쩌면 알고 싶지 않아서 가지게 된 오해와 편견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

위의 문장은 사람과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비건이 아닌 사람과 비건인 사람으로 바꿔 읽어봐도 어쩐지 어울린다는 생각.



이 나라에서 나의 위치란 참 묘하다. 한국인은 어지간히도 남 눈치를 보고 남 신경을 쓴다. 그렇다고 남을 배려하는 사회냐 하면 그건 아니다. 여기에 뜻이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남이 존재한다. 전자의 남은 필요 이상으로 눈치도 보고 신경도 쓰고 과도하리만치 배려하는 존재다. 후자의 남은 마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며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다. 전자의 남은 '우리' 속에 포함된 남으로, "우리가 남이가"라고 말할 때의 우리, 즉 가족, 친구, 회사 사람 등 어떤 방식으로든 이해관계의 사슬 안에 포함되는 남이다. 후자의 남은 테두리 밖에 남겨진 남이다. 길거리의 행인, (주로 저개발국가 출신) 외국인 등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무리다. 전자의 남에게 오버해서 친절한 만큼, 후자의 남은 무례하게 하대한다.
어느 인류학자는 서양인은 목적 지향적이고 동양인은 관계 지향적이라고 했는데, 나는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현대 한국인은 '이해관계 지향적'이라고. 잘해줘 봤자 즉각적인 이득이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는 남은 무성의하게 대해도 되는 분위기다. 과거에 우리가 얼마나 인심이 좋았든 이것이 현재 우리의 자화상이며, 우리 사회가 이민자, 난민, 성소수자 등 소수자나 약자를 바라보는 평균적인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형편이 이러하니 동물 '따위'야 남 중에서도 가장 뒷전으로 밀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타자나 소수자 문제에 관해 제법 진보적인 견해를 가졌다는 이들도 동물 문제에는 무심하다. 동물은 심지어 남으로 치지도 않는다. 물건이나 고기일 뿐이다. 가장 타자화된 타자, 남 중의 남. 그래서인지 나는 수많은 타자 가운데서도 동물에 가장 마음이 간다.
- <가장 남 취급당하는 남> p12




나의 무지함을 덧붙여 고백하자면, 나는 이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동물'에 관해서 말이다. '심지어 남으로 치지도 않는다'가 아니라 동물에게 '남'이라는 말을 붙여 무언가를 생각해 볼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은 쪽에 가까웠다.


그러니 내게 비건은 그냥 고기를 안 먹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러니 그 누군가가 고기를 먹든 안 먹든, 별 관심도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았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비건이란

단순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비건은 동물로 만든 제품의 소비를 거부하는 사람이자 소비자운동이다. p15


'소비자운동'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었던 건 내가 적어도 이 책을 통해 이해하게 된 것, 알게 된 것, 나의 무지함을 앞으로는 아주 조금은 감출 수도 있겠다는 어떤 작은 '의식' 같은 게 생겼다는 의미다.

아니, 이미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나와 상관없으니 그냥 모르는 걸로 쳐 버리고 말았겠지.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비건이며, 왜 비건이 되었는지, 지금 우리가 '동물'을 '남 보다 못한 남'으로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자신의 생각, 비건에 대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혹시 모를 오해나 편견, 앞으로 비건이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도움이 될만한 팁 등에 관해 굉장히(주관적인 느낌으로) 거칠지만 정확하게,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오히려 그래서 좋았다.

나는 비건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어쩌면 비건이 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어쩌면 영영 그러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처음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처럼 호기심을, 궁금증을, 어떤 바람 같은 것을 갖게 만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치아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페미니즘에 대해 정의 한 문장


'나는 페미니스트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맞아, 오늘날의 젠더에는 문제가 있어, 우리는 그 문제를 바로잡아야 해, 우리는 더 잘해야 해, 하고 말하는 사람이라고요, 여자든 남자든, 우리는 모두 지금보다 더 잘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p51-52


에서 '우리는 더 잘해야 해, 하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했던 것처럼 어쩌면 비건 역시 '오늘날의 시각은 문제가 있어. 우리는 그걸 바로잡아야 해. 우리는 더 잘해야 해 하고 말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게 했다.


"Are you connected, too?"
비건의 핵심은 거부가 아니라 연결에 있다. 비건이 되는 것은 산업과, 국가와, 영혼 없는 전문가들이 단절시킨 풍부한 관계성을, 어린아이였을 때 누구나 갖고 있던 직관적 연결고리를, 시민들이 스스로 깨침과 힘으로 회복하는 하나의 사회 운동이다.
- <당신도 연결되었나요? 중에서, p16


'연결된다는 것'


지금의 우리는 타인과의 연결을 애써 끊으려고 노력하며 산다. 혼자 임을 즐기고 타인의 관심으로부터 무관심해지는 일이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 여기며 산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SNS 등을 통해 일상을 공유하고, 타인의 글에 좋아요를 누른다.


나는 종종 '연결'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데 그러면서도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나'를 또한 두려워하는 이중 감정에 사로잡히곤 한다. 나에게 '연결'이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다.


