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어제 본 <Prince of Egypt(1998)>. 한국에선 '이집트 왕자'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드림웍스의 2D 애니메이션인데, 웰메이드로 회자되고 있다. 사실 드림웍스에서 제작한 2D 애니메이션이 있는지 몰랐는데 <엘도라도(2000)>, <스피릿(2002)> 등 들으면 알만한 것들이 몇 개 있었다. 다음에 봐야지.
*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교 무신론자의 개인적 감상으로, 1, 2는 민감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1.
나는 무교인데다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없지만, 종교 자체에는 흥미가 있다. 이 '흥미'는 종교인들이 자칫 불편하게 느낄 수 있을 호기심인데, 첫째는 신을 믿는 심리에 대한 회의 및 궁금증이고, 둘째는 종교의 토대가 되는 신화에 대한 흥미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후자와 관련지을 수 있다. 성경도 어쨌든 구전 동화나 옛날 이야기와 같다는 측면에서, 난 종교가 어떻게 신화적 인물을 만들어내고 살을 붙여 의미를 전달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영화의 주인공 모세(Moses)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고대 히브리인의 지도자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아브라함과 야곱의 후손으로, 신이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Canaan)을 떠나 이집트에 정착하지만 노예 생활을 하게 된다. 모세는 히브리인 출신으로 바구니에 담긴 채 나일강에 떠밀려와 ('모세'의 뜻이 '나일의 아이'라는 설도 있다) 이집트의 왕실 가족으로 길러진다. 히브리인의 수가 늘어나자 이집트 왕실이 새로 태어나는 히브리인 남자 아기들을 몰살하려 했기 때문이다.
'운 좋게' 살아남은 모세는 자신의 뿌리를 깨닫고 왕실을 떠나 살던 중 신의 계시를 받게 된다. 모세는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집트로 돌아와 어느새 파라오가 된 형 라메시스(Ramesses)에 맞선다. 라메시스는 완강히 거부하고 결국 이집트에는 신의 재앙이 찾아온다. 나일강이 피로 물들고, 역병이 돌고, 이집트의 모든 첫째 아이들이 죽는 등 이집트가 폐허가 되고 나서야 라메시스는 모세가 사람들을 데리고 떠나도록 허락한다. 하지만 홍해에 이르러서 라메시스는 군사들을 데리고 이들을 추격하는데, 모세는 그 유명한 '홍해의 기적'으로 바다를 갈라 건너고 파라오의 군대를 전멸시킨다.
2.
재미있는 건 모세가 실존했던 인물은 아니라는 거다. 학자들은 모세와 유사한 지도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모세 자체는 신화적으로 만들어진 인물이다. 결국 모세의 출생과 대이동은 종교의 믿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픽션이라는 건데, 그 구성이 재미있다. 모세가 우연히 이집트 왕자로 길러졌다는 설정은 모세가 지도자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음(적대 세력인 이집트 왕실에 의해 그 위엄이 부여된다는 게 역설적이긴 하지만)과 동시에, 히브리인의 해방에 대한 절박함을 보여준다. 모든 걸 가진 사람이 다 내려놓고 뛰어드는 것만큼 사안의 중대성을 보여주는 게 어디 있을까. 또 모세는 신의 부름을 통해 선택받은 사람이어야 하고, 따라서 신의 힘을 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바다가 갈라지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일들은 신에 대한 경외감을 심어주기 위한 필수 요소다.
이렇게 보면 이들의 신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권위적이다. 이집트인들에게 라(Ra)와 아문(Amun)과 아누비스(Anubis)가 있었다면 히브리인들에게는 야훼(YHWH)/엘로힘(Elohim)/아도나이(Adonai)가 있던 모양이다. 오직 히브리인들만을 보호하는 신이면서 심지어 행복만 주지도 않는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모세는 선택받은 지도자이지만 신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시키지 않아 신에 대한 충정이 의심된다는 이유에서였는데, 결국 아내 치포라(Zipporah)가 순식간에 아들의 할례를 치러서 모세를 살렸다고. 아브라함도 아들을 바쳐야 하는 궁지에 몰리지 않았는가. 믿음이 의심된다며 벌을 준다고 으르면 누가 믿지 않을 수 있나...하고 종종 혼자 생각한다. 여간 또 재미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는, 모세와 히브리인들은 가나안에 도착해서 바로 행복해지지 못했다. 모세는 그 업적에도 불구하고 신으로부터 '가나안에 도착하기 전에 죽을 것'이라는 경고를 수차례 받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가나안에 도착한 히브리인들은 이미 그곳에 살고 있던 민족을 상대로 정복 전쟁을 벌여야 했다. 정복 전쟁은 성공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토착민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이쯤되면 신이 가나안으로 가라고 해놓고 장난치는 거 아닌가 의심해봐야 한다.(농담)
3.
