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상군해녀 해운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다 4 : 무속문화의 의미
△ 고 김수남 작-제주도 잠수굿 제주도 제주시 구좌읍 동김녕리(1985년).
“올해 보말씨는 좀 이시쿠다. 어서신디 우미도 나고.(올해 보말은 좀 나겠습니다. 우뭇가사리 채취도 좀 될 듯합니다)”
전날 밤 소라적을 끼우면서도 한참을 쏟아낸 얘기가 아침까지 이어진다. 말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데도 꽤 톤이 높다. 바다 작업을 오래 했던 결과다. 귀가 좋지 않아 잘 듣지 못하니 상대방도 행여 못 듣는가 싶어 크게, 더 크게 말을 한다. 멀찍이 서 소리만 들으면 싸우는 것처럼도 보이는데 실상 ‘누게(누구) 어멍이, 또 누게(누구) 아방이’ 아니면 언니나 계장·총무가 등장한다. 한해 바다 사정을 살피는 중요한 자리다 보니 의견도 많고, 신경 쓸 일도 계속 나온다. 씨점을 보는 데 이르러서는 제대로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지경이 됐다. “게난 어떵하덴?” “먼 바다에는 좀 나켄” “거기는 누가 가지고”
(그러니까 어떻대?/먼 바다에는 물건이 좀 있을 거라고/거기서 작업할 사람이 있을까)
오랜 시간 쌓아왔다는 것은 멈춰 정형화됐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다. 십수년 잠수굿을 지켜보다 보니 매년 내 행동도 달라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처음에는 멀리서 해녀 삼춘들의 눈치를 살피며 구석을 지켰다. 몇 년이 지나서는 좁쌀 주머니를 들고 ‘씨 뿌리기’에 손을 보탰다. 물론 허락이 필요한 일이다. 그나마 얼굴 좀 익혔다고 옆을 내주셨다. 그리고 다시 몇 해가 지나서는 씨점 내용이 눈 앞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상차림이 좀 바뀌기도 하고 삼춘들의 역할에도 변화가 생긴다. 굿판에 찾아온 사람들의 구성도 달라졌다.
코로나19로 한 두해 출입 제한을 하다 모처럼 개방한 잠수굿 현장이 북적북적하다.
잠수굿은 제주도에서만 전승되고 있는 무속의례다. 바다에서 작업을 하는 해녀들의 무사안녕과 해산물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이다. 그 중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동김녕잠수굿은 전통 방식을 견고하게 지켜오고 있다. 바닷길이 열린다는 매년 음력 3월 8일에 잠수회가 중심이 되어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진행한다. 한때는 한달 이상 걸렸다는 준비 기간이 요새는 절반 이상 줄었다. 초감제로 시작해 요왕맞이, 지드림, 씨드림-씨점, 액막이, 배방선까지 일련의 과정을 진행하는데 그 호흡이 길다.
해녀들의 무탈을 기원하는 열명, 새드(아래아)림, 요왕맞이, 지드림, 요왕차사본풀이, 액막음과 각산받음에 이어 요왕세경본풀이, 요왕맞이, 씨드림-씨점으로 한해 바다 사정을 살피는 과정을 차근차근 이어간다. 제물을 공동으로 준비하는 것은 물론 분부사룀, 서우젯소리, 지드림, 도액막음과 도산받음 등 공동체를 확인하고 유대를 점검한다.
눌굽이하르방(이달춘), 한옥녀·문춘성 심방에 이어 서순실 심방이 집전한지도 꽤 됐다. 그 만큼 해녀삼촌들과 진득한 라포를 형성했다.
올해 잠수굿 씨점(씨드림이 끝난 다음에 무당이 돗자리에 좁쌀을 뿌려 그 흩어진 밀도를 보아 어느 쪽에 채취물이 풍성할 것인가를 알아보는 행위)에 해녀삼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 솔락에 큰여 밑으로 가면 난데없는 감태가 덮어져 이시카”
“거긴 투석사업해부난 뭐들 들이쳐부난 무서웡 못가”
“난데없이 물건들이 부트기 시작해신디. 거기는 앞으로 1~2년간 가지 말아사”
“그냥도 못 가. 무서웡” “암튼 지금 가면 안돼. 지금 가면”
“경헤도 먼바다는 그렇게 섭섭 안 하쿠다”
“먼바다는 된데 해도 이젠 하영 못하여. 벗이서사 가주”
정리하자면 바다밭 중 한 곳에 감태가 나서 소라 같은 것이 보이겠지만 1~2년 정도는 가지 말라는 얘기, 먼 바다에 나가면 소라가 좀 나겠다는 점괘다. 해녀삼촌들은 바로 투석한 곳임을 인지한다. 그냥도 무서워 못가는 지역이라는 말은 수심이 좀 깊고 조류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다. 먼 바다에 나가면 아직 바다밭 사정이 좋기는 하지만 점점 작업하기 힘들다는 말이 아프다. 나이가 들어서 체력이 안 되는 것 보다는 같이 작업할 사람이 없어서 못한다는 말이라 더 아프다.
