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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징 Aug 15. 2021

걷는 인어공주

에릭 왕자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들어간 에리얼은 그의 심장에 칼을 겨눈 채로 멈춰 섰다.

'왕자의 심장을 찔러 그래야 네가 살 수 있어.' 언니들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며 어서 심장을 찌르라고

자신의 손을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쿵쾅쿵광 심장 뛰는 소리는 어느새 자신을 새어 나와 방안 전체에 울려 퍼졌다. 심장박동 속도가 빨라질수록 소리는 점점 커져갔지만 에릭은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처럼 평온한 모습 그 자체로 잠들어 있었다. 

칼을 쥔 양손이 바르르 떨려왔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칼을 높이 들어 올린 순간 열린 창문 틈 사이로 찬 바람이 강하게 훅 하고 들어왔다. 이불을 끌어당기며 뒤척이는 에릭의 몸짓에 놀란 에리얼은 칼을 바닥에 떨어 트렸다. 툭하고 제법 큰 소리가 났지만 에릭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잠에서 깨지 않았다. 

에릭은 알아야 하는데 모르는 것이 많았다. 자신이 찾아 헤매던 여인이 에리얼이라는 사실도 그녀가 몇 시간 뒤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게 된다는 것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물끄러미 에릭을 바라보던 에리얼의 눈은 슬퍼졌다.

"날 사랑하지 않은 것이 왕자님 탓은 아니야"

작은 숨을 뱉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터질 듯 뛰던 심장박동은 천천히 느려져 갔고 에리얼은 조용히 왕자의 방을 빠져나와 바닷가를 향해 걸었다. 자신이 살아온 바다 가까이에 가고 싶어서였다.

파도가 철썩 부딪치는 큰 바위 위에 걸터앉아 해가 떠오르기 전 어둠을 바라보았다. 파도가 잔잔하게 일렁이며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예쁘다'

멀리서 바라볼 때 육지 세상은 반짝거렸다. 반짝임에 끌려 그곳에 가니 반짝이던 것은 보이지 않았고 지금은 멀리 보이는 바다 물결이 더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와 에리얼 주의를 맴돌며 노래를 불렀다.

"바닷속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어.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모양이야. 

잔잔했던 바다가 수시로 들썩거려." 

마음속 깊은 어딘가가 건드려진 에리얼의 눈망울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에리얼이 노래를 부르면 조개들은 입을 뻐끔거리며 박자를 맞추었고 아버지는 에리얼의 선율에 맞춰 파도를 만들어주었다. 언니들은 흐뭇한 모습으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빠... 언니들... 미안해' 자신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서 행복을 훔쳐낼 것이다.

물거품이 되는 두려움보다 슬픔에 잠길 아빠와 언니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이 더 힘들었다. 슬픔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채워진 순간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툭 무언가 에리얼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고 그것은 인어의 눈물로 만들어진 진주였다. 

에리얼의 주변을 맴돌던 갈매기는 다시 호들갑스럽게 노래했다.

"인어의 눈물로 만들어진 진주에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네.

마녀는 언제나 인어의 진주를 갖고 싶어 했지."

놀란 에리얼은 눈을 비비고 손바닥 위에 놓인 진주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진주에서는 신비롭고 영롱한 빛이 강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인어의 눈물로 만들어진 진주에는 특별한 힘이 담겨있다고 바닷속 동굴 벽화에서 본 적이 있었다. 직접 본 인어는 없었기에 어떤 힘이 담겨있는지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잔잔했던 바다에 파도가 일렁이며 거센 소용돌이가 치더니 우르슬라가 나타났다. 

그녀의 표정은 항상 같았는데 눈썹은 치켜 올라가 있고 눈매가 매서워 언제나 화나 있는 문어마녀처럼 보였다. 매혹적인 검은 머리카락도 예쁜 얼굴도 화난 표정 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사랑의 확신이 담긴 입맞춤을 했니?"

우르슬라는 곧 에리얼이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물었다. 

에리얼은 고개를 저었다. 애처로운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도 우르슬라는 안타까움이라던지 안쓰럽다던지의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것 참 안타깝구나. 지금이라도 왕자의 심장을 찌르지 그러니"

에리얼은 수화로 이야기했다.

"왕자님이 날 사랑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죽일 순 없어. 날 사랑하지 않은 것이 잘못은 아니니깐."

자신이 죽을 상황에 처해있으면서도 상대를 생각하는 에리얼의 태도에 우르슬라의 심기는 불편해졌다.  

"착한 척 구는 너의 가식이 싫어. 인어들은 모조리 멍청해. 너의 가식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잖아. 넌 그들에게 상처밖에 주지 않는데 말이야. 넌 너밖에 생각 안 하는 이기적인 인어야. 가족품으로 친구 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도 버려 버렸어. 그런데도 왜 다 너를 좋아하는 거야. 하나같이 다들 멍청해." 

에리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듣고만 있었다. 그것 역시 우르슬라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하는 데로 곧 물거품이 되면 되겠구나." 우르슬라는 비아냥 거리며 속에 있는 말을 하나도 거르지 않고

다 뱉어냈는데도 속은 시원하긴커녕 기분은 더 나빠지고 있었다. 

