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수줍음이 담긴 백일홍 파우치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색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무지개색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할 것이고 그다음으로는 노란색을 좋아한다고 말할 것 같다. 사실 여러 색을 써야 하는 그림쟁이들에게 색이란 참 오묘하고도 어려운 존재인 것 같다. 어떤 특정 색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금세 다른 색을 좋아하게 된다. 사춘기 소녀의 마음처럼 색을 갈팡질팡 좋아하다 결국에는 세상의 모든 색을 좋아하겠노라고 마음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내가 꽂힌 색은 따로 있다. 소녀의 발그레한 볼처럼 은은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색, 바로 분홍이다.
분홍색을 싫어했던 적도 있다. 분홍색은 나와 같은 선머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색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러블리함과는 거리가 먼 나는 빨강과 노랑과 같은 원색적인 것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원색에 부드러운 흰색을 타서 만든 분홍색이라니 오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스스로에 대한 편견 때문인지 오히려 분홍색 아이템에 더 눈이 갔던 것 같다. 옷이나 액세서리 같은 것들은 분홍색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내가 사용하는 소품 일부는 조금 러블리해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자주 보는 소품들이니까 상관없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이번에 소개할 풍요하리 바느질 도감은 나의 사심을 팍팍 넣어서 글을 써볼까 한다.
우리 집 옥상에는 뜨거운 해가 저물고 선선한 계절이 올 때까지 피어있는 ‘백일홍’ 꽃이 자라고 있다. 핑크, 아이보리, 레드 세 가지 색으로 피어나는데 한 번 눈에 담으면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특히 핑크는 그냥 분홍이 아닌 꽃분홍색인데 이런 색 물감이 있으면 쟁여두고 싶을 정도로 정말 예쁜 분홍이다. 그 분홍색의 이파리가 둥글게 꽃잎을 피우고 있으면 선명한 노란색 작은 꽃잎이 달린 수술들이 중앙을 수놓고 있다. 백일홍의 진가를 이제야 알게 되어 아쉬울 지경이다. 엄마께서는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시들기 시작한 백일홍 꽃을 꺾어다 화병에 꽂아두신다. 겨울이 오는 것이 서러워도 백일홍이 마음을 달래주니 그런대로 겨울을 맞이할 용기가 생긴다.
언니 하리는 옥상에서 피어난 백일홍 꽃을 모티브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백일홍 꽃이 행복 파우치 형태의 새로운 디자인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전 바느질 도감에서 소개한 ‘해바라기 행복 파우치’를 뒤이어 ‘백일홍 행복 파우치’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백일홍만의 둥글고 보드라운 이파리를 그대로 표현해 패치워크를 연결했고 원단들은 다양한 채도와 무늬를 지닌 분홍색 원단들이 사용됐다. 하나하나 따로 봤을 때는 ‘이 천을 대체 어디에다 써?’와 같은 느낌이었는데, 언니의 감각대로 천을 배치하니 조화롭고 백일홍다웠다. 덕분에 새로운 탐욕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납작한 만두 모양의 행복 파우치는 보이는 것에 비해 부피가 커서 많은 소품을 담을 수 있기에, 이번 백일홍 파우치는 해바라기 파우치보다 조금 더 작게 만들어졌다. 그 덕분에 이파리 사이즈도 줄여서 디자인했다. 중심 부분에는 둥그런 느낌의 반짝이 레이스를 사용하여 둘러주었고 붉은 기가 도는 갈색 원단을 사용해서 원단 중심을 잡아주었다. 덕분에 행복 파우치에 백일홍이 화사하게 필 수 있었다. 바탕으로는 은은한 체크와 도트 무늬가 그려진 연분홍 원단을 사용했고 핑크톤의 비슬론 지퍼를 사용해 완성도를 높였다. 이놈의 비슬론 지퍼가 다리미에 녹는 바람에 언니 하리의 흰머리 몇 가닥이 더 자라났지만, 이내 마음에 드는 형태로 완성이 되었다. 손잡이는 백일홍 꽃 모양을 닮은 아크릴 참 장식을 달아서 마무리해 주었다. 어느 한 곳 아쉬운 부분 없이 풍요하리 스타일로 잘 완성된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나는 이 파우치를 비록 만들진 못했지만, 영원히 만들고 싶은 1호 작품으로 간직할 예정이다. 이 파우치를 언젠가 만들게 된다면 내 마음 한 편에 자리잡고 있는 소녀를 멱살 잡아 깨워서라도 잘 사용할 것이다. 또, 이 글을 작성하면서 소녀의 수줍음 담은 것 같은 핑크색을 사진에 다 담지 못해서 아쉬워하고 있다. 퀼트나 펠트 소품은 실제 그 부드러운 질감과 음각이 두드러지는 퀼팅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다. 언젠가 작품들을 전시해 두고 오늘 소개했던 바느질 도감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우리의 진심도 전할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