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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Jul 18. 2023

바다 건너에서 만난 동향의 끈끈한 정(情)과 고래고기

제주 아기상군 해운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다 : 청진항의 기억 2

△ 해녀들이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고 있는 모습. 출처 한국정책방송원. 한국저작권위원회.


우리나라 동해는 과거 고래 개체수가 많아 경해라고도 불렸다. 사진은 멸종위기의 한국계 귀신고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러시아,일본 포경회사들이 대량 포획으로 개체 수가 급격히 줄었다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의 시작점

고래잡이와 관련한 자료를 부지런히 뒤져봤지만 청진항과 관련한 내용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당시 시대 상황이 그랬으니 일부 이해는 간다. 

1900년대 초 한반도 근해에서 포경업을 주도했던 것은 일본이었다. 동양어업주식회사와 나가사키포경합자회사, 일한포경합자회사가 포경과 관련한 거의 모든 권리를 장악했다.

일본수산주식회사의 전신(前身)이었던 동양포경주식회사도 1910년 1월 조선총독부로부터 거제도를 거점으로 한 포경지 허가를 받아 한반도에서 근해 포경을 시작했다.

1913년에는 울산·거제도·통천 근해, 1914년에는 울산·거제, 강원도 통천군, 함경도 북청군, 1916년에는 전라남도 대흑산도 근해로까지 포경 조업 영역을 넓혀갔다.

일본 포경회사들은 말 그대로 거리낌 없이 ‘고래사냥’에 나섰다. 당시 일본 포경회사들의 고래잡이는 ‘포획’(捕獲)이 아니라 ‘대학살’(大虐殺) 수준이었다. 일본포경협회의 자료를 보면 1911년부터 1944년까지 한반도 근해에서 포획한 고래는 6647마리에 달한다. 1903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 포경회사들이 잡은 고래는 모두 8259마리, 10마리 중 8마리는 한반도 근해에서 잡혔다는 추산이 가능하다. 심지어 1908년부터 1910년까지 고래 포획에 대한 통계 기록은 없다, 이를 감안하면 당시 당시 일본 포경회사들의 고래잡이가 ‘포획’(捕獲)이 아니라 ‘대학살’(大虐殺) 수준이었다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포경 마리수가 70두로 예년보다 불황이라는 내용을 담은 동아일보 1925년 1월 28일자 기사. 동아일보 아카이브.


#노란눈 양국 포경선의 비밀


강예길 할머니의 기억 속 ‘노란 눈에 덩치가 큰’ 서양인들이 탄 포경선은 어떻게 우리나라 동해에 있었을까.

일본이 한반도 근해 포경업을 장악하게 된 배경에는 러일전쟁 이후 맺은 포츠머스조약(Treaty of Portsmouth)이 있다. 일본은 이 조약으로 조선(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갖게 됐고 조선을 강제병탄한 후에는 한반도 연근해 안의 어업권을 일본인들에게 넘겼다. 포경허가 역시 일본포경회사들에만 한정시켰다.

일본 포경회사들은 주로 동해에서 벌이던 고래잡이를 서남해안으로 확대해 실시했다. 이 결과 서남해안 일대의 포경선 수가 동해안 일대에서 고래잡이를 하던 포경선 수 보다 많아지게 됐다.

구한말 조선에 머문 미 해군 중위 조지 클레이턴 포크 관련 자료들 속에 흥미로운 얘기가 등장한다. 서양에 거북선을 처음 소개한 사람이자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 유진 초이의 모델로 알려진 그는 대동여지도를 들고 당시 조선의 구석구석을 살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기록 속에 고래잡이 배가 등장한다. 한국, 정확하게 조선과 미국의 유쾌하지 않은 인연은 1882년 조미통상조약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에 개항(1880년)된 원산에는 일본인 마을과 조선인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고, 부산에서처럼 미쓰비시사가 진출해 있었다. 당시 그 지역에 미국인의 등장이라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있었다.

조미통상조약보다도 훨씬 앞선 1854년 6월 26일,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미국 청년 4명이 원산에 발을 딛는다. 이들은 1854년 6월 13일 코네티컷의 뉴 베드포드 New Bedford 항에서 고래잡이배(포경선) '투 브라더스 Two Brothers' 호에 승선한다. 고래기름의 가치가 높았던 시대배경 아래 고래잡이는 큰 돈을 버는 수단이었다. 배는 출항한 지 1년만에 일본 홋카이도에 도착했고 일본 혼슈와 홋카이도 사이의 해협을 통과한 후  조선 동해로 진입했다.     

덩치가 크고 털이 복슬복슬 난 서양사람들이 미국인인지 러시아인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할머니의 기억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는 증거로 활용할만한 내용이다.


일제강점기 포경 모습. 일본인들이 동해안에서 고래를 잡아 해체하고 있다. 울산 등 동해안에는 고대로부터 고래가 흔했다. 사진 수원광교박물관
제주해녀 물질 작업. 석남 송석하(1904~1948)가 수집한 사진 자료로‚ 아키바 다카시(1888~1954)와 아카마쓰 지조(1886~?) 촬영.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이 먼데까지 제주에서 왔구나


이에 더해 ‘그 배에 제주 사람이 타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그래서 고래잡이에 대한 인상이 더 깊고 오래 남은 듯 싶다.     

청진 물질을 간 해녀들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열심히 했다. 고래잡이 배가 들어온 현장도 피하지 않았다. 서로 주고 받는 억양이 특이하다 보니 선원이 먼저 말을 걸었다.

고향을 떠나고 보면 동향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끈끈한 연대가 형성된다.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고래고기를 먹었던 내용이 비교적 구체적이다.     

“그 때 배에 제주사람 하나 올랑 제주서 해녀 왔다고 하니까 붉은 고기를 여나믄 토막을 줘서…. 신흥리 무신 동네 사는 사람이우다 해신디 부산 오랐당 고래잡이 배에 올랐수다 하더라고. 이중에서 맛좋은 괴기우다 해서 먹어봤주. 그냥은 막 소고기 닮아서 썰어서 반찬을 해 먹어도 맛좋고 삶아서 돼지고기 먹듯이 소금 찍어서 마늘 파 넣어 국 끓여서 먹고. 펀펀 노린내도 없고. 13명이 사흘이나 먹었다 아무 내도 안나고” 
(그때 포경선에 제주 사람이 하나 있었다. 제주에서 해녀가 왔다고 하니까 고래고기를 몇 토막 나눠줘서 먹었다. 신흥리 어느 동네 사는 사람이라고, 부산에 나왔다가 고래잡이배에 탔다고 하더라. 그래도 이중에서 맛이 좋은 부위라고 일부러 챙겨줘서. (어떻게 먹는지도 모르고 일단 고기라고 받았는데) 그냥 보기에 소고기랑 비슷해 보여서 썰어서 양념 반찬을 해서 먹어도 맛이 좋았고 돼지고기 먹듯이 소금에 찍어서도 먹고 마늘이랑 파를 넣어 국으로 끓여도 먹고. 고래 특유 냄새같은 것은 없었어. 해녀 13명이 사흘이나 먹었을 정도였어)


1920년대에는 제주 서귀포에도 고래공장이 있었다고 한다.제주전통문화연구소, 『일제시대 제주도 사진자료수집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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