영화적인 부분으로 넘어가보자. 난 디즈니의 2D 애니메이션도 좋아하지만, 이 영화를 뛰어넘을 미장셴을 가진 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판타지아(1940)> 정도? 여기에 대해선 드림웍스가 확실히 이겼다. 이 영화에서 좋았던 건 우선, 고증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개성있게 구현한 캐릭터들의 이미지였다. 화이트워싱 되거나 획일화된 모습이 아니어서 좋았고, 이렇게 독특한 그림체가 반가운 걸로 보아 나 그동안 참 디즈니 애니메이션만 봤구나 싶었다. 그리고 시각적으로 의미를 구현하는 게 정말 뛰어났는데, 내가 금방 방학 동안 찍은 영화가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첫 씬에서 히브리인 노예들이 돌을 나르고, 무거운 것들을 들어올리고, 그게 결국 거대한 신의 조각상과 화려한 왕국의 모습으로 연결되는 일련의 샷들은 압도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착취당하는 모습은 <레 미제라블(2012)>의 첫 씬을 연상시키는데, 그것보다도 더 장엄하고 슬프다. 이집트의 거대한 건축들이 노예들의 땀과 피로 세워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걸 시각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스토리의 토대를 확실히 쌓은 오프닝이었다. 특히 이 장면에서 히브리인 노예들이 부르는 노래가 있다.
Elohim, god on high
Can you hear your people cry
(...)
Deliver us, there's a land you promised us
Deliver us, to the promised land
-<Deliver Us> (Prince of Egypt OST)
이 노래를 부르는 히브리인들은 더이상 아브라함과 야곱의 희망을 품고 있지 않다. 오히려 신에게 듣고 있냐며 절규하고, 약속한 땅 가나안으로 데려가 달라고 애원한다. 모세가 나타나 떠나자고 했을 때 아론(Aaron)이 보인 반응과 비슷하다. 고통받는 자신들에게 신이 도대체 있기나 한 건지 회의한다. 모세는 이 의심을 거두는 역할을 한다. 결국 모세가 히브리인들을 데리고 마침내 이집트 땅을 떠날 때, 히브리인들의 노랫말은 바뀐다. 믿음이 있다면, 희망은 흐릿해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이루지 못할 것만 같았던 꿈이 현실로 다가오자 사람들은 비로소 신을 믿는다.
There can be miracles
When you believe
Though hope is frail
It's hard to kill
-<When You Believe> (Prince of Egypt OST)
탄압받던 이들이 자유를 얻고 천천히 나아가는 이 장면은 감동적이다. 사실 이 노래는 내가 글래스고에 있을 때 아카펠라 동아리에서 공연용으로 연습한 거였는데, 이 영화를 보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노래를 처음 접했을 땐 그냥 히브리어가 들어간 거룩한 느낌의 노래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제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이 장면을 되새길 것 같다.
4.
<Prince of Egypt(1998)>는 드림웍스가 이를 갈고 만든 게 보일 정도로 구도나 색을 쓰는 게 뛰어나다. 파라오와 라메시스의 얼굴, 몸짓 등을 왕궁의 석상이나 벽화와 겹쳐 보여준다던가, 그러면서 모세와 대칭적으로 세워서 대결구도를 만든다던가 하는 것들이다. 영화 제작자들이 간단히 생각할 수 있지만 실행하고 보여주기는 정말 어려운 것. 미장셴에 대해 한 줄 지식도 없는 사람이라도 단번에 보고 의미를 캐치할 수 있는 정도다.
또 기억에 남는 걸 하나 꼽자면, 돌아온 모세가 라메시스와 벽화 앞에서 다투는 장면이다. 이 때 갑자기 라메시스의 아들이 어두워서 무섭다며 등장하는데, 마지막 컷의 와이드샷은 세 인물이 벽화와 동일시되면서 [폭력을 행사하는 강자 라메시스 - 희생양이 되는 어린아이인 라메시스의 아들 - 약자와 히브리인의 편에 선 모세] 라는 의미를 강화한다. 벽화 속 강물 속으로 떨어지는 아이들처럼 결국 라메시스의 아들도 라메시스의 고집 때문에 신에 의해 죽는다는 걸 생각하면 꽤 정교한 복선인 셈이다. 이 외에도 유명한 홍해씬, 이집트의 재앙 몽타주, 모세가 계시를 받는 장면 등의 구현도 뛰어나다. 애니메이션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이미 시각적으로는 여느 할리우드 영화보다도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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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간 오랜만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영화를 봐서 길게 써보았다. 사실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이런 저런 수업도 듣고 찾아보면서 더 알려고 하는 중이다. 가끔 종교 있는 친구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거니까 이해 바람바람.. 그리고 <Prince of Egypt(1998)> 다들 꼭꼭 보세요. 그럼 다음에도 좋은 영화로 돌아오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