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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Apr 24. 2023

"여자로 나느니 쉐로 나주"했던 시절에

아기상군해녀 해운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다 4 : 제주 해녀 출가사 1

해녀가 바다를 건넌 이유


제주해녀를 얘기하면 출가 물질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는 많다. 먹고 살기 위한, 지극히 당연한 이유에서부터 사회경제적 환경이 바뀌면서 해녀 외에도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진행형’이라는 점도 그렇다. 계속해 이유가 만들어지니 신경 써 살펴볼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연구자이자 여성학자인 로지 브라이도티의 '유목적 주체(Normadic Subjects)'이론을 적용하기도 한다. 해녀를 제주에 한정하지 않고 ‘한반도 전역에서 바다를 기반으로 지역 경제와 공동체를 일군’으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다.

실제 우리나라 해녀 문화는 제주 해녀들의 출가 물질에서 비롯됐다. 돈을 벌기 위헤 섬을 떠난 제주해녀들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현지 해녀에게 물질기술과 해녀노래를 비롯한 제주해녀문화를 전승시켰다. 제주해녀의 타 지역 이동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제주해녀들의 출가 배경에는 ‘생업을 통한 문화 전파·확장’이 있었다는 점에서 구분해 살필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제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인 탐라순력도. 국립제주박물관 소장
탐라순력도 중 공마봉진. 진상용 말을 모아둔 모습.

남성의 빈 자리, 여성이 있었다


제주해녀의 출가 역사는 크게 ‘조선 후기(1637~1897)’, ‘개항기·일제 강점기’, ‘1950~1970년대’, ‘1970년대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조선 후기 관리들의 수탈, 왜구의 빈번한 침입, 과도한 진상·부역 등으로 섬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1629년(인조7년) 출륙 금지령(出陸禁止令)이 내려진다. 지역에서 거둬 중앙으로 보낼 진상 규모는 계속해서 늘어나는데 반해 사람수가 계속해서 줄어드는데 따른 방편이다.

군역과 요역에 있어 제주도는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지리적 특성으로 독자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했다. 남성들로는 채울 수 없는 자리를 종종 여성들이 채웠다.

조선시대 제주 지방의 군인들은 마대(馬隊), 속오군(束伍軍), 아병(牙兵), 별아병(別牙兵) 등의 병종으로 나뉘어 편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편성된 군인의 숫자는 제주도민 전체의 숫자와 거의 맞먹을 정도였다.

김상헌의 「남사록」(1601년)을 보면 당시 제주도 인구가 2만2990명(남 9530명·여 1만3460명)인데 비해 군인의 수는 7444명이나 됐다. 남성 9530명 중 양반과 어린아이 노인 등 군역을 지지 않는 사람들의 숫자를 헤아리면 그 누구도 군역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고 여겨진다. 남성보다 여성의 숫자가 많은 이유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사정을 볼 때 많은 수의 남성들이 살기 위해 제주를 떠났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런 사정들은 여성들까지 군역에 징발되는 이유가 됐다.

김상헌은 “내가 알아보니 본주의 성안에 남성(男丁)은 5백이고, 여정(女丁)은 8백이다. 여정이라고 하는 것은 제주 언어이다. 대개 남정이 매우 귀하여 만약 사변을 만나 성을 지키게 되면 민가의 건강한 부녀자를 골라 성 위에 내다 세워 여정이라고 하는데 3읍이 모두 그렇게 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군역만 나눈 것이 아니었다. 진상을 위해 잠녀(潛女), 포작(鮑作), 목자(牧子), 과원(果園), 곁군, 답한(畓漢) 등 1인 6역을 맡는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중 꼭 집어 여성의 영역으로 구분했던 것이 ‘잠녀’, 지금의 해녀였다.

관리와 양반들이 용연에 배를 띄워 여흥을 즐기는 한 켠에서 해녀들이 물질 작업을 하고 있다. 탐라순력도 병담방주 중.


