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올’ 간절함에 설움 삼키고

제주 아기상군 해운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다 : 제주해녀 출가사 3

by 고미

출가(出稼)하다


출가(出稼)하다 : 동사. 일정 기간 타향에서 돈벌이를 하다.

흔히 알고 있는 단어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해녀들의 ‘출가’에 담겨 있다. 아마도 처음에는 ‘집을 떠난다’는 의미에 집중해 썼을지 모르지만 해녀들의 일생을 봤을 때 연구자들이 힘줘 ‘출가(出稼)’라 정리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집과 고향을 떠난, 이유만이 아니라 목적을 이루고 난 뒤 어떤 의미로건 ‘돌아 올’에 무게를 두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은가. 현지에 남아 지역 해녀가 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출가 해녀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자기 만족’보다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선택한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원치 않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많은 부분 감수했다. 그것도 다 인생이라고, 어디 정해진 대로만 되느냐고, “살암시믄 살아진다”는 말을 해녀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다.

1925년 어간 부산 영도로 ‘출가 물질’ 나왔던 해녀들의 수는 조선총독부 내무부장으로부터 지역 부윤(일제강점기의 행정 단위인 부(府)의 우두머리. 지금의 시장(市長)에 해당한다)과 군수 앞으로 통첩된 공문을 통해 일부 파악할 수 있다. 공문에는 ‘부산부 근해에 입어할 제주도 해녀 어업조합원 수 결정. 부산부 250명, 동래군 650명(기장어업조합 지역 내 400명, 기타 250명)’이란 기록이 나온다.

앞서 언급했던 경상남도 앞바다에서 작업을 하던 ‘제주도 해녀’의 수가 1000명 가량이었다는 1929년 동아일보 보도(6월17일자 2면)를 감안하면 그 대부분이 부산에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10살에 물질을 시작해 13살부터 상군 노릇을 했다는 강예길 할머니가 부산을 언급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당시 출가 해녀들에 대한 지역의 시선이 어땠는지, 그리고 또 어디로 어떻게 이동했는지 여부까지도 살필 수 있다.


<일제시대 제주도에 대한 사진자료 수집보고서> 중. 제주전통문화연구소.


돈 때문에 집까지 떠난


강예길 할머니는 10살부터 물질을 시작해 13살 이후부터는 상군 노릇을 했고 이후 여러 곳으로 출가 물질을 갔다.

‘능력을 발휘해 돈을 벌 수 있는 일’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디아스포라’의 경험은 사회적 약자라는 영역 안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충격과 정신적 황폐함을 남긴다. 출가 해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향에서고, 출가지에서고 ‘돈 때문에 집까지 떠난’이란 굴레는 잔인했다. 특히 여성을 향한 일방적인 가해와 폭력은 시대도, 시절도 가리지 않는다. 이유 없이 가혹하기만 했던 현실이 진실도, 사실도 아니라는 점은 안타깝다.

현대 사회심리학 창시자의 한 사람인 무자퍼 셰리프(Muzafer Sherif)의 의견을 빌리자면 일종의 동조(conformity)의 병폐다. 미국의 심리학자 제니스(Irving Janis)가 조지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1984>에서 차용한 ‘집단사고(group-think)’의 함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찬 여성이 가족을 동반하지 않은 상태에서 집을 떠나 타지에서 묵고 온다’는 것에 더해 불편한 인식에 더해 ‘돈을 잘 버는’을 향한 질투와 질시가 만든 이미지가 출가 해녀들의 자존감을 잠식했다.

강예길 할머니가 18, 19살이던 무렵 부산 출가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살펴보자.

물질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해녀 몇 명을 동네 청년들이 희롱하는 일이 있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술기운을 빌려 슬쩍 접촉을 시도하거나 테왁으로 쓰는 박을 낚아채거나 하는 일이 간혹 있었다. 불편한 상황을 피하려고 그나마 부산살이 경험에 ‘힘도 세고, 목소리도 큰’ 강예길 할머니와 몇 명이 짝을 이뤄 움직이곤 했었다. 그날도 물건을 팔고 받은 돈을 챙기고 가는 길이었다.

강예길 할머니의 기억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물질 작업을 하러 갈 때도, 또 마치고 돌아올 때도 절대 혼자 다니지는 않았다. 우루루 팔장을 끼고 움직이는데 꼭 나를 바깥쪽으로 세우곤 했다. 누가 뭐라고 얘기하면 대차게 대꾸도 하고 가라고 밀치기도 했으니까. 그날은 한 열여섯명 정도가 같이 움직이는데 그날은 하필 내가 가운데에 있었지. 그런데 이날은 지역 청년들도 몇 명 됐어. 길 가운데 딱 버텨 서서는 내 옆으로 다른 해녀들이 가는 것은 그냥 보내면서 나랑 몇 명을 막아서는 거야. 아주머니 아주머니 이러면서. 이건 뭐에 쓰는 거냐, 이름은 뭐냐. 그 때는 돈을 받으면 동전을 잃어버릴까봐 귀에 끼워두고는 했거든. 그걸 보고 거기5원짜리 10원짜리 다 어디로 들어가냐고 시비를 거는데, 내가 힘은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실랑이를 했지. 몇 명이 힘을 모아 청년 중 한 명을 붙들고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때리고 욕하고 했지. 한참 시끄러우니까 다른 청년들도 모여들었지. 겁이 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사람들이 우리를 희롱해서 이렇게 됐다’고 소리쳤지.
그랬더니 나중에 온 청년들 중 하나가 이렇게 말하더라고. ‘여기 제주해녀들은 돈을 벌어서 늙은 부모도 모시고 어린 동생들도 키우고 한다. 네놈들이 뭔데 이렇게 소동을 만들어서 동네 평판을 나쁘게 하냐’고 야단을 했어.


