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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May 15. 2023

“다대끗을 넘어가민 부산 영도 이로구나”

아기상군 해운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다 : 제주해녀 출가사3


해녀노래에 담은 바닷길 서사     


바다를 건너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지금은 ‘눈 깜짝’하면 오르는 가격에 툭하면 보이지 않는 좌석 같은 야속한 항공권 탓을 한다면 화석연료 여객선이 투입되기 전까지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었다.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당시 제주해녀들이 어떻게 바다를 건너 출가했는지는 해녀노래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이성훈 박사(전 숭실대 겸임 교수)를 비롯해 해녀노래를 살펴온 연구자들의 논문이나 저서들을 정리하면 해녀노래는 해녀들이 돛배를 타고 뱃물질 하러 오갈 때 노를 저으며 불렀던 노동요다.

제주지역 내에서도 불렸지만 출가한 해녀들의 입으로 전해져 한반도 전역에서 전승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료들은 꽤 흥미롭다. 구전(口傳)되는 특징으로 해녀로서의 마음가짐과 작업방식, 과거 출가했던 지역 사정과 경험에 따라 각기 다른 내용이 나온다.

단순히 노동요의 영역이라고 보기에는 자료 가치가 훨씬 크다. 1971년 성읍민요와 함께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주민요'로 전승되던 해녀 노래는 이후 1989년 도지정 무형문화재 1호로 별도 관리를 받게 됐다. 1993년 보유자던 구좌읍 행원리 고 안도인 할머니가 작고한 이후 한동안 전승체계를 위협받았지만 2005년 김영자·강등자 할머니가 보유자로 지정되면서 한시름 놨다. 2006년 문을 연 해녀박물관을 통해 2007년부터 어업노동요 전수교육이 이뤄지는 등 전승 작업이 진행됐다. 다만 노동을 하며 불렀던 환경이 바뀌면서 공연 등을 통해 맥을 잇고 있는 상태다.

서재철 사진
제주해녀박물관 상설 공연 모습

부르며 익히던 '통과의례'


제주에서 '해녀노래'하면 가장 먼저 '이어도 사나'로 불리는 해녀 노젓는 소리를 떠올리게 된다. 명칭도 생각보다 다양하다. 해녀 노젓는 소리, 해녀질 소리, 물질 허는 소리, 네 젓는 소리, 이엿싸 소리, 잠수소리 등 작업과 연관해 불렀다. 가창 형식은 크게 사설을 메기는 선소리와 뒷소리 후렴으로 구성되는 선후창의 형식, 혼자만의 구연으로 이뤄지는 독창 형식, 선소리와 뒷소리 모두 의미 있는 사설을 부르는 교창 형식 등 세 가지로 나뉜다.

여기까지는 일단 '책대로'다. 해녀 노래는 '바다'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노동을 하는 동안 저절로 익히고 불리던 '통과의례'라는데 의미가 있다. 실제 해녀들을 만나면 이런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지금처럼 악보를 보거나 음정을 배웠던 기억은 애당초 없다.

약속한 것처럼 '출가물질을 갔다가' '상군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하는 전제를 깐다. 물질이라는 공동 노동을 통해 생성·구전되고 일정 지역에서 공유되는 과정을 통해 일부는 다듬어지고 또 각색되지만 유사한 가락이 공유된다. "이어싸나~ 이어싸나~"하고 내뱉는 사이 '니벨룽의 대서사시'를 능가하는 해녀들의 역사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주특별자치도 해녀박물관이 정리한 제주해녀노래집 「이여 이여 이여도 사나」에서 사설을 내용별로 정리한 것을 보면 △노 젓는 작업과 상황 △물질작업 △출가물질 △생애담 △신세한탄 △자강과 근면 △자연에 합일·동화 △기원 △사랑 △ 금전 등 경제 △가족(부모·형제·자식) △이어도까지 다양하다. 제주의 800여수가 넘는 민요 중 대표적인 노동요지만 그 이상의 평가를 받는 것도 제주의 역사를 가장 낮은 위치에서 구구절절 옮겨냈다는 데 있다.

고 김영돈 제주대 교수도 「한국의 해녀」를 통해 민요의 '요(謠)'가 노래만이 아니라 소문·이야기라는 점을 언급했다. 해녀라는 여성 중심 공동체 외에도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과 살아온 이야기, 전설 따위가 흥얼흥얼 노랫가락에 실려 오늘에 이른다. 해산물 채취의 어려움, 노 젓는 노동의 힘듦, 고향 제주와 자식에 대한 그리움, 신세 한탄과 인생무상까지 없는 것이 없다.     

