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미 Jul 09. 2022

걸머진 삶의 무게 너머 그 이름을 소환하다

아기상군해녀 ‘해운대’블라디보스토크에 가다 1

근현대사 제주 해녀 120년, 대서사의 장 열다

1900년 대 재일 한국인 4대 담은 OTT드라마 선전

더 긴 역사 제주해녀·문화 기록·가치 복원 요구

자료 발굴, 복원·확인 통한 ‘레거시’작업 의미


애플TV+ 오리지널 ‘파친코’가 세상을 흔들었다. 1900년대 격동의 한국사를 배경으로 재일 한국인 가족 4대 이야기를 그린 작품의 주인공은 시대와 사랑이 주는 시련 앞에 무너지지 않는 강인한 여성 ‘선자’다.

순간 오랜 세월 묵묵히 제주를 지켜온 여성이 떠오른다. 해녀다. 제주해녀의 바깥물질은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머무는 곳마다 제주라는 이름과 문화를 남겼다. 단순히 ‘어디에 갔다’가 아니라 ‘그곳에서 무엇을 했다’를 살피는 작업은 제주 정체성을 다시 확립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그 동안의 작업도 쉽지 않았다. 오르텅스 블루가 글로 그렸던 사막 한 가운데 '그'처럼.(그 사막에서/그는 너무도 외로워/때로는 뒷걸음으로 걸었다/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어쩌면 올해 해녀와 관련해 오랫동안 묻혀있던 자료를 발굴하는 작업은 '뒷걸음'과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그 때 해녀들이 바다를 건너는 불안과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삶을 지키려 했던 그 마음처럼.

1970년대 해녀촌 풍경(동아일보 1973년 4월 11일 게재)

△파친코가 남긴 것

‘신드롬’을 일으킨 파친코는 2022년 이전과 이후로 그 정의가 달라진 단어다. 이전까지는 구슬을 이용한 사행성 도박이나 관련 기계를 통칭하는 말이었다면 지금은 1910년대부터 1980년대를 아우르는,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교포(자이니치)와 아직도 이방인으로 살고 있는 그 후손들의 삶을 다룬 대서사 드라마를 먼저 떠올린다.

‘파친코’는 해외는 물론이고 국내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적 아픔을 통해 ‘코리안 디아스포라’라 불리는 경계인과 이주민의 설움으로까지 이야기를 확장했다는 점에서 공감을 샀다.

번역조차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한국인 특유의 ‘한의 정서’를 제대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 휴 총괄 프로듀서는 한 언론매체 인터뷰에서 “한의 정서는 일제강점기에 억지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세대가 겪었던 트라우마”라며 이를 ‘이주민의 정체성’ 문제로 이어가기도 했다.

파친코 시즌 1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자이니치 1세대 할머니들의 인터뷰는 그래서 더 뭉클하고 묵직하다. “내가 선택해 걸어온 길을 후회하지 않아요”

어딘지 익숙하다. 그렇다. 섬과 바다, 어머니를 응축한 제주 해녀의 삶이 그러했다.

  

△1900년대 바깥물질 산 기록

이제는 세상에 없는 두 해녀의 삶은 베스트셀러도, OTT를 통해 한꺼번에 세계와 만날 기회를 얻지도 못했다. 다만 살았고, 눈에 띄지 않은 기억이지만 남아 있다.

그중 한 명은 1898년 생, 1989년 91세에 세상을 떠난 고 강예길 할머니. 지금껏 알려진 자료들 속에서는 구좌읍 행원리 출신으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물질을 다녀온’ 증인이란 기록으로 남아있지만 사실 그보다 더 많은 서사를 품고 있다.     

1996년 발간한 「제주의 해녀」중 ‘바깥물질’을 다룬 내용을 보자.

기록 속 ‘제주해녀들의 행동반경은 썩 널찍했다. 물질이 이뤄질 만한 한반도 연안 곳곳과 크고 작은 섬으로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는가 하면, 일본·중국·러시아 등 동북 아시아 일대의 여러나라에까지 폭넓게 뻗쳤었다. 이는 곧 부딪힌 어려움의 부피가 한없이 크고 걸머진 삶의 무게가 엄청나게 육중하다 하더라도 결코 이를 외면함이 없이 까무러지지 않고 정면으로 생활을 개척하려는 튼실한 의지다…’로 시작한다.

이어 ‘현지조사에 뛰어들어 보면 일본 물질을 다녀온 해녀들은 어렵잖게 발견된다. 광복이 될 때까지 해마다 1천 수백명씩 일본을 드나들 만큼 일본 물질은 극성스러웠고, 그 수요도 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칭따오(靑島)·따리엔(大連) 등 중국이나 블라디보스토크 같은 러시아로 물질 나가는 일은 드물었으매, 그 곳을 다녀온 해녀들도 만나보기 어렵다’고 적고 있다.

강예길 할머니(1989년 별세)는 여기서 등장한다. 1999년 나온 「한국의 해녀」에도 같은 사연이 좀 더 단정하게 정리돼 있다.

아쉬운 것은 두 기록 모두 강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랬다고 하더라”로만 남았다. 하나 건너 나온 자료들에도 ‘~라고 기록하고 있다’거나 ‘~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도로 다뤘다.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있다면…했던 바람이 통했다.

강예길 할머니(추정)

고(故) 오성찬 선생님의 자료들 속에서 ‘강예길’이란 이름을 찾았을 때의 울컥함이라니.

유족들이 박물관에 기증한 지도 올해로 10년. 그동안 조용히 자리를 지키며 날개를 펴지 못했던 자료들의 리스트 작업이 때마침 이뤄졌고 ‘한 번 훑어볼 기회’를 얻었다. 그 것이 올해 1월 3일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증목록의 유무를 살폈다. 마침 있었다. 521번까지 빼곡하게 빈칸을 채운 자료를 몇 번이고 뒤집어 살피면서도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어지간한 자료는 이미 세상에 알려져 있던 터였다. 그 안에서 해녀와 관련한 자료가 툭툭 튀어나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자료는 어떻게든 열어보고 싶은 판도라의 상자였다. 다른 일들로 바쁜 학예사를 붙들고 ‘+++’ ‘XXX’번 자료 공유를 요청했다. 연구자로 꼭 확인해야 했다.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던 ‘첫’, 그리고 오래 기다렸던 ‘그’ 자료를 손에 쥐는 순간의 감정은 비슷하게라도 표현할 재주가 없어 그냥 넘겨둔다.

△아기 상군 해운대의 탄생

그렇게 강 할머니가 오늘로 소환됐다.

무려 37년을 버틴, 오래된 카세트 테이프 속 목소리는 제주 바다를 건너 부산과 울산, 청진, 원산을 넘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가 닿는다. 거기서 멈춘 것이 아니라 현해탄 건너 쓰시마와 오사카, 도쿄, 시코쿠 남부 코우치켄까지 찍고, 돌아왔다.

강 할머니는 ‘예길’이라는 본명 대신 ‘해운대’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불렸다. 선주였던 아버지를 따라 바깥 물질을 나갔던 어머니가 부산 해운대에서 낳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경상도 목도(부산부 목도·현 영도 추정)'에서의 합재(홍합)작업, 청진의 고래잡이와 지천이던 성게·미역, 무서워서 15일을 겨우 버티다 도망치듯 빠져나온 노국(러시아) 물질까지, 녹음 당시 88살이라는 나이를 믿기 어려울 만큼 생생한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모든 글은 직접 취재와 자료 조사를 통해 쓰고 있습니다 [무단 복제 및 도용 금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