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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Aug 07. 2023

그래서 해녀가 '밀수'를 했다

제주 아기상군 해운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다 : 바다에 의지한 삶의 갈래1


1952년 부산 남천동에서 해녀들이 미역을 채취하고 있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사진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영화 <밀수>가 깐 판에서 해녀를 본다. 사뭇 흥미롭다. 건너 들었던 얘기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참 묘하게 버무려진 것이 ‘맞다’고도 그렇다고 ‘틀리다’고도 할 수 없는 경계에서 입을 간지럽게 한다.

한창 상영 중인 영화 얘기를 굳이 꺼낼 생각은 없다. 어디까지나 원하는 대로 필요한 만큼 즐기면 되는 영역이라 ‘잘 보고 왔다’는 말로 정리한다.


영화 <밀수> 메인 예고 영상 갈무리

물건 대신 '물건'을 건지다

그래서 해녀 얘기만 해 본다.

영화의 배경은 1970년대 가상의 바닷가 마을 ‘**“이다. 슬쩍 등장하는 지도를 보면 ’서해 어딘가‘다. 영화적 상상력이란 게 그러하듯 일단 시작부터 정신을 단단히 붙들어야 한다.

해녀들이 물질을 하며 사는 것이 어렵지 않았던 마을에 검은 연기를 풍풍 뿜어대는 공장이 들어서고 난 뒤 전복이며 소라가 폐사하고 물고기도 허연 배를 드러내 죽는다. 먹고 살기 힘들어진 해녀들은 어느 순간 바닷속에 던져진 ’물건‘을 건져 올리는 작업으로 돈을 벌게 된다, 그래서 돈을 좀 만지는 얘기인가 싶지만 그 과정에서 가족을 잃고, 돈과 힘에 휘둘리는 현실이 등장하고 무엇보다 끈끈하면서도 단단한 해녀 공동체의 무엇이 작동한다.     

영화는 제작사 부사장이 전북 군산에 있는 어느 박물관에서 ‘1970년대, 해녀들이 밀수에 가담했다’는 짧은 기록을 접한 것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사실이다. 해녀들이 ‘장비에 의존하지 않는 작업법으로 정직하게 바다에서 삶을 일구는’일만 했다면 과연 지금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터다.  상군(영화 속에서는 ‘리더’)의 지휘에 따라 작업 여부가 정해지고 단체로 움직인다. 공장 폐수 등의 영향으로 바다 사정이 나빠지면서 물질만으로는 먹고살기 어려워지지만 쉽게 업을 버리지 않는다. 형편이 어려워진 해녀를 돕기 위해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남다른 의리의 영역 역시 담았다.

그 것을 제외하고는 솔직히 몇 번이고 ‘어머나’를 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동아일보 1959년 석간 3면에 실린 밀수 기획 기사


‘해녀가 밀수에 가담했다’는 내용은 1950년대부터 확인된다. 공식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공개된 사실이 그렇다.

1959년(단기 4292년) 동아일보는 밀수와 관련한 기획 시리즈를 연재한다. 그 첫 시작으로 ‘부산항’을 다루는데, 여기에 해녀가 나온다. 석간 3면에 실린 기사의 제목은 ‘도량(跳梁)하는 잠상배(潛商輩)들’이다. ‘3년간 적발된 것만 64억환’이고 ‘해상에 야시장을 이룬다’고 했다.

편집자 주만 봐도 당시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외래품에 대한 허영심이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국산품이 무색할 정도로 외래품이 쏟아져 들어오는 데 그 중 대부분은 밀수품이다. 4289년부터 4291년까지 3년 동안에 6300여건의 밀수 사선이 적발되고 관련자만도 근 1만명이나 되는데 3년간 밀수 누계(적발된 것만)보면 64억환이란 액수에 달한다. 그중에서도 밀수입은 62억환에 달하고 밀수출은 불과 2억환 정도인데 밀수입 품목을 보면 4할 정도가 직물이고 그다음은 사치품‧약품 등이다. 이러한 밀수 행위는 매년 감소되지 않고 계속 성행되고 있다. 밀수지역은 일본이 7할을 점하고 다음이 홍콩‧미국 등의 순서이다’     