삶과 생활, 인생무상까지


"유리잔을 눈에 끼곡/테왁을 가슴에 안고/무쇠 비창 손에 차곡/지픈 물속 들어보난/수심 전복 하서라마는/내숨란 못 하여라" 이른바 작업의 순서다.

물안경을 눈에 끼고, 테왁을 가슴에 안는다. 무쇠 빗창은 손에 드는데 때로는 손목에 걸어 불편함을 덜었다.

"등도빗창 홀목에 걸어" (등도빗창 손목에 걸어) 작업을 할 때 손으로는 물을 헤집고 발을 연신 차대는 것으로 깊은 바닥까지 내려간다.(앞발로는 허우치멍/뒷발로는 거두치멍)

깊은 물 속 들어가 보니 전복은 많지만 그에 비해 숨이 짧다는 것은 상기 시킨다. "앞름은 가작 가치/불어나온다 뒷발로랑/뒷름은 가두잡아/이화넝창 가고나보자/부모돌랑 돛 들어라/물질하라 물질하라" 앞바람이 바로 불어오니 물질을 하기 위해 돛을 단다. 절대 혼자 작업은 않는다. 노래에서처럼 부모와 함께 나가거나 적어도 둘 이상 짝을 이뤄 바다에 나간다.     

정석은 없는 대신 변칙이 허용된다. 소리 좀 한다는 해녀들에게서 조금씩 다른 사설이 나온다. 덕분에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당시 사정을 구구절절 알 수 있다. 어디까지 출가 물질을 갔는지,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는 것도 사설에서 찾을 수 있다. 한라산을 등에 두고 출가를 하면서 어디 어디를 갔는지 노랫가락에 담았다. 고 김영돈 제주대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199편의 해녀 노래 가운데 출가물질과 관련된 노래가 64편으로 전체의 32%를 차지한다. 출가 나가면서 노를 저으며 부르는 노래가 29편이나 된다.

사설 속에 진도, 울산, 목포, 부산, 군산, 충남, 인천, 한강(서울), 강원도 금강산까지 등장하고 '오사카 동성구 12번지'하는 비교적 자세한 일본 주소도 나온다. 노를 젓다 부러지거나 하면 선흘곶 등 중산간을 누볐고 닻줄 따위가 망가지면 부산·인천에서 조달했다는 내용도 있다. 손목이 부러지거나 하는 큰 부상을 당하면 '병원장'이 있는 부산으로 향했다.

민요패 소리왓 공연 모습


1960년대·북촌리 포구. 북촌리(조천읍)해녀들이 다려도에서 뱃물질을 하려고 풍선에 몸을 싣고 있다.


해녀노래 사설로 재현한 부산 영도 바닷길


섬을 향해, 섬을 등지고 '영도'로


강예길 할머니가 부산 등 경상도 일대로 출가 물길을 다닐 때는 돛을 단 풍선을 이용했다. 노젓는 소리를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노랫가락은 구성지지만 14일 이상 걸렸던 험한 뱃길이다. 어디를 거쳐 어디로 갔는지 짚어보자.     

고 김영돈 제주대교수가 제주시 삼양동 장갑생 해녀로부터 채록한 제주해녀 출가길의 뱃노래 사설이다. 당시 제주해녀들의 대표적인 국내 출가 대상지였던 부산 영도로 가는 이동 경로가 꽤 구체적이다.

제주도 성산항(성산 일출봉)에서 출발하여 전라남도 소안도(所安島)·완도(莞島)·신기도(薪智島)·금당아(金塘島)·지누리대섬(未詳)·나라도(羅老島)·돌산(突山島)과 경상남도 남해(南海島)·노양목(露梁海峽)·사랑도(蛇梁島)·지제장심포(巨濟島 知世浦 長承浦)·가닥동끗(加德島)·다대끗(多大浦)을 거쳐서 부산(釜山) 영도(影島)에 닿는다.

돛배로 이동할 때는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곳을 선택했다. 발동선에 이어 제주-부산 항로가 개척되면서 이동 경로와 시간에 변화가 나타난다. 기선을 이용하여 부산 방면으로 갈 때는 소안도를 경유하지 않고 거문도를 경유하였고, 목포 방면으로 갈 때는 거문도 대신 소안도나 추자도를 거쳐 이동했다는 것이 관련 연구자들의 의견이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총독부관보』 1915년 4월 14일 정규호 806호 17~18면 명령항로 정기발착일시 인가(4~6월)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관보』 1915년 4월 14일 정규호 806호 17면

** 모든 글은 직접 취재와 자료 조사를 통해 쓰고 있습니다 [무단 복제 및 도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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