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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Aug 09. 2023

그런데 '해녀 밀수 특공대'가 있기는 했을까

제주 아기상군 해운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다:바다에 의지한 삶의 갈래2

영화를 방불케한 '육탄전'


재미있는 것은 그보다 앞서 중앙일보의 1975년 9월 8일자에 ‘해녀 밀수단’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당시 보도를 보면 부산 앞바다에서 ‘부산 앞바다에서 해녀로 구성된 여자 해상 밀수 특공대 4명이 일제 양장지 1500m, 티브이(TV) 10대 등 12종류 시가 2000만원 상당의 밀수품을 운반’하다 검거됐다.

이 과정에서 세관 직원들과 '육탄전'을 벌인 끝에 1명만 검거되고 나머지 3명은 바다로 헤엄쳐 달아났다. 붙잡힌 1명, 한숙희 해녀(34‧영도구 청학동 228)은 감시선에 뛰어 올라가 키를 잡고 감시선을 반대쪽으로 몰고 가는 등 저항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래서 해녀들이 먹고 살겠다고 나쁜 짓만 했는가 하면 중앙일보 1976년 10월 4일자에는 '경남 통영군 한산면 홍도 앞바다에 9월 24일부터 연일 마산세관 충무출장소에서 일당을 주고 고용한 30여명의 해녀와 잠수부가 바닷속 깊숙이 숨겨져 있는 싯가 1억원어치의 밀수품인 일본제 지퍼 40만개의 수색'작업에 투입됐다. 대일활선어수출선을 이용한 밀수단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방소포장을 한 밀수품을 바닷속에 던져둔 사실을 확인하고 회수작전을 벌인 것. 홍도 해변의 파도가 세고 수심이 깊어 난항이기는 하지만 회수작전 10일만에 시가 180만원 상당의 지퍼 9000개를 건져냈다고 했다.   


조선일보 1968년 4월 24일자 조간 2면 밀수(密輸) 소탕(掃蕩)을전개(展開)하라.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5대 사회악...밀수품의 변화


이왕 알게 된 사실을 좀 더 파본다면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은 밀수·도벌(불법 벌채)·탈세·폭력·마약을 ‘5대 사회악’으로 규정해 집중 단속을 벌였다. 이 가운데 밀수는 가장 악질적인 범죄로 꼽혔다. “망국적인 사치와 허영심을 조장시키며, 국가 경제를 파탄시키는 가장 악질적인 범죄 행위”(국가기록원 영상 자료)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당시 밀수는 국내에 부족한 물품을 조달하는 방편으로 자리를 잡았고 시대 흐름을 반영했다.

1950~1960년대에는 우산, 재봉틀, 화장품 등 생필품을, 고도성장기인 1970년대엔 텔레비전, 양복 옷감부터 고급 시계, 금괴, 밍크코트, 다이아몬드 등 사치품으로 영역이 확대됐다.

이로 인한 탈세 등의 문제에 더해 경기 부양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국산 최초 라디오 A-501이 1959년 등장했지만 밀수품 등에 기를 펴지 못했다. 첫 생산량이 80대였던 상황에  미군 PX를 통해 밀반입되던 외제 라디오가 월평균 1만2000대였다는 기록을 보면 사정을 짐작할만 하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들어선 박정희 정권은 밀수품 강력 단속과 더불어 대대적인 ‘농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펼친다.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 국산품 애용을 애국심으로 연결하는 경향도 강했다. 이 즈음에 양담배를 피우는 연예인이 검거되는 일이 신문에 등장하기도 했다. 외제 물건(아마도 밀수를 통해 입수한)을 취급하다 집안이 망했다는 얘기도 공공연했던 시절이었다.



남산의 부장들, 그리고 해녀?