단골들이 개별적으로 점을 쳐서 산傘을 받아 한 해의 운수를 점치고 액막이를 한 후 짚배를 바다로 띄워 보낸다. 배방선은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진행했다. 포구 정비를 하면서 원래 배를 띄우던 곳에 안전펜스가 세워지는 바람에 위치를 바꾸기는 했지만 무사히 신을 돌려보냈(도진)다.
제주해녀 공동체의 무속신앙·문화는 유네스코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공동체의 중심축으로 전통 방식을 ‘어깨너머’ 전승하는 과정에 주목한 결과다.
제주 전체에 걸쳐 37개 잠수굿이 남아 있지만 언제까지 남아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이미 사라진 것도 있다.
강예길 할머니의 기억 속에는 배 위에서 진행하던 요왕굿이 남아있다.
바람에 의지해 멀리 부산 영도까지 가는 길에 해도도 없었고, 일기예보 같은 정보도 없었다. 오직 믿을 거라고는 ‘요왕님’밖에 없던 터라 배 위에서 제를 지냈다. 오직 제를 지내기 위해 살아있는 돼지를 싣고 항해했다. 강 할머니의 기억은 그랬다.
채록할 당시 강예길 할머니의 나이가 여든을 넘긴 시점이었다. ‘그 때’ 정확하게 어떤 제차를 따랐는지, 축문 내용이 어땠는지를 기억할 사람은 다 죽고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강예길 할머니가 더듬어 쏟아낸 것은 물질밖에 몰랐던 젊은 해녀가 살기 위해 어떻게 버텼는지의 얘기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다.
정성의 의미로 돼지를 배 위에서 잡았다. 밧줄로 돛대에 매달았던 것까지 기억했다. 제물로 받쳤던 돼지는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고루 나눠서 먹었다. 중에는 멀미를 심하게 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해녀도 있었다. 이어싸나 소리에 묻힌 엄청난 노동강도가 고기를 포기하게 하기도 했다.
그 때 “해운대”라는 이름이 엄청 불렸다.
“아이고 해운대야 이 궤기 주쿠메 나중에 나 대신 뇌 저서주라”(해운대야 이 고기 줄테니 나중에 나 대신 노 저어주라). 고기가 귀했던 시절이기도 했고, 배 생활도 잘 견뎠던 터라 많이 얻어 먹고 노도 하영(많이) 저었다는 말을 무용담처럼 쏟아낸다. 그냥 들을 때는 모른다. 줄잡아 14일 이상 걸렸던 험한 뱃길이다. 풍랑을 만나면 인근 섬에 배를 대고 파도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무인도는 무인도대로, 사람이 사는 섬은 그 섬 대로 해녀들의 편은 아니었다. 배를 대기 힘든 섬에서는 배 바닥에 모여 추위와 배고픔, 공포와 싸워야 했다. 각박했던 섬 사정에 해녀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는 일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행여 해녀들이 배에서 내려 뭐라도 가져갈까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했다.
강예길 할머니는 운이 좋은 편이어서 바다에서 고생한 얘기는 많지 않았다. 이전 이뤄진 사례조사들에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정이 무더기다. ‘너무 추워서 닥닥 이빨을 부딪히다 보니 나중에 잇몸에서 덜렁덜렁 이가 빠질 정도가 됐다’거나 ‘너무 배가 고파서 **까지 먹었다’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니 까맣게 바짝 말랐더라’ ‘나중에 보니 배 하나가 보이지 않았는데 찾지도 못하고 그냥 갔다. 돈이 모자라서 돼지를 준비하지 못한 배였다’ 하는 말이 꽤 많이 반복된다.
힘들어 낯선 바다로 돈을 벌러 가는 길이었다. 선장이나 사공 중에서 제를 집전했다고 하지만 돛을 단 풍선에 20여명의 사람이 반달 치 먹을 것과 물에 돼지까지 실었다. 가능한 줄여야 할 짐들 속에 단순히 고된 노동을 뒷받침해 줄 에너지원의 존재다. 누구 한 사람 빼놓지 않고 골고루 나눠 먹는 것으로 집 떠난 불안은 덜고 서로를 의지하는 운명공동체를 인지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랬던 그 시절이었다. 그 당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갔다? 어떻게? 뭐를 싣고? 질문이 계속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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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제주도무속자료사전』(현용준, 신구문화사, 1980)
「제주 잠수의 어로와 의례에 관한 문화인류학적 연구: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위한 문화전략을 중심으로」(안미정, 한양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제주도 잠수굿 연구: 북제주군 구좌읍 김녕리 동김녕마을의 사례를 중심으로」(강소전, 제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