그 순간 에리얼의 손바다에 있던 진주가 더 강한 빛을 뿜어냈다. 우르슬라는 황홀한 표정으로 진주의 빛에 빨려 들어가듯 바라보았다. 그리곤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인어의 눈물로 만들어진 진주구나.'

진주를 탐내는 우르슬라의 탐욕스러운 눈빛을 본 에리얼은 이 기회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손을 쭉 뻗어 우르슬라 앞에 진주를 보여줬다. 

'우리 다시 거래하지 않겠어? 나에게 목소리를 돌려줘.' 그녀는 손동작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진주에서 흘러나오는 신비롭고 영롱한 빛이 우르슬라의 탐욕을 더 강하게 자극했다. 

'물거품이 되는 저주를 풀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돌려달라고? 해가 뜨려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에리얼의 멍청함을 통쾌해하며 우르슬라는 승낙했다. 

우르슬라는 진주와 함께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에리얼은 자신의 이야기를 멜로디에 담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에리얼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바람을 타고 잠들어있는 에릭의 귓속까지 들어갔다. 홀린 듯 에릭은 노랫소리를 따라 바닷가로 향했고 그곳엔 노래를 부르고 있는 에리얼이 있었다. 

자신이 애타게 찾아 헤맨 여인이 에리얼이란 사실이 놀라웠지만 그동안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쿵쿵 뛰기 시작하는 심장에 맞춰 그는 사랑의 감정에 휩싸이고 있었다. 

에리얼의 노래가 끝나자 에릭은 에리얼의 두 손을 덥석 잡고 고백했다.

"이 목소리였어 에리얼 내가 바닷가에 빠졌을 때 나를 위해 노래를 부르던 목소리. 드디어 내가 찾던 여인을

찾았어. 에리얼 사랑해."

에릭은 에리얼에게 입맞춤을 했다. 천천히 해가 지평선 위로 떠오르며 어두웠던 주위는 환하게 밝아졌고 에리얼은 물거품이 되지 않았다. 에릭은 사랑하는 여인을 찾았다는 기쁨에 행복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지만 웬일인지 에리얼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우르슬라는 진주의 힘이 궁금했다. 전설에 따르면 진주를 얻은 자가 가장 갖고 싶어 하는 것을 내어준다고 했다. 그녀는 더 강력한 힘을 원했다. 그래서 인어들을 완벽하게 자신의 마음대로 통제하고 싶었다. 한껏 기대를 품은 채 진주를 꿀꺽 삼켰지만 아무런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진주를 삼키면 변화가 생긴다고 했다. 참을성이 없는 우르슬라는 화가 났고 자신이 놓친 것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진주의 전설에 대해 그려져 있는 벽화로 향했다. 벽화로 향하던 중 인간들이 버린 쓰레기로 인해 그물망에 엉켜 고통스러워하는 인어를 마주쳤다. 평소라면 고소해하며 독기 가득한 말을 퍼붓고 지나쳤을 텐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감정이 느껴지면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인어가 아프겠다는 생각이 마음에 비집고 들어왔다. 당황한 우르슬라는 외면하고 지나치려는 데 도와달라는 인어의 외침이 그녀의 발길을 잡았다. 자신에게 엉킨 그물을 끊어내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우르슬라는 마법을 써 엉킨 그물을 끊어냈다. 자유로워진 인어는 우르슬라의 손을 잡고 진심을 다해 고맙다고 인사했다. 

"정말 고마워요."

"됐어. 다음엔 멍청하게 끼지 말고 다녀."

인어는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인어를 처음 봤다. 고맙다는 인사도 처음 받아봐서 우르슬라는 얼떨떨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고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우르슬라는 강력한 마법을 가졌지만 한 번도 행복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르슬라에겐 공감능력이 없었다. 남의 불행을 봐도 위로할 줄 몰랐고 오히려 무신경하게 쉽게 말해 상대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런 그녀를 인어들은 멀리했고 매번 어긋나는 관계에 인내심이 없던 우르슬라는 화가 났고 그때부터 혼자이길 선택했다. 그리고 인어를 볼 때마다 자신의 힘을 이용해 괴롭혔다. 자신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인어를 보면 덜 외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르슬라는 더 강력한 힘이 필요했고 그것을 진주에서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우르슬라의 마음엔 공감능력이 싹트고 있었다. 아직 그녀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에리얼은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다. 꼬리 대신 두 다리가 생겼고 

새로운 것이 가득한 육지 세상에서 사랑보다는 자신이 진짜로 하고 싶은 것을 찾아내고 싶었다.

이제 바닷속으로 되돌아갈 순 없지만 시간이 될 때마다 바닷가에서 노래를 부르면

아버지와 언니들이 찾아와 서로의 안부를 챙길 수 있었다. 새로운 변화지만 그것에 적응하고 행복을 찾기로 했다. 


에리얼은 에릭의 청혼을 거절하고 대신 친구가 되자고 제안했다.

목소리를 잃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에릭을 보며 에리얼은 많은 생각을 했었다. 목소리를 찾고 사랑을 고백하는 에릭을 보면서도 에리얼은 많은 생각을 했다. 과연 이것이 사랑일까. 하고 말이다. 에릭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자신의 마음에 확신이 흔들렸다. 흔들린 채로 그와 결혼을 할 수는 없었다. 

에릭은 예상치 못한 에리얼의 제안에 당황하긴 했지만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리고 에리얼의 마음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왕자 인생 최고의 고민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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