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이 따라 북쪽으로…와당탕 소리에 고향 생각만

아기상군 해운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다 : 닿고 보니 블라디보스토크더라 1

by 고미

△1971년 제주도 해녀가 작업하고 있는 모습.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해녀 출가물질 얘기를 하다가 영화 <밀수>로 시작해 ‘해녀밀수특공대’까지 빙 돌아온 데는 이유가 있다.

줄잡아 바다를 3번은 건너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갔던 강예길 할머니의 기억 속에도 ‘밀수’와 관련한 내용이 있다. 미수에 그치기는 했지만 당시 사정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어떻게 당시 노국(露國)·아라사(俄羅斯)까지 갔는지에 대한 얘기부터 풀어본다면, 사정은 단순하다. ‘돈을 벌기 위해서’. 조금 부연 설명을 한다면 ‘돈을 들여 먼 길을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나름의 절박함이 있다.


청산리 전투 전과를 보도한 독립신문 1921. 2.25자


"그저 돈을 벌 수 있다면"

제주에서 풍선을 타고 부산으로, 다시 기선을 타고 청진으로 이동한 강예길 할머니는 벌이를 따라 계속 북쪽으로 이동한다. 해산물 채취 시기, 해안가 노동력 수요 등을 감안해 동선을 정했다. 여기에는 함께 작업을 하는 열 명 넘는 해녀가 있었고, 사공이던 사촌(고모 아들·오빠)의 동행 역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블라디보스토크 물질은 이 사촌의 주선으로 성사됐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해녀 열세 명이 함께 갔는데 늦은 봄에 가서 석 달 동안 살다가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국경을 넘는 일이었고, 일본과 러시아 간 관계가 그리 좋은 시기도 아니었다.

3·1운동 이후 민족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실력을 양성하자는 목소리 안에는 자본의 힘도 포함돼 있었다. 한글보급운동이나 물산장려운동 등이 시작됐던 것이 이 시기다.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은 노동자·농민운동도 활발했다. 신간회(1927~1931)를 주축으로 청년운동, 어린이 보호운동, 여성 권익 신장운동, 백정 차별 철폐운동 등 대중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순종 황제의 국장일을 기점으로 서울에서는 6·10 만세운동(1926)이 일어났고, 광주에서 발생하여 전국으로 번져간 학생들의 항일운동(광주학생항일운동‧1929)도 있었다. 제주해녀항일운동(1931~1932년)에 이 시기를 거치며 응축된 힘이 작동했고, 해녀를 앞세워 사회계몽운동을 하던 지역 청년 조직이 와해 수준에 직면했던 일이 연결된다.

3·1운동 직후 만주에서는 50여 개의 독립군단체가 결성됐다. 이들은 수시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식민통치기관을 공격했고 자신들을 토벌하려던 일본군을 상대로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한다. 하지만 이후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간도 지역 한국인들을 대거 학살했다. 일본군에 쫓긴 독립군은 다시 러시아령 자유시에 모여 다음 거사를 도모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 배경에는 통솔권을 둘러싼 내부 갈등에 더해 대한독립군의 해체를 요구하는 일본군과 러시아 볼셰비키 공산당 간 모종의 합의가 있다고 전해진다.

독립군단체는 다시 민주에서 힘을 모으고, 만주에서 결성된 의열단은 상하이 등지로 옮겨 다니면서 일제의 요인을 암살하고 시설을 파괴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서울과 도쿄에까지 잠입하여 경찰서와 궁성 등에 폭탄을 던졌다.

‘재외불량선인언동’ 보고문서 목차. 노령(블라디보스토크 일대)·두만강(북간도)·압록강(서간도)·하얼빈과 봉천(선양) 등으로 나눠 조선인 항일독립운동 동향을 정리했다.


그저 험하고 박했던 '그 때 그 시절'


급하고 간단하게 항일독립운동사를 정리하는 이유는 그 만큼 국경을 넘나드는 일이 쉽지 않았다는 설명 때문이다.

강예길 할머니가 블라디보스토크 물질을 갔던 시기가 마침 이 즈음이다. 주민등록 작업이 없어 정확한 나이를 추정하기는 힘들지만 인터뷰 기록과 가족의 기억을 토대로 1897년 생인 할머니는 스물 네 살과 스물 다섯 살이던 해 블라디보스토크 물질을 했다. 대충 어림하면 1921년과 1922년이다.

