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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Jun 16. 2023

“그 때는 죽지 않으면 살기로 한 것이니…”

제주 아기상군 해운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다 : 제주해녀 출가사 4

↑ 표지 사진 국가기록원 소장. 1957년 촬영


장리석 화백 '해녀들'(1968년 작) 작품 왼쪽 하단에 해녀가 아이 젖을 물리고 있고 동생을 업고 나온 소녀가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원정 출산’ 단어가 불러온 기억


지역문제를 얘기하면서 ‘원정 출산’이란 말이 종종 등장한다. 슬프면서도 씁쓸한 단어다. 우리나라에서 원정 출산이란 공공연하게 쓰이게 된 배경으로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를 지목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깊게 들여다보면 그 역사는 훨씬 더 길다. 

사실 원정 출산은 19세기 영국에서 흔한 일이었다. 식민지에 파견된 영국 관료들이 자녀의 출생지를 식민지가 아닌 영국 본토로 등록하기 위해 출산 기일에 맞춰 일시 귀국하는 경우가 빈번해지면서 원정출산 논란이 불거졌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대 초반 들어서면서 해외 국적 취득 목적으로 원정출산에 나서는 일이 신문지면에 오르내렸다. 해석도 분분했다. 민주화운동  586세대와 학력고사 경쟁에 휘둘렸던 X세대(1970년대생이면서 90학번대)의 중간 지점에서 ‘내 아이만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방아쇠가 됐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특히 남자 아이의 경우 병역 면탈이 가능한 조건을 챙길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 기준으로 1000~3000만원의 통상체류비 등을 감수했다고들 했다. 이것이 상대적 박탈감이란 사회 문제로 이어졌고 원정출산으로 이중 국적을 획득하더라도 우리나라 병역의무를 마치지 않으면 한국 국적을 포기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의 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최근의 원정 출산은 인구감소, 지방소멸 등의 문제와 맞물려 등장한다. 애를 낳을 병원이 없는 ‘분만 사각지대’가 사회 문제가 되면서다. 보건복지부와 통계청 자료를 보면 전국에서 분만이 가능한 산부인과는 2021년 481곳이다. 2004년 1311년, 10년 전인 2011년 777곳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현저하게 줄었다. 원인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다. 출생아 수 감소, 낮은 의료 수가, 의료사고 부담 등으로 산부인과 개원은 줄고, 폐원을 늘어나면서 눈물의 원정 출산을 하고 있다는 상황이 답을 구하고 있다.

서재철 사진. 물질 나가기 전 아이 젖을 물리고 있는 해녀 모습(1968년)

만삭 보다 힘들었던 배고픔


원정 출산이란 말이 더 따끔하게 들리는 것은 과거 만삭일 때도 물질을 하다 배 위에서 아이를 낳고, 출산한 지 사흘 만에 다시 바다에 들어갔다는 얘기에 더해 ‘해운대’라고 불렸던 강예길 할머니의 삶이 맞물렸기 때문이다.

채록 내용 중에는 ‘외할아버지가 선주였다’는 대목도 나온다. 강예길 할머니의 아버지 역시 배를 가지고 있던 것으로 유추된다. 제주해녀 출가물질 첫 사례가 ‘1895년 경상남도’인 점, 강예길 할머니의 나이를 거꾸로 셈해보면 그 무렵 부산 해운대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들을 종합해 볼 때 강예길 할머니의 어머니는 만삭인 상태에서 꼬박 2주의 험한 뱃길을 감수해 출가를 감행했다.

강예길 할머니의 기억 속에도 남아있는 내용이다.     


강예길-야 물질 갈 땐 부산으로
오성찬-게난 만삭 때도 물질을 다닙니까
박정자-물질하당예 달수 차면 거기서 나고
오성찬-(딸 박정자씨에게 질문)외할머니 성함을 아시겠습니까
박정자-어머니 압니다
오성찬-어머니 이름이 무시거꽈
강예길-우리 어머니말이꽈. 현산옥이, 현가니까 현산옥이 마씸. 우리 아들이 쉰둘이난 돌아가신지가 지금 쉰두해라     


어떤 생활을 하게 될지 알지 못한 상태에서 출가한 지역에서 출산까지 했다는 사실은 당시 제주해녀의 열악한 작업 환경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해녀의 물질이 가정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다 부모나 공동체에서 배운 지식 외에는 출산 전후 관리에 대한 정보가 없였다. 바다는 물론이고 밭일을 하다가 아이를 낳았다는 얘기는 특별한 일 축에도 들지 못했다. 누구는 애 낳고 바로 물에 들어갔다 더라, 젖이 퉁퉁 불어도 바다에서 나오지 못했다 하는 얘기는 ‘지독하게 살았다’는 추임새를 동반했다. 모성보호 등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 때는 그랬다.

