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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Jul 24. 2023

"그 바다가 깊다한들 제주해녀가 못할 게 무어 있나"

제주 아기상군 해운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다 : 청진항의 기억 3

△ 해녀들이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고 있는 모습. 출처 한국정책방송원. 한국저작권위원회.


제주해녀 작업 모습(1951.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그 시절 청진 고래잡이와 제주 해녀들의 출가(出稼)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

다시 강예길 할머니의 기억으로 돌아가 보자. 강예길 할머니 일행이 청진을 근거지로 삼았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일과 자본, 사람이 있었던 때문으로 유추할 수 있다. 할머니의 얘기 중 ‘청진’이 배경으로 등장한 내용이 꽤 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후 전개되는 할머니의 파란만장 출가 스토리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 때 상황을 기록한 자료가 없는 상태에서는 관련한 정보를 조각조각 이어 살펴보는 것 이상의 방법이 없지만 이런 작업을 통해 당시 시대상과 연관한 보다 입체적인 접근이 가능해진다. 마치 장편 드라마의 네다섯 회차는 거뜬히 만들어진다.

강 할머니가 청진 출가 물질을 했던 시기는 1920년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1920년대는 역사적으로 일제의 사회·경제적 수탈이 심화했던 시기로 출가한 해녀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대신해 작업할 지역을 찾아 이동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청진은 1913년 일제에 의해 최대 철광석 산지인 무산광산이 개발되면서 일본은 물론 중국 자본도 유입되면서 도시가 성장했고 자연스럽게 경제활동도 활발해졌다.


강 할머니가 닷새나 기계배에 의지해 부산에서 청진까지 간 배경에는 ‘미역과 성게 가격이 좋’았던 사정이 있다. 부산이나 울산 출가 물질 역시 미역과 우뭇가사리 작업을 위해서였다. 그 것만으로는 큰 돈을 들여가며 바다를 건널 이유가 부족하다. 그래서 다시 돈을 벌 수 있는 바다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수온이며 여러 환경이 다르다 보니 조금 더 북쪽으로 이동하면 이전과는 좀 다르지만 돈을 벌 수 있었다. 제주해녀 처럼 해산물 등을 채취하는 능력이 출중한 인력도 없었다.

그렇게 3개월 정도 작업을 하기로 하고 현지에 집을 빌려 살면서 물질을 했다. 당시 현지 매매상 중에는 김녕과 대정, 가파도 등 제주 출신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무엇이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미역 등을 거래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생겼고, 해녀들의 능력을 활용하면 더 벌 수 있다는 사실이 지역에서도 자리잡았음은 분명하다.

동해는 물이 제주에 비해 꽤 깊었다. 물도 찼다. 4월에도 눈이 있었던 환경 속에서 미역은 한 달 정도 작업을 했고 나머지는 낚시 미끼용 홍합을 채취하는 일을 했다. 성게도 벌이가 됐다. 모두 고된 작업량을 전제했다.     

“한 100명 갔자 물에 못 들어간 난. 아홉발 열발 한디 수심 재영 그 합저 배있는 데까지 해. 어떤 놈이 이런데 오란 ‘니네 100명 오라도 저 합저 조무는 좀녀가 없는디 니넨 어리석덴 이리 이 바당에 갔다놘네’ 영호(아래아)난 우리가 ‘깊어도 우리가 하쿠다’헹 배가 막 합저 잡젠 줄줄이 줄줄이 막 멥니께. 막 그냥 여기 섰다가 저기 섰다가 배가 줄줄이 우리배로 싣거주라 우리 배로 싣거주라”

”(물이 깊어서) 한 100명이 작업하러 가서도 못 들어갔다. 수심이 아홉발 열발 정도 해서 홍합을 채취해야 했으니까 쉽지 않지. 어떤 사람이 와서 ‘해녀 100명이 와도 합저 작업을 하는 해녀들이 없는데 너희는 어리석다(어리고 잘 모른다)고 여기 이 바다에 데려다 놨나 보다’고 말을 하더라고, 그래도 우리가 ‘깊어도 우리가 작업하겠다’고 하니까 홍합 작업하는 배들이 줄줄이 자리를 잡고 닻을 내려서는 해녀들에게 채취한 홍합을 우리 배로 올려달라고)          


1930년대 청진항. 자료사진
1930년대 청진항. 자료사진


홍합 작업은 3개월여에 걸쳐 진행했다. 성게도 많이 잡혔는데 강예길 할머니는 보통 해녀들이 하루 한 통 작업할 때 다섯 여섯 통씩 작업할 만큼 실력이 좋았다고 했다.

