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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May 08. 2023

첫 출가물질 '초용', 새 이름을 얻다

아기상군해녀 해운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다 : 제주해녀 출가사 2

△1930년대 제주해녀들이 물질 나가는 모습. 사진으로 보는 제주 옛 모습 발췌



지난해 말 기억이다. 20여 년 매달렸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기회를 기다리며 논문작업을 하던 참이었다. 별것 아닌 데도 가슴이 울렁거리고 가급적 별일을 만들지 않았던 일종의 침묵기에 어쩌다 주말 연예 프로그램 하나에 꽂혀버렸다. 추억 속에 남은 물건을 ‘복원’하는 프로젝트에 낡은 카세트테이프 하나가 등장했다. 30년 돌아가신 아버지의 목소리가 담길 유일한 물건은 당장 카세트 플레이어가 없어 들어볼 수 없을 만큼 세월을 탔었다.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그 안에서 ‘음성’이 나왔을 때의 그 감정이라는 것이,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싶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오성찬 선생이 기증한 카세트테이프 521점.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17살 부산 목도로 가다     


오성찬-그때가 육지 간 게 처음이꽈.
강예길-어이구.(그게 아니라는 억양)
오성찬-처음엔 몇 살에 갔수과.
강예길-처음 17살에부터 여기 경상도. 부산, 부산 알더래. 부산 울산이렌도 하고 경상도라고도 하고. 울산 월산면. 아버지가 배임자, 배 해노니까 물건을 부산오랑 폽(아래아)갑께 우미랑 도박. …삽십 울산 강산에 오륙 따라서 삼십삼포구에 ***(배 이름 추정)생이랜 해났수다. 초용(첫 출가물질을 이르는 제주어)으로 갔덴 허영예.     


더 오래된 카세프테이프에서 디지털 음성 파일로 갈아 타고 오늘로 걸어 나온 강예길 할머니의 목소리가 한마디 한마디 타임리프 스위치를 눌렀다 뗐다 한다.

부산에서 태어난 강 할머니는 다시 부모를 따라 고향 제주로 돌아왔다. 강 할머니의 ‘공식’ 출가물질은 17살 되던 해 1914년 부산 목섬으로 간 것이었다. 당시 소섬(우도)과 성산 시흥, 구좌 김녕에서 온 해녀배 23척이 다같이 목섬 주변에 정박해 작업을 했다고 기억했다. 선주였던 아버지가 부산으로 가 일본 상인과 일본 상인과 거래하는 객주에게 우뭇가사리를 팔았다고 했다.     

부산 목섬은 지금의 영도를 말한다. 영도는 신라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절영도(絶影島)라고 불렀다. 과거 나라에서 경영하는 국마장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키운 말은 워낙 빨라 달리면 그림자(影)가 끊어져(絶) 보이지 않았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조에 신라 33대 성덕왕이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의 공을 치하해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에게 절영도 명마 한 필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에도 926년에 후백제왕 견훤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절영도산 명마 한 필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꽤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공도 정책에 무인도인 채로 조선시대까지 별다른 지명 없이 동래부 소속의 부속 도서로 존재하던 상황은 1881년 절영도진이 설치되면서 바뀌었다. 현재 영도구에 있는 지명의 상당수는 1885년 절영도 첨사를 지냈던 임익준이 중국의 전설에 등장하는 장소를 따서 지었다.      

1890년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시 산지항의 풍경. 사진으로 보는 제주 옛 모습 발췌
1920년 부산 영도 도선장. 영도구청



#역사와 맞물린 해녀 출가     

일제강점기 부산항 일대가 개발되면서 섬이었던 영도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일본인들은 이 곳을 ‘말을 키우는 목장의 섬’이라는 뜻의 마키노시마(牧ノ島)(목도)라고 불렀다. 1934년 영도대교의 개통으로 교통이 편리해져 부산 시가지의 일부가 됐고, 해방 이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절’자가 빠지고 영도가 됐다.

지금의 영도를 만든 시작점에 제주가 있었다고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산 영도에 제주 사람들이 처음 정착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124년 전인 1885년이라 한다. 당시에 구좌읍 출신의 김완수씨가 처음으로 정착했고, 1900년 초부터는 부산 영도와 경상남도 일원에 제주 마을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1915년 무렵 경상남도 지역의 해녀 수만도 17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진다.