출가물질이라고 사정은 다르지 않았는데 양석봉 해녀(1930년생)는 제주여성특별위원회가 진행한 생애사 조사에서 “…난 그냥 나대로 낫주(출산). 육지서도 나대로 그냥 나고. 난 아기낭(아기 낳고) 3일 뒈난(되니까) 물질 허레 다녀서…그땐 죽지 안허믄 살기로 헌 거난 헌 거지. 하루라도 물에 안 들어 가믄 아기들 굶엉 죽을 건디”라고 구술하기도 했다.

이화자 해녀(1928년생)도 한국전쟁 이후 부산 영도에 살면서 물질을 하던 중 임신한 상태로 전라도 납섬으로 출가를 갔는데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물에 못 들어가 떨고 있는 자신을 선장이 바다에 밀어 넣어 고생했다는 기억을 털어놓았다.

이동 수단의 제약도 있었지만 모집 형태로 출가를 하면서 계약기간에 묶인 사정 역시 출가지 출산을 불가피하게 했다. 고학 해녀(1927년생)은 27살이 되던 해 거제 지심도(동백섬)에서 출가 물질을 했는데 울산 방어진 살던 고모가 찾아와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인솔자가 “계약으로 데려온 해녀는 가족이 와도 보내줄 수 없다”고 실랑이를 했었다는 경험을 전하기도 했다. 


서재철 사진. 물질을 하는 해녀들 모습(1974년 촬영)


독도 물질을 하는 엄마를 따라온 제주 아이들.

고달팠던 엄마와 해녀 사이


‘노동력’으로 시장에 투입됐던 해녀들이 마주한 현실은 잔혹했다.

제주도와 경상북도가 해녀로 연결되며, 또 최근 일본과 관계에 이런저런 변화가 나타나면서 다시 부상하고 있는 ‘독도’에서의 일화만 봐도 그렇다. 

10여년 전 다행히 생존해 계신 독도 물질 해녀들의 인터뷰를 할 수 있었고, 그 기억들을 조합해 '자발적'인 독도 물질은 1953년을 전후해 시작됐다는 사실을 정리했다.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혼란한 틈을 타 일본이 독도에 상륙하자 울릉도에 거주하는 민간인들과 울릉도 출신 국방경비대를 주축으로 독도의병대가 조직돼 독도 지킴이(1952~1956) 역할을 했고 그들을 도왔던 이들 중에 '잠해'가 언급되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지역 신문의 독도 관련 기사 등에도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1953년 최초로 박옥랑·고정순 등 4명과 1954년 김순하·강정랑 등 6명이 독도에서 물질을 했다. 이후 1955년 홍춘화·김정연 등 30여명이 독도 바다에 몸을 던졌다'는 기사 내용은 당시 독도 물질이 본격화됐음을 시사한다. 실제 1956년 이후에는 한해에 많게는 30~40명의 잠녀가 독도에 입도해 물질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기억'이라는 것이 벌써 50년을 훌쩍 넘었었다. 1953년 19살에 독도 물질을 했다는 박옥랑 할머니가 꼭꼭 묻어뒀던 기억을 꺼낸 것은 그로부터 무려 56년이 지난 2009년이었다.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1959년 독도 가는 발동선에 몸을 실었던 김공자 할머니도 이제 여든을 훌쩍 넘겼다.

울릉도에 비해서는 바다밭 텃세가 덜했던 터라 독도에 가기 위해 뇌물까지 썼던 때였지만 고생은 이루 말하기 어려웠다. 바로 옆처럼 보여도 섬과 섬 사이 바다 물길은 유독 험했다. 멀리 독도 우산봉 봉우리가 보이면, 반대로 울릉도 성인봉 끝이 눈에 들어오면 마음이 놓여 눈물이 날 정도였다는 얘기가 박힌다.


서재철 사진. 1978년 구좌읍 종달리에서 촬영. 해녀인 할머니를 따라나온 아이가 성게알 작업을 돕고 있다. 제주학연구센터  DB.


처음 제주 해녀들이 독도에서 작업할 때만 하더라도 물 사정이 좋지 않아 빗물을 받아 써야 했다. 목욕은 고사하고 빨래도 힘들었다. 물을 저장하는 시설이 만들어진 것은 1960년대 들어서였다. 그런 사정 속에서도 아기업개까지 데리고 원행을 나섰던 이도 있었다고 했다. 출가한 상황에 어린아이를 맡길 곳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제주에서 독도까지의 이동 경로는 만삭의 어머니 만큼이나 돌쟁이에서부터 서너살 아이한테도 힘겹고 위험했다. 

그래도 내 눈이 닿는 범위 안에서 아이를 돌볼 수 있다는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제주4.3과 한국전쟁 광풍이 몰아쳤던 시기 밀항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해녀들의 사연들 속에는 젖먹이 입을 틀어 막으며 몰래 바다를 건넜는데 나중에는 아이가 울지 않더라는 상처, 아이를 두고 일본에 간 뒤 생이별을 했던 일들이 아직까지 아물지 않고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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