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211027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발제문
줄글 아니고 생각 다발 조금씩.
- 세 자매가 어른이었기에 이렇게 성숙하고 아름다울 수 있었을 것 같다. 만약 청소년 세 명이었다면 맨날 싸우는 영화였을 듯… '아무도 모른다'를 살짝 비튼 느낌.
- 지금까지 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 중에 제일 순한 맛인 것 같다. ‘걸어도 걸어도’를 안 봐서 모르겠는데 ‘어느 가족’이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무도 모른다’ 같은 다른 가족 영화 중에서는 정말 정말 순한맛 착한맛… 고통이 분명 있는데 그걸 되게 부드럽게 표현한다 너무 멋있어 부러워
- 이 영화는 혈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완전한 타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스즈가 세 자매의 돌아가신 오바짱을 소중하게 대하는 것, 세 자매가 스즈의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는 것, 자매들과 가족처럼 지내는 ‘바다 고양이 식당’ 부부까지. 어떻게 관계 맺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가족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 같다.
- 세 자매도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는 건 아니다. 엄마에 대한 원망과 응어리가 크게 남아있는 사치를 요시노는 이해하지 못하고, 치카는 항상 투닥거리는 언니들 사이에 착한 바보처럼 끼어있다… 그리고 치카한테는 아무도 좋아하는 걸 물어봐주지 않아ㅠㅠ
- 치카가 붕어낚시를 연습하는 모습, 벚꽃을 만지는 모습이 계속 나오는 게 눈에 밟혔다. 치카는 엄마와 아빠 모두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 유일한 인물이고, 연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누구보다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누구나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그리워하니까. 그래서 치카는 아빠가 낚시를 좋아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 자매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스즈의 감정을 잘 표현한 것 같다. 특히 화면상으로 다른 사람은 다 포커스 아웃되고 스즈만 포커스가 잡혀있거나, 세 자매 사이에 끼어있는 듯한 연출이 많다. 스즈의 감정과 스즈의 상황이 영화에서 중요함을 암시하는 듯.
- 왓챠피디아에 죽음과 생에 대한 영화라고 썼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사치가 있는 특별병동, 나노미야 씨의 죽음, 오바짱의 7주기 제사까지 영화에는 죽음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장례날 데려온 스즈가 더욱 죽음과 생의 경계에 맞닿아있는 인물처럼 보이고, 스즈 자체가 죽음과 태어남을 상징하는 것 같다. 겨울이 지나고 피는 벚꽃처럼. 긴 투병 끝에 꼭 벚꽃을 보고 죽었다는 나노미야 상과 아버지의 이야기는 앞서 벚꽃 터널을 지나며 웃는 스즈의 얼굴이 떠오르게 한다.
스터디 후 생각 정리
- 화면을 어떻게 이렇게 예쁘게 구성했는지 모르겠다. 스터디 중에 딱 '일본 같은' 영화라는 말이 나왔는데, 목조 가옥이나 벚꽃, 식사 장면 같이 일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장치가 많다. 일부러 로케이션을 그런 곳으로만 정한 듯. 요망해... 특히 2015년 영화임에도 아날로그 필름처럼 느껴지는, 자글자글한 종이 위에 그린 것 같은 화면, 적당한 생동감과 높은 색온도, 거슬리지 않는 마젠타 기까지 완벽하다. 내가 영화를 찍고 DI를 한다면 딱 저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 '비포' 시리즈 마냥 대화가 끊이지 않는 영화인 것 같다. 특히 네 자매가 함께 있는 씬에서는 꼭 화면 안에 잡히지 않은 인물의 말소리까지 넣어서 공간을 확장한다. 그럼으로써 관객은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 인물도 항상 존재한다고 느끼게 된다. 이 산 자들의 삶에 스며들어 있는 죽은 자들의 흔적처럼.
- 산 자들은 죽은 자들의 음식을 먹으며 그들과의 기억을 재구성한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담근 매실주, 아빠가 해주곤 했던 시라스동과 시라스 토스트, 엄마의 카레와 할머니의 카레. 식사는 생(生)과 가장 맞닿아있는 행위다. 생을 꼭꼭 씹어 넘기는 이들의 음식이 죽은 자들이 남긴 거라는 건 참 미묘하다. 생과 죽음은 종이 한 장보다도 가까운 것이다. 네 자매는 이제 전갱이 튀김을 먹으며 나노미야 씨를 생각하겠지.
- 사치에 대해 한참 얘기가 오갔다. 사치가 왜 그렇게 선뜻 스즈를 데려오자고 했는지,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왜 자기도 유부남과 연애를 하는지. 사치는 참 복잡한 인물이다. 어쩌면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떠난 아버지보다, 그렇게 남겨진 세 자매를 버린 어머니를 더욱 원망했는지도. 마치 K-장녀 같은.. J-장녀의 아버지와의 단절과 어머니를 향한 원망, 동생들에 대한 책임감이 사치를 서럽고 슬프게 만들었다. 그래서 부모를 전부 잃고 무표정 뒤에 눈물을 삼키는 스즈에게서 자신을 봤을지도 모른다.
- 누가 잔잔하고 조용한 영화랬는데 예상보다는 굴곡이 있고 재미도 있는 영화였다. 영화에서 무언가 잘못될 것 같다는 그런 긴장감을 주지 않으면서 관객이 그저 인물들의 하루하루를 따라가게 하는 게 대단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어서 그런가. 서스펜스와 공포로 가득한 영화보다 훨씬 멋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