섬 떠나고도 바다를 의지하는 삶


말과 소, 그리고 귤 뿐만 아니라, 바다와 산에서 생산되는 갖가지 물품을 진상해야 하는 고달픔에 제주 사람들은 육지로 도망가거나 바다를 떠돌아다니면서 해적이 되기도 했다. 바다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의 채취는 누구나 가능한 것이 아니어서 포작인(浦作人 혹은 鮑作)과 잠녀(潛女)를 특별히 뒀다. 포작인은 주로 전복과 물고기 등을 주로 잡아서 진상하는 임무를 맡았고, 잠녀는 미역·청각·우뭇가사리 등의 해조류와 조개류 등을 주로 채취했다. 이들은 진상용 뿐만 아니라 관아에서 쓸 물품까지 담당했는데 관아에서는 이들의 장부를 마련하여 1년에 포작인은 20필, 잠녀에게는 7~8필에 해당하는 많은 액수를 부과했다. 고역이 누적되면서 포작인들 중에는 조선초부터 가족을 거느리고 육지로 도망가는 현상이 빈번했다. 제주 여인들 사이에서 ‘홀로 살지언정 포작인의 아내는 되지 않겠다’는 말이 나돌았지만 결국 부족한 진상 품목을 채우기 위해 잠녀들이 전복을 채취하는 포작의 일까지 해야 했다.

오죽하면 제주 속담 중에 ‘여자로 나느니 쉐로 나주(여자로 태어 날 거면 차라리 소로 태어난다)’는 표현까지 있었을까.

출륙금지령에도 제주 유민은 줄어들지 않는다. 제주 해녀의 뭍 이주 기록은 『성종실록(成宗實錄)』(1447년), 『학성지(鶴城誌)』(1749년), 『규합총서(閨閤叢書)』(1809년), 『경상도 울산부 호적대장(慶尙道 蔚山府 戶籍大帳)』등에 남아있다. 해녀를 비롯한 제주 유민들은 경상도와 전라도에 집중적으로 거주했는데 『경상도 울산부 호적대장(慶尙道 蔚山府 戶籍大帳)』옛 한라산의 이름을 딴 ‘두모악’이란 제주 유민 마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를 증명한다. 제주 유민 자체가 인정되지 않던 시절 이들의 거주를 허용하는 일이 가능했던 이유 역시 진상에 있다. 바다를 이용한 지리적인 인접성과 더불어 당시 진상 관련 기록을 보면 동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미역 진상이 활발했고, 울산 지역까지 전복을 진상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성종실록> 262권, 성종 23년(1492) 2월 8일 기유 7번째 기사, 국가기록원. 이 기록은 두모악이 제주도의 별칭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울산 대곡박물관

<사진설명 계속 - 연해(沿海)에는 두무악(頭無岳)이 매우 많은데, 제주(濟州)의 한라산(漢拏山)을 혹 두무악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세속에서 제주 사람을 두무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두독야지(頭禿也只)라고 쓰기도 했다>


제주 해녀들이 물질하다 나와 쉬는 풍경. 1922년께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바다 지나면 육지로 구나


개화기·일제강점기 제주해녀들은 일본 잠수기선의 남획으로 제주 어장의 황폐화와 고가로 일본에 수출하는 우뭇가사리 등의 해조류 채취를 위해서 출가했다.

1876년 당시 조선이 일본과 맺은 한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 이후 일본 잠수기업자들이 들어오면서 맨손으로 소라·전복을 채취하던 해녀들의 입지는 좁아지기 시작했다. 일본 잠수기선의 남획으로 작업할 수 있는 해산물 양이 줄어들면서 수입이 줄어든 해녀들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기회를 따라 제주 바깥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 특히 19세기 후반 고가에 거래되던 천초 등 해조류 가치 상승이 출가의 중요한 동기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의 천초가 일본으로 수출된 것은 1877년부터이고, 1893년 오사카 비단제조상들과 상인조합에서는 조선산 가사리의 품질향상을 도모하며 부산 총영사관에 문서를 보내 가사리 품질검사를 의뢰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당시 천초의 주요 쓰임은 비단의 광택을 내기 위해 바르는 원료였고 일본산(日本産)에 비해 품질이 좋아 일본 비단 제조상들이 선호했다고 한다.


* 모든 글은 직접 취재와 자료 조사를 통해 쓰고 있습니다 [무단 복제 및 도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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