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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Apr 17. 2023

어머니 뱃속에서 부터 바다를 배운 사연

아기상군해운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다3

<커버사진 1952년 부산 수영구 남천동 해안마을 해녀들의 물질. 한국저작권위원회.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


장리석 화백 '바다의 역군' 1000호. 제주도립미술관 소장.


게난 어디서 들엉 와시니(그러니까 어디서 들어서 왔니)


육성 인터뷰 안에는 더 길고 생생한 기억이 남아있었다.

고 오성찬 선생은 언론인 출신의 소설가로 오랜 시간 지역 연구에 투신해 많은 자료를 남겼다. 강예길 할머니 인터뷰 자료는 「제주의 마을」을 집필하며 1985년부터 10여년간 모아온 기록 중에 있었다. 오성찬 선생은 1997년 제주도 내 마을의 유래와 민요, 전설 등 제주풍속사 자료는 물론이고 제주 4·3에 대한 주민들의 증언까지 도내 500여개 마을을 돌며 그동안 만난 사람 수백명의 목소리를 담은 인터뷰·증언채록·녹음테이프 등 자료 521점을 제주특별자치도민속자연사박물관에 전달했다. 묵은 먼지를 털어내는 과정이 있기는 했지만 할머니의 단단한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 그만 ‘아’ 탄성이 나왔다.

지난 십수년 해녀 취재 과정에서 빈 칸으로 남겨뒀던 것을 채워질지 모른다는, 그리고 하나씩 맞춰지는 과정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감동적이었다.

1시간 분량 1개와 10여분 안팎 1개로 총 2개의 구술 자료 중에서 1985년 2월 8일 채록한 구술 원본을 100번도 넘게 들었다.          

 ‘해녀(海女)’ 강예길(姜禮吉)의 일생(一生)(88세) 행원리 막내딸 박정자의 집. 1985. 2. 8. 오전’의 기록이다.


1952년 부산 수영구 남천동 해안마을 해녀인 어머니 대신 동생을 돌보고 있는 딸. 한국저작권위원회.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

해운대에서 태어나 "강해운대"


시절이 그랬을 때라 강예길 할머니의 나이는 분명하지 않다. 기록한 날을 기준으로 어림 잡아 보면 1897년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구좌읍 행원리’가 고향이라고 했지만 인터뷰 내용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나온다. 다름 아닌 할머니의 애칭이다. 울산으로 출가물질 가는 내용을 말하던 도중 자신을 “해운대야”라고 불렀다고 했다. 제주도 어디에도 해운대라는 지명이 없으니 분명 부산이 맞는데 고운 제 이름을 두고 어찌해서 그렇게 불렸던 것일까.

인터뷰와 당시 시대 배경을 연결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강예길 할머니가 ‘강해운대’라고 불린 것과 제주해녀 출가물질의 역사가 맞물린다. 강예길 할머니의 어머니인 고 현산옥 해녀는 지역 해녀들과 부산으로 출가물질을 갔다가 산달이 돼 해운대에서 아이를 낳았다.

제주해녀 출가물질의 역사를 알면 이 시기는 중요하다. 대표적인 자료로 일본 학자 마츠다 이치지는 ‘제주도해녀(濟州島海女)’(1976)에서 제주 해녀가 1895년에 부산부(釜山府) 목도(牧島, 지금의 영도)로 처음 출가나갔다고 기술했다. ‘몇 명’이 ‘어떤 과정’으로 ‘무엇을 위해’ 출가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한국의 남동해안 어장으로 우뭇가사리와 감태 등 일부 해조류를 채취하기 위하여 아마(ぁま·일본 해녀)를 동원했던 사실 등에서 제주해녀들 역시 비슷한 이유로 부산(부) 목도로 진출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1934년 준공 직전의 영도대교 전경. 도개에 맞춰 돛단배가 지나가고 있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실제 개화기·일제강점기 제주해녀들은 일본 잠수기선의 남획으로 제주 어장의 황폐화와 고가에 일본으로 수출되는 우뭇가사리 등의 해조류 채취를 위해서 육지로 나왔다. 1876년 당시 조선이 일본과 맺은 한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 이후 일본 잠수기업자들이 들어오면서 맨손으로 소라·전복을 채취하던 해녀들의 입지가 좁아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시기 강예길 할머니의 아버지가 배에 자신의 아내와 동네 해녀들을 태우고 부산까지 이동했다.

조선 후기 출륙금지령을 뚫고 섬을 나섰던 제주해녀들의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이 부분만 놓고 봐도 충분히 가슴이 뛴다. 당시 사람이 살지 않았던 영도에 제주해녀들이 정착해 마을을 이룬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애플TV 드라마 시리즈 <파친코> 중 부산 영도 해녀들이 작업하는 모습. ⓒ 애플TV


어깨너머 '삼춘'에게 배우는 삶


다시 '파친코‘로 돌아가 보자. 주인공 선자의 부모 훈과 양진은 영도 출신이다. 지름 8㎞ 남짓의 작은 섬에서 봉래산을 사이에 두고 남인 듯 살다가 중매로 부부의 연을 맺는다. 어업과 하숙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훈의 부모가 정착한 곳은 지금의 봉래동 인근, 양진이 살던 곳은 건너편인 동삼동 근처로 추정된다.

이리 놓고 보면 두 사람 모두 제주 출신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제주에서 돈을 벌기 위해 온 사람들이 모이는 곳, 그리고 현재 동삼동어촌계 해녀를 말하며 '제주 출신'을 빼놓을 수 없는 점을 연결하면 수긍이 간다. 인근 남항 어촌계 소속 해녀 전원이 제주 출신이다. 목숨을 의지하며, 바다밭을 나누는 해녀들이 쉽게 자신들의 공동체를 허용하지 않는 사정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9살 어린 아이에게 물질은 쉽지 않은 일이다. 드라마로 각색하며 의미있게 다룬 점을 제외하면 제주에서도 그 나이 아이들은 놀이처럼 바다를 배운다.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다 '살 일'이자 '살 길'이다. 예측 불허 바다 사정에 욕심을 부려 물숨을 들이키면 죽을 수도 있는, 말그대로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아이에게 칠성판을 지게 할 어른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어떻게 하면 버티며 순응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는 말해준다. 선자는 혼자 자맥질을 하는 것들이 아니라 삼춘들 사이에 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 모든 글은 직접 취재와 자료 조사를 통해 쓰고 있습니다 [무단 복제 및 도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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