2007년 부산외대 김문길 교수가 입수한 '다케시마 관계철'에 수록된 일제시대 조선인 독도 강제노역 관련 사진. 사진 오른쪽에 제주해녀로 추정되는 여성들이 있다.


'돈을 주고 데려온'삶

강예길 할머니의 기억은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다. 자료들 중에는 지역에서 배척당했던 기억이 더 많이 나온다. 제대로 된 방도 없어서 헛간 같은 곳에 짚풀로 마른 자리를 만들어 묵거나 할당받은 작업 양을 채워야 한다고 새벽부터 바다에 나가는 바람에 하루 한 끼로 버티는 일도 많았다. 밤에 낯선 사람이 숙소로 들어온다거나 물질을 마치고 돌아오는 해녀들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추파를 던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렇게 힘겹게 버텼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시선이었다. 당시 해녀들은 현금화가 쉬웠던 미역 채취 등을 투입됐고 실력이 좋아 지역 해녀들보다 더 큰 돈을 손에 쥐었다. 불과 몇 개월 생활하며 바다에 들락날락하면서 목돈을 챙겨가는 것이 마냥 좋게만 보였을 리 만무하다. 해녀들로 돈을 번 입장에서도 ‘선급금을 주고 데려온’이란 기준으로 해녀를 하대하는 일이 많았다.

지역에서 ‘보재기’로 불렸던 일도 그런 흐름 안에 있었다.

‘보자기 혹은 보재기’는 조선 시대 깊은 바다에서 전복 등을 채취해 진상하는 일을 하던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포작인(鮑作人), 포작간(鮑作干), 포작한(鮑作漢), 복작간(鰒作干) 등 한자음으로 옮겨 표기했다고 전해지지만 시간이 흐르며 해녀를 부르는 말로 바뀐다. 포작인은 깊은 수심에서 전복과 소라, 고둥 등을 전문적으로 채집하고, 해녀는 비교적 얕은 수심에서 해조류를 중심으로 채집하는 것으로 역할이 비교적 구분되었었다. 하지만 진상 부담 등을 견디지 못한 남성들이 제주를 벗어나면서 대신 그 몫의 일을 해야 했던 해녀들에게 호칭이 짐처럼 부여된 셈이다. 그것이 출가 지역에서는 ‘천한 일을 하는’의 의미까지 덧씌워져 ‘고달픈 삶’이라 부르는 인생의 한 부분이 됐다.


물질을 마치고 귀가하는 해녀의 모습.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집단사고와 동조, 그리고 상처


‘내 몫’이라 생각했던 것이 ‘우리 몫’으로 영역화하면서 그 안에서 상대적으로 소수이거나 약자, 특히 외부에서 들어온 집단에 대한 무자비한 유‧무형의 폭력이 행사되는 일은 흔했다. 집단사고는 응집력이 강한 집단이 소통상의 결함을 가진 상태에서 외부의 비난을 받거나 성과를 조속히 달성해야 하는 급박한 현실에 직면하면 이의제기나 대안 제시를 터부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구성원들이 불합리한 집단의사를 따르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를 강화하고 이탈자를 단속하기 위해 다른 집단과의 갈등을 조장하면 자기편은 무조건 옹호하고 상대 집단은 배격하게 된다. 심지어 동조(conformity‧압력이 있는 사회적 규범이나 의견 등에 개인의 태도, 의견이나 신념, 행동 등을 동화시키는 경향)의 영역에서는 죄책감이 희석되거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자기합리화하는 2‧3차 가해도 많았다.

그런 이미지가 쌓이고 쌓이면서 한 때 '딸을 나면 잔치를 했다던' 사정은 '집에 해녀가 있는 것을 숨기는' 천박한 현실이 됐다.

취재를 하고도 차마 기사로 옮기지 못한 내용 중에는 ‘물질을 마치고 잠을 자던 중에 겁탈을 당해 수치스러워 차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숨어살았다’ ‘집에 말하지 않고 출가물질을 나가서 번 돈으로 선물을 잔뜩 사들고 돌아왔는데 우리 식구가 아니라고 그대로 쫓겨났다’ ‘출가물질을 마치고 돌아왔더니 내 집 안방에 다른 사람이 있더라. 아무렇지 않게 내 베개까지 베고 누웠는데 처음에는 화가 났는데 나중에는 내가 없는 동안 아이들을 돌봐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같은 기억들이 산재해있다. 예전 취재수첩을 뒤지며 몇 번이고 울컥했다. 취재 대상이었던 해녀 할머니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이렇게 '정말 힘드셨겠다. 애쓰셨다'는

분명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선택한 출가물질이었지만 ‘집을 떠났다 왔으니’ 본처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는 잣대도, 그렇게 힘들게 번 돈을 두집 살림을 건사하는데 썼던 해녀 할머니의 결정도 도통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더 ‘돈을 벌러 간 것 아니냐’는 시기나 질책 뒤에 왜 그들이 돈을 벌기 위해 나서야 했는지 부터 살펴봐야 했다.

2015년 제8회 KT&G SKOPF ‘올해의 작가’ 다큐멘터리 사진가 김흥구 사진집 <좀녜> 중. 이 사진을 처음 보고 한참 울었던 기억이 있다.2007년 서천진동 촬영.
책 작업을 하면서 왜 이사진을 찍었는지 물었다. 비닐 봉투 안에 할머니의 삶이 들어있었다고 했다.


** 모든 글은 직접 취재와 자료 조사를 통해 쓰고 있습니다 [무단 복제 및 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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