‘해녀밀수특공대’가 등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 사실 뿐인지를 궁금하게 하는 내용도 있다. 대대적인 검거에 앞서 존재가 확인되기도 했고 추격전을 불사했던 이력도 있으니 특공대라 부를 수도 있겠다 싶지만 당시 ‘나는 새로 떨어 드린다’는 초헌법적 기관인 중앙정보부와 박정희 시대(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18년을 채운 정보부장 10명을 시대의 목격자이자 참여자였던 기자의 눈으로 다룬 ‘남산의 부장들’ 연재물 속에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박정희 대통령의 밀수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즈음의 일이다. 1975년 정보부는 일부 요원들의 밀수 가담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일종의, 중정 그늘에서 자라온 독버섯처럼 알고도 드러내지 못했던 상황이었지만 때마침 ‘밀수 망국’이란 말이 공공연했다. 그해 여름 제보를 통해 여수를 거점으로 경찰과 검찰, 세관, 정보부 요원까지 연결된 대규모 밀수 조직을 소탕한다.(조선일보 1975년 9월 16일자 조간 7면 ‘수배자(手配者) 도피대비 해상(海上)경비령-여수밀수수사(麗水密輸搜査)본부, 9월 17일 조간 7면 ‘밀수 총책 허봉용 검거-배후 관계 철야 심문’ ,1975년 10월 30일자 7면 ‘밀수 서해로 이동’참조)

일은 거기서 시작된다. 정보부와 검찰, 경찰까지 관여된 중차대한 상황이다 보니 ‘부산 일’은 대검에 맡겨진다.

확실한 정보도 범증도 쥐지 않고 엄명에 따라 무작정 부산 앞바다를 뒤지는 ‘무모한’일을 폭탄 돌리듯 돌리다 떠맡게 된 모 과장(연재물에 석진강 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당시는 대검 부장이었고 이후 변호사 개업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이 검찰 수사관 2명, 시경의 손발 서너명과 부산으로 간다. 막막하기는 출렁이는 부산 앞바다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여럿이 머리를 맞대다 보면 뭔가 나오지 않겠나 하고 대책회의를 한 결과 ‘세관을 족치면 뭔가 집히지 않겠냐’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른바 다 알고 왔으니 자료와 명단을 내놓으라고 으르고, 비리가 있는 하위직 세관원을 상대로 ‘정보를 대면 살 수 있다’고 어르는 작업이 진행된다.

그렇게 3개월이 흐르고 크리스마스 캐럴이 흐르던 즈음에 ‘14개파 324명’ 구속이라는 성과를 낸다. 밀수 총액은 22억여원, 압수품은 5억 7백만원 어치나 됐다. ‘국제스타파’ ‘한라파’ ‘오륙도파’ 같은 그럴싸한 이름들 사이에 ‘해녀 밀수 특공대’가 한 자리를 차지한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컷.
영화 <밀수> 메인 예고 영상 갈무리

특공대라 지칭한다 한들


유추해보면 처음 ‘밀수단’에서 슬슬 규모가 커지면서 ‘특공대’가 된 과정이 보인다. 한 명을 붙들었고 도망친 이들을 추적하고 있다는 얘기가 있었으니 알음알음 영도 청학동 일대를 몇 번이고 들었다 놨을 일이다. 이들이 주로 거래했던 밀수품은 가전제품이었다.

부산 최대 규모 밀수 조직이었던 한라파나 다이아몬드만 전문으로 밀수했던 태동파, 밀수품만 전문적으로 훔쳤던 배치기파 등과 비교해 해녀들의 활약(?)은 그리 눈에 띄지는 않는다. 금괴나 녹용 등을 전문으로 다루다 덜미가 집히기도 했고, 마약 얘기도 심심치않게 등장했을 때 가전제품은 앞 줄에 서기도 힘들었다.

특공대라는 표현은 1960년대 쓰시마(대마도(対馬島))이즈하라(엄원(厳原))를 근거지로 현해탄을 주름 잡았던 거물급 밀수배들을 부르던 별칭에서 출발해 잠시 활어운반선으로 방법을 바꾸며 사라졌다가 1975년 여수 밀수 조직 소탕 작전 과정에서 재등장한다.

1976년 6월에 다시 부산에서 '밀수 특공대'가 붙잡히나 바로 전년 붙집힌 해녀특공대와는 사뭇 차이가 있다. 나라에서 금한 일을 했으니 편을 들기는 쉽지않다. 그저, 이래저래 ‘해녀 밀수 특공대’가 있기는 했는지, 존재 했다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밀수> 스틸컷. 출처 다음 영화.
조선일보 1975년 9월 14일자 조간 7면. 밀수 베일을 벗다 기획 '특공대'. 출처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조선일보 1975년 6월 14일자 7면. 밀수(密輸)특공대 6명을검거(檢擧). 출처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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