정식으로 허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국경을 넘기 힘들었던 것은 물론이고 낯선 이국땅에서 ‘조선인’으로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었던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다.

청진에서 두만강을 건너기 위해 현지에서 배를 빌렸다. 강예길 할머니는 풍선으로 두만강을 건너는 것만 3일 정도 걸렸다고 기억했다. 중간에 녹둔도로 추정되는 지역에 정박해 다시 이동을 하는 등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두만강을 바로 건너 러시아로 들어가는 일이 여의치 않았음을 살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두만강은 유역 면적이 1만513㎢다. 중국과 러시아 지역의 유역 면적을 합하면 4만1242㎢에 달하는 등 한반도 최북단의 자연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선사 시대 이래 한반도 문화 형성의 통로 역할을 했다. 고려‧조선시대에는 여진족과 국경 분쟁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고, 일제강점기에는 학정을 피해 나라를 떠나던 관문이었다. 그만큼 경계가 삼엄했다.

심지어 넓은 유역 면적이 비해 유량이 많지 않고 급류가 많아서 배를 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전체 구간 중 배를 댈 수 있는 구간은 85㎞에 불과했다. 한강의 가항구간도 330㎞나 된다. 전체 유역을 통해서 지세가 험하고 기후가 한랭해 100t 정도의 선박도 정박하기 어려웠다.


눈감으면 들리는 와당탕 와당탕 소리


우여곡절 끝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갔지만 뭐하나 수월한 것이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곰포(다시마)를 채취했다. “품에 안고 나오려고 해도 자꾸만 미끄러져서 왕대를 잘라 건져내듯이” 작업을 했다. 15일 정도 작업을 했는데 ‘낯섦’에서 오는 공포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도 힘들었지만 현지 도적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돈을 내놓으라 협박을 했다. 밤낮없이 들리는 짐승 울음소리 때문에도 수없이 놀랐다. 어떻게 하면 빨리 벗어날 수 있었을까 하는 고민으로 밤을 지새웠다.


저 노국, 총소리, 밤에 누워시면 와당탕 와당탕 총소리. 꽥 소리 또 막 그냥 밤중에 누워시면 그 여름이나넨 마당에들 자ᆞ감녀 열서이에 사공 서이에 누워시믄 또 총소리가 와당탕 와당탕 와당탕. 또 막 노루 사슴은 무사 경 만나카. 노루사슴 소리도 못 자큽디게.….청진서 풍선, 풍선으로 두만강 넘어간. 저 막 먼디 막 풍선으로 한 사흘이나 들어야. 남저, 우리 고모 아들이 우릴 데려가십주. 청진 간 풍선을 산 마씀. 총소리에 무서웁디다. 총소리에. 게믄 **에서 통계가 옵니께 노국갈 때. 어느 마을에서 이제 노국 사람이고 대국 사람이고 이제 돈을 메엉 놔두라. 우리가 어느날 며칠 갈게니까니 돈을 헹 놔두라 영하믄. 그 **에선 따ᆞ시 이젠 아편 장사들 하젠 청진에서 막 들어갑니께, 경 들어강 그때 왜정이실 때난예 경 들어강허믄. 그에 이제 또 연락을 하면 또 우리신드레 연락이 오라마씸. 아이고 보따리 다 모살 소곱에 다 파묻고. 풀 소곱에 몇 시간 곱았당 나오고, 포대기도 막 모살 다 묻고. 어디 갈 디가 아닙디다.…돈 모으랜 한 사람들은 다 도독들. 서로들 노립디다. 우리배 가가난 우리배가 좀녜 몇개 싣그고 사촌오라방까지 서이헹 가가난 그놈들은 우릴 이젠 도둑 심으러 다니는 배여헹 노래영.…경행 열흘 보름 물질헹 그냥 아이 조선 나가켄, 청진 나가켄. 경헨 오라방 오빠신디 생 야단, 영 하ᆞ간디 우리싣겅 왔댄 막 생야단하(아래아)난


노국 얘기를 하자면 ‘총소리’가 먼저 생각나지. 밤에 누워있으면 와당탕 와당탕 하는 총소리가 하고, 꽥 하는 짐승 소리가 나고. 여름이니까 밤에는 해녀 열세명, 사공 세명이 이렇게 마당에 누워서 자는데 총소리가 와당탕 와당탕 와당탕. 노루 사슴은 왜 그렇게 많은지. 노루 사슴 소리에 잠을 못 잘 정도였다.