19세기말 제주해녀의 출가는 일본인 ‘잠수기 어업자’의 제주도 진출에 따른 연안바다의 황폐화와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인 어업자들의 한반도 부근 연안에서의 어업 활동이나 이주는 ‘한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1876년) 이후 적극적으로 이뤄졌다. 갑오경장(1894년)을 전후하여 우리나라 연안에서 생산한 해조류의 효용도가 높아지면서 부산 일대에 해조상이 많이 생겼고, 해조상들이 직접 제주로 와서 해녀들을 모집해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일본에서 아마를 데려와 작업하는 것보다는 노동비 투입 대비 효용이 높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와 개항기 부산 지역에는 우리나라의 수산물을 매집하여 일본에 수출할 목적으로 일본인 자본가들이 설립한 부산수산회사가 있었다. 1889년 문을 연 부산수산회사는 1903년에는 부산 어시장을 개장해 종래 일본에 대한 수산물 수출 사업 외에 본격적으로 조선 내에서의 수산물 매매·유통 사업을 벌였다. 이후 어장 조사, 수송, 수산물 제조 가공, 수산물 냉장용 제빙 및 판매, 자금 대여 등으로 사업 영역을 계속해 확장했고 남해안 거문도 등에 출장소를, 통영에는 지점을 설치했다. 부산수산회사는 어획된 수산물들은 부산 어시장을 통해 조선 내부 시장에 유통하는 한편으로 일본, 만주로도 수출했다.     

1915년 부산 중구 남포동 부산수산회사 어시장. 한국저작권위원회 DB
일본 비단의 상징 '니시진오리' 전시장 모습


#파도만큼 일렁였던 자본 흐름 타고


부산수산회사를 중심으로 일본 상인들과 우리나라 객주들이 모여들었고 해조류 수요가 늘어나면서 이를 채취할 노동력 확보를 위해 제주해녀의 출가를 유도하기도 했다. 

 일본은 1910년 한일병합 이전 우리나라 천초 어장을 주목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천초가 일본으로 수출된 것은 1877년부터였다. 당시에 가장 수요가 많고, 가격이 비쌌던 해조류로 식재료이기도 하지만, 일본 비단 산업에서 비단의 광택을 위한 원료로 사용되었다. 1893년 오사카 비단제조상들과 상인조합에서는 조선산 가사리의 품질향상을 도모하며 부산 총영사관에 문서를 보내 가사리 품질검사를 의뢰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당시 천초의 주요 쓰임은 비단의 광택을 내기 위해 바르는 원료였고 일본산(日本産)에 비해 품질이 좋아 일본 비단 제조상들이 선호하였다. 구체적인 기록은 찾지 못했지만, 일제강점기 부산 영도에는 이들 중개인이 거점으로 삼아 활동했던 숙소 성격의 건물이 있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1929년 동아일보가 보도(6월17일자 2면)한 한 기사에서도, 경상남도 앞바다의 어획고는 일본인들의 주요 어장이었고, 이곳의 어획고는 조선의 1/3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속에 ‘제주도 해녀’가 왕래하며 출어하였고 그 인원이 1000명 가량이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동아일보 1929년 6월17일자 2면. 동아일보 DB



참고 자료

- 김정하·이종현, 「영도 해녀’에 대한 현장론적 연구」, 『人文社會科學論業』 16호, 2008, 부산제주도민회 제12대 회장 김길두(93세)씨 인터뷰.

- 藤永 壮, 「1932年 濟州島 海女의 鬪爭」, 홍성목 역, 『「제주도」의 옛기록』, 제주시우당도서관, 1997. 

- 부산향토문화대전. 1876~1910년 시기 부산 지역 역사를 통칭하는 기준. 개항기는 아직도 봉건 체제였던 조선 사회가 근대 무역을 통해 세계 자본주의와 교류하면서 근대 사회로 전환을 모색해 가던 시기이다. 동시에 제국주의 서구 열강과 청 및 일본과 같은 외세에 의해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적으로 주권을 위협받던 시기였다. 이 시기 부산은 일본과 교역을 통해 성장했다. 부산항 개항 이후 1880년 5월 원산항이 개항할 때까지 4년간은 부산항이 외국과의 무역을 독차지하였다.

- 부산역사문화대전. 김호걸·황무원·윤일이·김창일, 『부산 영도 민속조사 보고서』, 국립민속박물관·부산광역시, 2020.

- 김수희, 「日帝時代 濟州 海女의 海藻類 採取와 入漁 , �濟州海女: 抗日運動, 文化遺産, 海洋文明』, 제주해녀박물관개관기념 국제학술회의 자료집,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위원회, 2006, 

- 고행섭 전 부산제주특별자치도민회 총괄부회장 인터뷰(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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