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by 시온

설 연휴가 다가왔다.

일 년에 두 번, 설과 추석에 나는 가끔 본가에 들른다.


하루 정도 머물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한 집 안에서 서로를 피해 다니던 숨 막히는 숨바꼭질 같은 시간도 이제는 예전의 일이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온전한 나의 집이 이제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시시한 꿈을 꾸었다.

나는 원래 꿈을 많이 꾸는데, 어떤 꿈은 깨어난 뒤에도 감정이 남아 하루 종일 기분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날 꿈은 이런 내용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꿈.

이제는 설날에 찾아갈 본가가 더 이상 없는 그런 서글픈 꿈이었다.


5년 전 그날 이후, 나는 아버지와 단 한 번도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내 부모의 시간은 어쩌면, 오늘 꿈속에서 본 그 장면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나이가 되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내가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다면,

그때 아버지는 이 세상에 아직 계실까.


비몽사몽 꿈에서 깨어 한참을 누워 있었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떤 인생을 살아온 사람일까.

사실 내가 그런 생각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꿈자리가 뒤숭숭해서인지 그냥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늘 같은 꿈 이야기를 했다.

물속에서 마녀가 어린 자신의 발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꿈.

아버지는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버둥거리다가,

꿈속에서 “엄마!” 하고 울부짖으며 깬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나는 수십 년 전부터 반복해서 들어왔다.


아버지와 할머니 사이는 각별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어릴 적 유독 할아버지의 미움을 샀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할머니는 장남인 아버지를 더욱 끼고돌았다.

그 일 때문에 아버지는 더 심하게 괴롭힘을 받았다고 했다.


아버지가 스무 살 무렵 군대에 있을 때도

유난히 미움과 얼차려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훈련 도중 크게 다쳐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그 소식을 듣고 할머니는 급히 기차를 타고 아들을 면회하러 가던 길에 기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인생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폭력은

아버지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장면은

술을 마시고 들어온 아버지가 유독 어린 나를 괴롭히던 밤이다.


엄마는 나를 지키기 위해

보일러실로, 옥상으로 도망 다녔다.

옥상 평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숨을 죽이고 있으면

잠시 뒤 아버지의 신발이

우리 주변을 왔다 갔다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찾았다.”


아버지는 고개를 숙여 우리를 찾아냈다.


그러면 다시 엄마와 아버지의 싸움이 시작됐고

나는 울기만 했다.


그 기억들이 와르르 떠올랐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아득한 나의 원룸.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엄마도 이제 너무 마음 쓰지 마.”


용서라는 단어가 내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용서는 생각보다 어려운 말이었다.


이해한다는 뜻도 아니고,

신경 끊겠다는 말도 아니고,

아무렇지 않다는 의미도 아니었다.


나는 용서가 상대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그 말을 꺼내 보니 용서는 오히려

나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용서한다.


이제 나는 내가 잊고 싶을 때 얼마든지 당신을 잊을 수 있다.


그 일을

잊을 수 있다.


그만큼의 거리가 내 안에 생겼다는 확신 같은 것이었다.


내가 원해서 그렇게 했다.


그만큼 나는 그날의 일보다

지금의 나와 지금의 삶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


설날에 내복을 하나씩 들고 본가에 올라갔다.

아버지는 굳이 나를 보고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 내가 가끔 들러도


“왔냐.”


그 한마디 인사가 전부였다.


아버지가 먼저 이야기를 하자고 한 것은 처음이었다.


엄마는 우리 사이에 서 있었다.

경계하듯.


일흔이 되어 가는 노모는 아직도 다섯 살 아이를 안고 아버지를 피해 도망치던 시절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대화는 별것 없었다.


무슨 일 하냐.

잘 지내냐.

살이 좀 쪘다.

그저 그런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오랜만에 아버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바라볼 수 있었다.


“배가 왜 또 나와?”


나는 물었다.


그 순간 아버지에게서 아주 미세하게 예전에 맡던 술 냄새가 났다.


간경화 말기라 한 잔만 더 마시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아버지는 어쩌면 스스로를 절망으로 끌고 가는

어떤 관성을 타고 태어난 사람인지도 모른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나는 다시 나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오랜 시간 나는 내 삶의 자리를 비워 뒀었다.


단단한 껍질을 입고

언젠가 온전한 내 삶을 살 수 있을까.


모르겠다.


버티는 것이 삶이라면 그동안 버텨 온 내 두 다리를 이제는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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