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행위, 왜 중요한가 ③ : ‘지금, 바로 여기’를 만들어내는 극적체험
극적행위를 통해, 연극놀이 이끔이가 끌어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진지하고 심오한 감동을 주는 어떤 대상에 대해 특별한 방식으로 주목함으로써 감응하고
동시에 이것에 대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응답할 수 있게 되는 상태”
(미적체험의 개념, 2011, 서울문화재단)
그렇다. 연극놀이 이끔이가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은, 극적 행위를 통해 참여자들이, 어떤 대상에 대해 몰입하고, 그 몰입의 체험을 자신의 언어로 세상과 공유하도록 하는 것이다. 필자는 바로 이 과정을 미적체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공연예술의 창작자와 연극놀이 이끔이 모두, 극적행위의 본질과 원리, 그리고 그 의미발생과정의 특성을 밝히고자 한다. 그런데 “연극은 인간이 인식한 세계를 모방하고 소통하고 변화시키려는 뿌리 깊은 본능의 산물”(그로네마이어, 권세훈 옮김, 2005)이며, 이러한 인간의 본능이 표출된 것이 극적 행위라는 믿음이, 연극놀이 이끔이인 필자에게는 매우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연극이란 인간에게 무엇이며, 연극과 인간과의 관계, 더 나아가 연극과 자연생태계의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체험의 층위와 역학관계 들에 대해서 더 밀도 있게 성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밀도 있는 성찰이 ‘참여자 중심’, ‘과정 중심’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발전되어 왔다.
이러한 성찰과 탐색은 “때로는 개인의 창의성과 표현을 강조하는 형식으로, 때로는 혼란의 상황에 직면해 봄으로써, 또한 때로는 공연과 극장을 보다 구체적으로 활용하여 참여자들의 입체적이고 전방위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시도로 이어져왔던 것이다. 이 모든 시도에서 극적행위의 본질은 보여주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며, 극적행위의 과정을 참여자들이 수행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부여되는”(최지영, 2016) 것이다.
여기서, “극적행위의 과정을 참여자들이 수행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부여”된다는 것을 바꿔 말하면, “자신만의 방식으로 응답할 수 있는 되는 상태”에 참여자가 존재함을 말하는 것이리라. 곧 ‘지금, 바로 여기’를 만들어내는 극적 체험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누가? 이끔이를 포함한, 극적 체험의 세계를 체험하는 참여자가 말이다.
극적 행위와 극적 체험에 대해 인식론적인 탐구에 대한 시작은 어디로 거슬러 올라갈까?
그중 흥미로운 접근을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통해 알아보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극(예술)이 인간의 총체적인 인식을 끌어낸다는 대전제에 있어서는 플라톤과 기본 입장을 공유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예술을 체험하는 것이 이데아라는 절대적인 가치에 다가가기 위한 통로이자 수단이었으며, 예술이란 시민들이 갖추어야 하는 기본적인 덕목이라고 정리했다. 그래서, 삶의 모방인 연극에는, 좋은 모방과 나쁜 모방이 있으며, 나쁜 모방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답처럼 사실을 팩트체크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나”를 다룬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연극은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우월하다. 왜냐하면 역사는 특수한 사례를 다루고, 연극은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연극은 역사처럼 주어진 사실 혹은 리얼리티에 관한 직접적인 진실을 추구하지 않고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인간의 삶과 경험을 보여주는 것이다.”(김용수, 연극이론의 탐구, 2012)
실제로 연극이 인간의 삶과 경험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가 그의 책, 시학(Poetics)에서 매우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다.
“저급동물에 비하여 우리가 가지는 본성 중의 하나인 모방성은 모든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모방적 창조물이며 모방에 의해 지식을 배우게 된다. 또한 모방에 의해 이루어진 작품에 모두 기쁨을 가진다는 것 역시 당연한 것이다. 경험으로 보아 이 두 번째 점이 사실임을 우리는 안다. 대상 그 자체가 보기 역겨운 것이라 할지라도, 예술적 관점에서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된 것, 예를 들면 가장 사나운 동물의 모습, 사체 등에 관한 묘사를 볼 때도 우리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Aristotle, 김재홍 옮김, 아리스토테레스의 시학, 1998)
필자는 여기서 모방(성)에 주목하게 된다. 흔히 모방과 미적체험은 반대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모방은 복사(copy)이기 때문에, 체험과 창의성과는 아주 딴판이라고.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모방성, 미메시스라고도 불리우는 인간의 본성은, 자신이 관심과 몰입을 하게 된 대상에 대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주목하고 감응하는 꽤 효과적인 방식이 된다. 실제로 모방이 일어난다는 것은, 몰입한 참여자가 그 대상에 대해 관심과 함께 동일시 과정, 공감의 과정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동일시의 과정, 공감의 과정은 관심대상에 대한 특별한 방식으로 주목하고 감응하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이 우리가 말하는 ‘reality’의 순간이 아닌가! 이 순간, 모방은 재창조요, 재해석이 된다. 이것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응답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물론 미적체험의 공간은 ‘모방’의 층위, 그 넘어서까지의 다양한 층위들로 안내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응답하게 되는 열정을 끌어내는 것이 핵심이라고 할 때, 모방에 대해 짚어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