"넌 한국 사람들이 뭘 믿는다고 생각해?"
미처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에 머뭇거리는데, 친구는 이미 멋진 답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우리가 믿는 건 신도 아니고, 국가도 아니고, 가족, 친구, 학벌, 돈, 부동산, 성공도 아냐. 이 모든 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건 '세상은 안 변한다는 믿음이야. 어차피 나 혼자 애쓴다고 변하는 건 없으니 남들 따라 편하게 적당히 즐기다 가자는 주의, 복잡하고 골치 아픈 사회문제는 나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최대한 외면하는 태도, 뭔가 바꿔보려는 사람에게 '네가 얼마나 잘났길래'라며 멸시하는 반응, 모두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이 믿음에 기반하는 거야......"
- <우리 모두의 종교> 중에서, p40


참 무서운 말인데, 한편으로 적절하게 공감되는 말이어서 조금 슬퍼졌다.


자신을 규정짓는 것에 연연할 필요는 없지만, 규정을 모두 벗어던지는 방식이야말로 가장 쉬운 길이다. 좋게 보면 자유롭고 유연해 보일지 몰라도, 흔해빠진 무원칙의 편의주의이기도 하다. 나는 나름의 절도가 있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 최소한으로 지키고자 하는 선이 있어야 때로는 나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쩌면 모든 윤리는 최소한의 윤리이다. 다시 말해 "적어도 ~는 하지 않겠어"라는 자세이다. 그 최소한이 점점 커지는 방향으로 살고 싶다. 그렇다고 비건이 나의 모든 생활을 잠식하는 강령이 되도록 살 생각은 없다. (중략)
요는 최선을 다하는 것. 나보다 철저하게 사는 사람을 존중하고 나의 융통성을 미화하지 않되, 타협을 할 때 억지로 합리화하거나 찜찜함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이다.
- <굳이 비건이라는 말을 고집하는 이유> 중에서, p51


우리에겐 남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자칫 각박한 수전노들의 나라로 전락할지도 모르고, 결코 행복해질 수도 없으며 다가오는 아니 이미 직면한 생태 위기를 극복할 방법도 없다. 우리는 과학적 발견을 토대로 동물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윤리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은 동물, 자연, 외국인, 소수자... 나와 다른 타자를 배제하는 대신 최대한 아우르는 '새로운 우리'를 발명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발명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일상의 실천에서 시작된다.
- <새로운 우리의 발명> 중에서, p73


저자는 비건을 선택한 일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심'이라고 적었다. 비건이 되어서 '행복하다'라는 말까지 할 수 있다고. '그 행복은 신체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진실을 보고 깨닫고, 내가 추구하는 가치들과 나의 일상이 일치되어 거슬림 없이 살 수 있다는 것, 하루 세 끼에 대한 죄의식이나 찜찜함이 없다는 것, 최소한 의식적/직접적으로는 타자의 고통에 기여하고 있지 않음을 아는 것, 음식에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알게 된 것. 이것들이 주는 매일의 보람과 기쁨, 깨끗한 느낌은 결코 작지 않다. p59'라고.



그러면서 묻는다. "이렇게 장점이 많은 것을 대체 왜 안 하시느냐고."


대체로 시시한 대답밖에 듣지 못했다고 했지만 나는 그 질문에, 시시한 대답조차 지금은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제야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아직 알 수가 없다.

어떤 대답도 정답이 아니고, 어떤 대답이라도 정답일 것이다.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읽었지만 결국 외면하고 만 문장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안다.

내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걸.

그렇지만 또 안다.

아마 한동안 계속 생각하게 될 것 같다는 것.

책의 마지막에 저자가 수록해 놓은 비건과 관련된 여러 정보들을 슬쩍슬쩍 찾아보면서 얼마만큼은 흉내라고 내고 싶어 졌다는 걸.



일하는 직장에 그리 친하지는 않지만 '비건'인 동료가 있다.

다른 이들에게 건너들은 정보로는 그래서 회식에 참여하는 걸 몹시 불편해한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렇구나'하는 정도.

그 이야기를 전하는 동료들은 말했다.

'뭐까지 안 먹는 거지?" "우유도 안 먹나? 생선도?" "같이 밥 먹으러 가면 밥집 찾는 게 쉽지 않아"


현재 나의 의식은 딱 거기까지 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이 책을 읽은 뒤 이슬아 작가는 비건이 되었고, 저자의 강연에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다녀온 뒤로 어머니 역시 비건이 되었다고 했다.


이 책을 읽은 뒤 나는 조금 두려워졌다.

변하지 않을까 봐. 변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변하지 않는 나를 이상하게 여기게 될까 봐.


지금 나의 바람은,

어떤 쪽이든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싶다는 것이다.

'남'을 의식하거나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 스스로 확신이 들 때까지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다는 것.

다만, 그 '남'을 존중하고 이해하고 더 이상 그들에게 '비건'이 된 이유를 묻거나, 그들의 생활이 참 힘들겠구나 지레짐작하지 말자는 것.


이야기는 간단하다. 나는 어느 날 무언가를 보았고, 알게 되었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변화를 시도했다. 시도의 결과는 좋았고, 시간이 갈수록 더 좋았고, 그러다 보니 이제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 졌다. 이게 다다.
- <세븐> 중에서,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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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비건>> / 김한민 / 위고 / 2018.11.25.





















그냥 존재함의 차원에 만족하는 조용한 삶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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