노국에 갈 때는 청진에서 풍선을 타고 갔어. 풍선으로 두만강을 넘어갔지, 아주 먼 곳이었는데 (기억으로)풍선으로 한 사흘은 갔었다. (질문 : 해녀들만 갔나요) 남자들이 같이 갔지. 우리 고모 아들이 청진에서 풍선을 사서 우리를 데려갔다.

총소리는 무서웠다. 노국에 갈 때면 ‘몇 명이 어느 마을에 간다’ 하는 연락(사전 신고 정보)이 가는 모양이더라. 그러면 노국 사람이고 대국(중국) 사람이고 찾아와서 우리가 몇 날 며칠에 갈 거니까 돈을 준비해서 내놔라. 그 때는 아편장사를 하려고 청진에서 (노국 쪽으로)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였으니까 일본에서 감시하는 사람들에게 연락이 가면 또 이쪽으로도 연락이 와서. 그럴 때마다 보따리를 다 모래밭에 파 묻고, 풀밭에도 파 묻고. 같이 간 사람들도 몇 시간이나 숨어있다가 나오고 했다. 어디 갈데가 아니었다.… 그 때 우리에게 돈 모으라고 한 사람들은 다 도둑들이었다. 서로를 노리더라. 우리 배가 가니까, 왜 배에 해녀들도 있고 사촌오빠며 사공도 여러명 있어서 그 사람들이 우리를 도둑 잡으러 다니는 배라고 생각해 놀라더라.그렇게 열흘 보름 물질을 했는데. (너무 무서워서) 이제 그냥 조선으로 가자, 청진으로 나가자고 오빠에게 생야단을 했지. 이런데 우리를 데리고 왔다고 막 생야단을 했어.


1918년 아무르주 스바보드니를 공격해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감행한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과 백파. 자료사진


찬 바다에서 건진 곰포 한아름


스무날 살앙 풍선이 그 물건, 물건은 곰포마씀. 발로 서발, 뿜으로 서뿜마씀. 우리 오라바님이 키가 크우다게. 그 어른 뿜으로 너비가 서뿜, 발로가 서발 두발가왕. 제일 짤룬게 두발마씀. 곰포 곰포. 곰포가 일본사람들 큰 반찬, 좋은 반찬입디다. 다시마. 경헹 막 그것을 한아름 안앙 나오려고 하면 소록소록 소록소록 골라졍. 영 뒤트레 바래면 바로 이 듬북 튼 게라 마씀. 경허난 배에서 대가 막 그 왕대가 하ᆞ간 몇 개씩 올라강 왕대 그찬강 물아래 쑥 질레줍네다. 질레주면 이제 호미 요 물건 영 안은들로 요 손으로 이제 대를 영 붙잡으믄 배에서 우꿋하게 들려주면. 뒤터레 바래보믄 바로 큰 듬북튼게라 번번한. 경헨 보름 물질헨 그냥 청진 나오란.…우리고라 제주 사람이렌 ‘남도 나그네’ ‘남도 나그네’라고. 세수하젠 보난 여기 동구새끼 대동대동 다 돌아젼.


스무날을 살면서 물건, 물건은 곰포다. 발로 한 세 발 정도(들어가서 작업했다), (곰포가)품으로는 한 세품 정도나 될까. 제일 짧은 것이 두 품 정도 됐다. 곰포가 일본 사람들에게는 좋은 반찬이라고 해서(돈이 된다고). 곰포가 지금 다시마. 한아름 안고 나오려고 하면 미끌미끌해서 계속 흘러내려. 뒤로 한 번 쳐다보면 없어지고 또 없어지고. 그래서 배에서 왕대를 몇 개 물에 내려주면 한 손으로는 호미로 곰포를 고정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왕대를 잡고, 그러면 배에서 끌어올려주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지. 그렇게 보름 물질해서 청진으로 나왔지. 거기서는 우리가 제주에서 왔다고 ‘남도 나그네’ ‘남도 나그네’하고 불렀어.

날이 추웠어. 세수하려고 하면 얼굴에 얼음이 매달릴 정도였지.


잠수배를 타고 나가 작업하는 해녀들 모습. 사진 서재철


* 모든 글은 직접 취재와 자료 조사를 통해 쓰고 있습니다 [무단 복제 및 도용 금지]

매거진의 이전글‘다시 돌아올’ 간절함에 설움 삼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