부산항은 당시 기준으로 76년 역사의 우리나라 남단의 관문으로, 해방 후 국제항구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모든 현대식 시설을 갖췄다. 다양한 국적의 배가 오가고 가는 가운데 ‘밀수’수법은 나날이 교묘해졌다. 여기서 잠상배가 등장한다. 어두운 밤하늘에 불빛을 좆아 날아드는 여름벌레처럼 깜박거리는 ‘후랫슈’ 신호불 아래로 밀수배와 수십척의 전마선이 모여 해상 밀수품 야시장을 벌리는 장면이 지면에 펼쳐진다.

부산항 만의 일이 아니었던 것이 기사 내용에서만 여수항과 목포항, 마산항이 등장하고 김포‧여의도에서 밀수 행위를 적발한 사실이 확인된다. 부산항이 그 중 으뜸으로 지난 한 해 동안 부산세관에서 적발한 밀수사건만 652건이고 검거된 밀수범만 1000명이라고 집계했다. 밀수품은 59900여만환에 달하고 당시 부산세관범칙창고에 봅관충인 약6억환 어치의 물품중 재수출조건부공매를 7차례 진행하고도 낙찰안된 압수품 15만환어치가 약 3년간 방치되고 있다고 알렸다.

대량의 밀수품이 무역선이나 어선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데 세관 감시선이 노후해 총기까지 이용해 단속을 하는 소동도 있었다는 내용도 나온다. 말그대로 영화 같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을 옹호하는 기관원들이 끄나풀로 활동하고 전마선에 번호를 달아 감시하는 고육지책도 썼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는 지적도 아낌없다.

그 이유라는 것이 다름 아닌 해녀의 등장이다. 전마선 대신 방수천에 싼 밀수품을 바다에 던져놓고 해녀를 동원해 운반하면서 감시망이 뚫렸다. 이로 인해 해녀들이 매달 수명씩 밀수범으로 붙잡혀 들어갔다. 여기까지는 해녀들이 ‘일’을 돕다 변을 당하는 수준이었다.

영도 청학동에 밀수품을 거래하는 유명한 비밀 지하실이 있었고, 부산 외항을 통해 거제와 여수, 제주 등으로 밀수 루트가 바뀌기도 하고 등록된 ‘무역상사’를 이용해 거래한다는 풍문이 나돈다는 얘기도 확인했다.


동아일보 1975년 12월 27일자에 실린 '해녀밀수특공대 적발' 기사


해녀, 밀수특공대라고


그 이후 해녀와 밀수를 연결한 큰 사건은 1975년 12월 대서특필(?)된 ‘해녀밀수단’ 적발이다. 동아일보 1975년 12월 27일자에 부산지검이 대대적인 밀수 관련 수사를 벌인 끝에 ‘제주 출신 해녀와 그 친척들로 조직된 청학동 해녀 밀수 특공대를 적발’했고, 두목인 해녀 조복덕(49‧영도구 청학동 301)과 운반책 강남조(57), 판매책 박인남(56)씨 등 10명을 관세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공범 16명을 같은 혐의로 수배했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들은 같은해 12월 16일 밤 11시반경 청학동 앞 부산 해상에 정박중인 대일 화물선에 전마선을 타고 가 일제 텔레비전 100대(시간 1000만원)를 양륙했다. 이런 방식으로 지난 1970년부터 모두 5억여원 어치의 밀수품을 대일 화물선으로부터 받아내 팔아온 혐의가 적용됐다.

심지어 자기 조직 밑에 10여 명의 청년 특공대를 두고 외항선과 접선해 조직적인 밀수 행위를 했고, 청학동에 집단생활을 하며 비상망까지 설치해 이제까지 적발되지 않았다고 썼다.


물질 후 해변에 둔 바구니를 챙기고 있는 제주도 해녀들의 모습을 촬영한 1970년대 사진이다.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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