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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Oct 13. 2023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야”

아기상군해운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다: 그 때 접경에서 생긴 일

강예길 할머니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물질을 간 것은 1920년대 초 일이다. 해녀들은 자세히 몰랐지만 1차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신흥강국으로 일본의 기세는 치솟았고 청일전쟁‧러일전쟁 이후 주도권을 뺏긴 중국과 러시아의 입지는 더 좁아졌던 때였다. 그 틈바구니에서 ‘조선 사람’은 있어도 없었다. 최근 뜨고 있는 OTT 플랫폼 오리지널 시리즈 ‘도적(刀嘀): 칼의 소리’의 시대 배경이 마침 그 때다. 1920년 중국의 땅, 일본의 돈, 조선의 사람이 모여든 무법천지의 공간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 쳤던 이야기를 속에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야”라는 대사가 귀에 절절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도적:칼의 소리> 스틸컷
쿤스트 알버스 무역회사가 발행한 엽서 '한인들'(블라디보스토크). 20세기 초 추정.

접경, 삶의 경계를 오가다


시대적 배경을 공유하다 보니 일본군과 마적단에 대한 두려움과 치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같은 것이 와닿는다. 사실 드라마의 무대는 간도지만 동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인접하고, 북으로 길림에 가까워 북만주로 진출하기에 가장 편리한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제주해녀들의 동선에 블라디보스토크가 있었고 그 이후 어디까지 움직였는지는 구체적이지 않다. 느낌상 바다가 인접한 곳에서 물질을 했을 거라 살필 뿐이지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강예길 할머니가 툭하고 쏟아낸 얘기는 그래서 더 드라마틱하다.

접경이다 보니 하루가 멀다하고 대놓고 돈을 요구하는 ‘도적’들이 들락날락거렸다. 그 곳에서 생활하면서 ‘노국 말과 대국 말을 배웠다’는 얘기만 들어도 그 때 사정이 어땠는지 알 만하다. 

1920년대 만주 및 연해주 지역 이주 한인 관련 사료들을 살펴보면 이들 가운데는 대체로 국경 지역 또는 그 인근 지역에 터를 잡은 경우가 많았고 마적 활동에 참여한 사례도 수두룩하다. 한인들이 많이 이주한 국경지역은 바로 마적의 활동지역과 겹치는 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에서 활동한 마적의 주된 수입원 가운데 하나가 아편 거래였고, 낯선 땅에서 먹고 살 방편을 찾아야 했던 조선 궁인들의 아편 재배가 연관성이 있다는 문서나 언론 기사 내용도 확인된다. 이주 정착한 사람들도 그러한데 돈을 벌겠다고 불쑥 나타난 해녀들의 존재는 어떠했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견제와 관찰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일본군 또는 마적의 비호를 받기 위해 돈을 써야했다.


일제강점기 한 조선인이 양귀비의 유액을 채취하고 있다. 일본은 조선을 아편 생산지로 이용했고 이 외국에 팔아 돈을 벌었다. 사진 출처 조선총독부 전매국 편 ‘조선전매'1941년
국경을 넘는 사람들-고려인역사관 소장
일제 강점기 농촌 지역 어린이들 모습. 국가기록원 공개. 영국국립기록원 소장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말굽 소리, 총 소리, 고함 소리, 동물 울음소리들로 잠 못 이루는 날이 이어지면서 ‘조선으로 돌아가자’는 해녀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남도 나그네’에게 날씨며 바다 사정은 험하기 그지 없었다. 그냥 돌아갈 수는 없던 해녀들은 익숙하게 ‘밭 일’을 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인지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대화 끝에 ‘약쟁이’란 말이 등장한다. 밤톨만 하고 널어 말리면 검붉은 색으로 변하는 그 것, 그나마 말이 통하는 사람들에게 구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강예길 할머니의 말을 정리하면 6월 보름 즈음에 그 지역 사람들이 밭에서 **을 수확했다. 앞 줄 사람이 열매을 따면서 줄기를 밀어놓으면 뒤에 따라가는 사람이 그 것을 묶는 형태로 작업을 했다. 해녀들은 그렇게 작업한 밭을 다시 한번 훑어 떨어진 열매를 거둬들였다. 밤방울 만한 열매를 장통에 넣는 방식으로 수확해 나중에 한데 모았다. 다음은 그 열매를 마당이나 지붕에 널어 말렸다. 어느 정도 말라 색이 검붉게 변하면 으깨서 밀가루와 콩기름을 넣고 돌래떡 빚듯 빚었다. ‘성냥곽에 넣었다’는 언급이 있는 것을 보면 대충 그 크기가 가늠된다.

수작업을 하는 거라 그 양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할머니의 기억에는 ‘항구에서 포대 밀가루를 나누고 콩기름을 곽으로 사다가’ 작업했던 때가 남아있다. 그렇게 만든 것들의 대부분은 대국, 그러니까 중국 상인들이 사 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작가인 슈타인 콘스타노비치가 1904년 촬영한 연해주 한인사회 농촌 풍경


연해주(州) 인근 바다에 떠 있는 한인 화물선.

그냥 치마를 확 벗어 던지고


쌈짓돈을 만들 요량으로 몰래 가지고 들어오려 했다가 크게 혼난 일도 털어놨다.

드라마에나 나올 듯한 작업이다.

치마 주름을 잡아서 그 주름에 기름을 먹인 아편을 발랐다. 그것을 잘 말려서 입은 채 배를 탔다. 검붉던 색이 마르면서 언듯 오래 묵은 갈옷과 비슷한 색깔이 난 듯했다. 사람들의 주목을 피해 어찌어찌 국경을 넘고 원산까지는 잘 들어왔는데 '울산 지나 부산항이 보일 즈음 뱃고동 소리가 방방하고 울리는 순간' 심장이 조여왔다. 

일본군이 배에 올라 조금이라도 행색이 수상한 사람들을 다 잡아내기 시작했던 것. 아편 밀수에 대해서는 치밀하다 못해 지독하게 관리했던 내용이 당시 신문 기사에도 등장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으로 라던가 '노국 지폐를 아편으로 오인한 소동'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실리던 때였다. 거기에 군복을 입고 총을 든 군인들이 우르르 움직이는 모습만 봐도 겁이 났음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안다.

0환에 몰래 아편을 밀수하던 사례가 적발됐다는 기사가 실린 부산일보 1918년 9월 19일자
노국지폐를 아편으로 오인한 소동으로 원산.청진항 단속이 강화됐다는 기사가 실린 매일신보 1921년 5월 23일자.


여럿을 붙들고 몸 검사를 엄청 심하게 하는 모습을 보고 겁이 난 일행은 서둘러 화장실로 달려가 치마를 벗어 탈탈 털다 못해 그대로 버렸다. 어찌나 겁이 났던지 다시는 그런 비슷한 일은 시도할 생각도 못했다고 했다.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사이 우리나라에 아편이 공공연하게 퍼졌다. 처음 민간요법에 쓰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후 일제는 식민지 재원 확보 수단으로 우리나라를 아편 생산지로 이용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는 아편굴의 등장과 아편 밀수 횡행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번졌다.

일제의 아편정책과 별개로 조선사회 내에서는 자체적으로 아편 문제를 경계하고 그 사용을 근절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아편근절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제주해녀와 관련한 자료를 조사하면서 비슷한 얘기는 찾아보지 못했다. 들었어도 그대로 묻어뒀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묻어둔 사연이 비단 그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 모든 글은 직접 취재와 자료 조사를 통해 쓰고 있습니다 [무단 복제 및 도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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