채취하는 것만 아니라 후작업을 하는 것까지 해녀들에게 맡겨졌다.     

“가루사탕 담아난 거 이십디게 왜정시대에. 그거를 비닐 깔아놘 알멩이를 물에 잘 씻어서 잔소금 채에 놔서 뿌리고 간즈메에 담아놘 일본 드레도 보내고 청진드레도 보내고. 잠녀들은 검은 성게가 들어갑니다. 그걸 전주가 다 골랑 간즈메 만드는 옆에 따로 골라놨다. 살이 검은 건 돈을 안줍니다. 그거 골라놘 반찬해 먹으라고 나눠줘서 젓 담앙 먹으면 들큼하고”

(일제 시대에 설탕을 담았던 큰 비닐을 깔고 물에 잘 씻은 성게알에 입자가 고운 소금을 뿌리고 통조림에 담아서 일본에 보내고, 청진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도 보내고. 해녀들은 잡은 것 중에 살이 검은 성게가 있는 데 그런 것은 전주가 따라 골라뒀다. 돈으로는 안 주고 반찬해서 먹으라고 나눠주면 젓갈을 담가서 먹었다. 그 맛이 달큰했다)     


1950년대 설탕 포장 작업 모습. 사진=CJ제일제당 제공
밀가루포대로 만든 물소중이. 제주해녀박물관 소장


제주해녀의 청진 출가물질은 일제강점기 후반에도 이뤄졌는데 1940년대에는 일본 서해안 항구들, 북해도의 삿포로(札幌)로부터, 하코다테(函館), 니가타(新潟), 시모노세키(下館), 오사카(大阪)까지 연결하는 항로를 확보했다. 일제가 세운 만주국(1931~1945) 수도 신경(新京), 현재 중국 지린성(吉林省)의 성도인 창춘(長春)을 연결하는 항로도 있었다.

2014년 진행한 제주해녀 생애사 조사 내용 속에도 청진이 등장한다. 심지어 부산 영도와 비슷하게 해녀들을 비롯해 제주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이야기다.

1950~60년대 물질 작업하는 제주해녀. 출처 제주해녀박물관

강은자 해녀(1935년생)는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해방되던 해인 1945년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1940년대 청진에 제주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는데 남자들은 고기잡이를 하고 여자들을 물질을 하면서 생계를 이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혼자 청진에서 강은자 해녀를 키우던 어머니는 제주 출신으로 상처한 남성과 재혼을 한다.

해방 후 혼란기에 강은자 해녀의 가족들은 기차를 타고 평양, 사리원까지 이동한 뒤 서해안을 따라 걸어서 남쪽으로 이동한다.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었지만 제주 출신에, 북에서 넘어왔다는 이유로 수용소 생활을 하고 가까스로 부산 영도에 있는 친척을 찾아 제주로 올 수 있었던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강은자 해녀는 한림읍 비양리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정확하게는 새아버지의 외가다. 철이 들어 어머니와 같이 비양도에서 물질을 배웠는데 끝까지 바다에 남은 건 강은자 해녀 뿐이었다.     


해방직후 한국을 빠져나가려는 일본인들이 밀항선에 타고 있는 모습. 출처 조선을 떠나며 : 해방이후 조선에 남은 일본인들의 삶 중

강은자 해녀의 기억에는 태평양전쟁 막바지 미군과 소련군이 번갈아가며 공습을 하고, 패전 후 일본 사람들이 떠나면서 벌어졌던 혼란과 죽은 일본사람들을 토굴에 묻는 모습을 봤던 일등이 남아있다. 제주로 오기 위해 돈을 구했는데 누가 볼까 뜨개실 실타래에 숨기고 이동했고, 장소를 옮길 때마다 하나씩 없어졌던 일도 기억에 남아있다.

비양도 생활도 그리 녹록치 않았다. 어린 동생들을 돌보면서 낮에는 물질을 했고, 물통을 만들기 전에는 마당에 웅덩이를 파고 빗물을 모아 두었다가 생활했다. 강 해녀가 육지물질이라도 갈라치면 어머니가 아프다고 편지를 보내 돌아오게 하는 일도 허다했다. 1959년 사라호 태풍에 배를 잃은 아버지의 빚도 물질을 해 번 돈으로 갚았고, ‘고기를 잡아도 산에 가서 잡을 팔자’라는 남편의 뒷바라지도 물질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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