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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Sep 17. 2023

'출가' '데카세키' …해녀, 응달의 상처를 뒤집다

아기상군 해운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다 : 닿고 보니 블라디보스토크더라 2

한겨울 눈 구경도 쉽지 않았던 제주에서 나고 자란 해녀들이, ‘여름 초입에도 얼음 구경을 하는’ 노국(러시아)까지 물질을 갔다. 강예길 할머니도 “어떻게 이런 데까지 데려왔냐. 얼른 돌아가자.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야단을 했지만 2년에 걸쳐 다녀왔다. 강 할머니 외에도 현장 연구자들의 조사 자료를 보면 블라디보스토크 물질을 다녀왔다는 할머니들의 사례가 간혹 등장한다. 곰포 가격이 제법 좋았던 것도 있었을 터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놓치기 싫었을 수도 있다.     

간절하고 또 절박했던 바다 작업의 결과가 확실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그저 돈을 쥐었고, 더 벌 수 있다는 말에 목숨을 걸 수도 있는 불확실성을 극복할 어떤 힘이 있었을까. 주춤주춤 제주해녀들의 출가 경로를 더듬어 돌아가 살펴볼 수밖에 없다.

일단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 Edward Hallet Carr의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을 앞에 걸어놓고 시작한다.



간절하고 절박했던 그 바다에서


19세기말 제주해녀가 출가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한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1876년) 이후 일본인 잠수기 어업자들이 제주를 포함한 우리나라 연안에 진출해 장비를 이용해 해산물들을 채취하기 시작했고, 제주해녀들이 작업할 수 있는 해산물은 크게 줄어들게 됐다. 생계에 위협을 느낀 제주해녀들은 전도금과 채취량에 따른 수익을 담보로 타 지역에 나가 물질을 하게 됐다. 이 시기 우리나라 해조류의 가치를 알아본 일본 자본가들이 부산에 수산물 유통과 수출을 전담할 부산수산회사를 설립하고 어시장을 만드는 등 해조류 수요가 늘어났고, 이로 인해 해조류 가격이 높아지면서 제주해녀들의 출가가 증가하는 요인이 됐다. 여기까지는 이미 알고 있거나 정리된 내용들이다.

더 깊숙이 들어가 살피면 알고 보니 ‘불편한’ 진실이 고개를 든다.

처음 일본 자본가들이 이익을 내기 위해 자국의 아마(海女)를 먼저 우리 바다에 투입했다. 여러 자료들에서 일본 시마현 아마들이 우리나라로 건너와 작업을 했다는 기록(塚本 明, 近代の志摩海女の出稼ぎについて , [三重大史學], 三重大學, 2010)을 찾을 수 있다. ‘데카세키(出稼)’라고 부르는 영역이다.

사전적 의미로 ‘데카세기’는 일정 기간 자기 본래의 거주지를 떠나서 타향으로 돈을 벌러 갔다 일이 끝나면 다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일자리가 있는 곳으로 정착을 하러 가는 게 아니라 돈을 벌고 나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포함된 단어로 실제 그런 뜻으로 쓰인다. 일본에서도 자국민이 가는 데카세기와 외국인이 일본으로 오는 데카세기로 나눠 설명하는데 이중 전자는 다시 일본인이 일본 내에서 이동하는 것과 외국으로 가는 것을 구분해 일종의 사회 현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메이지유신 초기 '기차'의 등장

'다시 돌아오다'의 약속은


‘데카세키’란 말은 언제부터 등장했을까. 역사나 국제관계사 등에서 이 부분을 치밀하게 연구했던 사례가 드물어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일본에서는 이 데카세키의 시초를 ‘제2차대전 이전에 농촌과 산촌 등에 생긴 제탄업 등에 종사하기 위한 노동력을 타지에서 들여오는 것’에서 찾는다. 특수하거나 특별한 사안들에 있어 ‘의미 부여’가 유연적이었던 일본의 전례를 봤을 때-예를 들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작업 당시 한국 해녀와 일본 아마의 원조(元祖)논란이 있었는데 우리나라는 ‘사료에 등장한’을 기준으로 삼국시대 언저리를 설명하는 동안 일본은 패총 흔적을 제시하며 선사시대부터 이었다고 주장했던 일이 있었다-제법 구미가 당긴다.

이전에는 이 ‘데카세키’를 일본 어민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상으로 봤지만, 당시 시대 상황은 그 이상이었음을 말한다. 일본 시마 지역 신문과 문헌 자료에 의하면, 시마 아마들은 한반도 외에도 홋카이도와 이즈반도 등으로 출가했다. 조선으로의 출어는 1890년대로 추정된다. 1891년부터 조선 출어가 시작되었다는 신문 기사자료가 있고, 1897년에는 고용인을 통해 출어했다는 내용도 확인된다. 당시 아마들의 고용주는 부산과 오사카의 상인들로 제주도 부근에서 해초를 채취했다고 전해진다.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일본의 근대 침략전쟁은 많은 것을 바꾸고 달라지게 했다. 그 앞 과정은 ‘메이지 유신’(1868)이었다.

일본의 역사와 정치사에서 ‘메이지유신’은 도쿠가와 막번체제를 붕괴시키고 천황제 통일국가를 형성하여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하는 출발점이 된 정치·경제·사회적 변혁을 총칭한다. 그 이후 성장세는 대단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유럽의 주류는 물론 상당수의 사회주의자마저도 일본의 발전과 문명화에 주목했고, 구한말 정치적인 친일파들이 이를 개혁의 모델로 삼기도 했다. 일단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기록된 역사다. 그 것이 전부였을까.

속도와 불균형이 말하는 것들


18세기 일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도시화율이 높았다. 당시 유럽이 인구 10만 이상의 도시에 전인구의 2%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일본은 5~6%가 도시에 살고 있었다. 연평균 5%의 성장률이 도시를 풍요롭게 했지만 그 만큼 근대화의 그늘은 짙고 깊었다. 그를 대변하는 것 중 하나가 이 ‘데카세키’였다. 양극화 심화로 고착화한 부(富)의 불균형과 이를 타파하기 위한 선택, 고향과 가족에 대한 집중력이 높은 동양적 정서까지 ‘데카세키’는 그렇게 아픈 손가락이 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토미오카 제사장(富岡製糸場)은 기술 혁신과 기술 교류를 보여주던 근대화된 공장으로 당시 큰 돈을 벌러 가던 '데카세기'로 유명했다. 오랜 동안 생산이 한정되었던 생사를 대량 생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당시 공장에서 일할 여직공을 전국적으로 모집했는데 '월급도 많고 시설도 좋은'곳으로 알려지며 지원자가 쇄도해서 제법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서 일을 얻었다고 한다.

그 응달은 어땠을까. 메이지 시대 일본 외화벌이의 약 60%를 담당한 제적 효자인 면직물 노동자의 80~90%를 차지한 이들은 25살 미만의 여공이었다. 모집원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빈농의 딸들은 한달에 이틀만 쉬며 매일 14~17시간씩 노동을 해야 했다. 여럿이 같이 자는 콩나물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도주를 막기 위해 허가없이는 외출도 하지 못하게 하는 등 사실상의 감금 조치들이 이뤄졌다. 노동기간은 필기 계약서도 없이 모집자와의 구두 약속으로 정해지고, 임금은 공장 주인이 '마음대로' 매겼다. 마치 데자뷰와 같은 일들이다. 


* 모든 글은 직접 취재와 자료 조사를 통해 쓰고 있습니다 [무단 복제 및 도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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