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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Oct 12. 2023

낯설고 거친 두만강 푸른 물 건너

아기상군해운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다 :  사연도 사정도 많은 해녀의 길 

함북 경흥 두만강구 토리 후산에서 본 두만강함북 경흥 두만강구 토리 후산에서 본 두만강. 1914년 촬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성산항에서 풍선(風船)을 타고 열서나흘 걸려 부산에 닿았을 때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거멓게 마른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을 흘려보냈다는 사연에 눈물을 쏟았던 적이 있었다. 두만강을 건너는 것은 사정이 또 다르다.

김동환 시인이 쓴 우리나라 첫 현대 장편시 ‘국경의 밤’(1925년 출간)에 나오는 두만강은 읽는 것 만으로도 뼛 속이 시리다.

“전선(電線)이 운다 잉잉하고·국교(國交)하라가는 전신 줄이 몹시도 운다·집도 백양(白楊)도 산곡(山谷)도 오양간 당나귀도 따라서 운다·이렇게 춥길래 오늘 따라 간도이사꾼도 별로 없지. 어름짱 깔린 강(江)바닥을·바가지 달아매고 건너는·함경도 이사꾼도 별로 안 보이지·회령서는 벌써 마지막 차(車)고동이 텄는데”

눈·눈보라·설원·추위·당나귀의 울음·간도이사꾼 등 두만강이라는 공간은 당시 우리나라가 처했던 비극적 상황과 맞물리며 시퍼런 멍을 감추지 않았다. 이효석의 <노령근해>에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러시아로 탈출하는 젊은 항일 투사는 우리나라 최북단 항구인 웅기에서 서수라를 거쳐 두만강 어귀를 지나 당시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에 닿는다. 국제 여객선에 몸을 숨긴 채였지만 ‘뱃전을 물어뜯는 파도의 흰 이빨’이 쉽지 않은 여정을 드러낸다.

빌린 배에 몸을 싣고 강을, 바다를 건너면서 제주해녀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건이 좋은 바다도 많았을 텐데 왜 하필 낯설고 춥기까지 한 타국의 바다까지 가야했을까.  

 

 

1928년 8월 1일자 매일신보 

메이지형 노동의 흔적

19세기말 시작된 제주해녀들의 출가(出稼)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다. 힘과 자본, 기술을 앞세운 일본 수산업자들의 한반도 진출로 제주도 주변 어장에 변화가 생겼고, 제주와 내륙, 일본으로 연결된 해상교통 수단의 발달, 그리고 메이지형 노동 시장 진입에 따른 노동력 이동이 맞물렸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이 과정에서 남성에 비해 여성들의 경제활동이 상대적으로 유연해졌다는 점이 보태지며 제주해녀의 타 지역 이동이 활발해 졌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당시 채취된 해초들이 단순 소비용이 아니라 일제의 수산 및 군수산업의 원료가 되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해녀들의 이동 이유가 복잡해진다.

돈을 벌기 위해 섬에서 벗어난 것을 제외하고 나면 노동비용이 낮고 집단 행동 관리 등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거나 징용 성격으로 출가를 한 경우를 살펴볼 수 있다. 식민지 질서라는 틀 안에서 자신들이 직접 바다를 선택하고 작업하는 일은 특별했던 만큼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만 했다. 수확량이 많거나 정박 여건 좋은 지역은 이미 일본 수산업자나 텃세에 밀려 일한 수고에 비해 손에 쥐는 것은 많지 않은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좀 더 사정이 나은 곳을 찾아 이동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것이 해녀들의 출가 경로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포함하게 했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매일신보 1916년 8월 3일자 활동력 왕성한 제주해녀 시리즈 1
매일신보 1916년 8월 6일자 활동력 왕성한 제주해녀 시리즈 2
매일신보 1916년 8월 8일자 활동력 왕성한 제주해녀 시리즈 3
매일신보 1916년 8월 10일자 활동력 왕성한 제주해녀 시리즈 4


반가운 손님에서 불편한 경쟁자로


당시 신문 자료를 보면 1899년 일본인 수산업자가 고용한 잠수부들이 울산에 출가한 제주 해녀들의 입어를 방해하자 둘 사이에 소동이 일어나 경찰과 헌병들이 출동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11년에는 장생포에 거주하는 일본인 해조상이 한천 제조 설비를 갖추고 울산 30개 마을의 해초 채취권을 사들인 뒤 일본 해녀와 마을 주민들만으로 우뭇가사리 채취를 시도했다. 이듬해 제주 해녀들이 입어하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막아섰고 무력 충돌까지 일어났다. 이 사건 뒤 경남 해조류 어장에 6개의 어업조합(강동, 대현, 온산, 서생, 동면, 기장 어업조합)이 설립됐고, 제주해녀들은 어업조합에 입어료를 내야 물질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매일신보의 1913년 5월 7일자 '울산 해조(海藻) 분쟁 해결 5개 어업조합 설립, 대대적 발전의 희망'이란 제목의 기사에도 ‘지난 17,8년 전부터 제주 해녀가 연년이(해마다) 이 지방에 와서 잠수 채취에 종사하여 금일에 이르렀으며…, 해녀를 고용하고자 할 때는 부산 목도(영도)에 도항하여 머무르고 있는 해녀들과 출어 시 소요 되는 비용 및 채취물의 매매 등에 관한 계약을 한 후 울산의 적정한 곳에 데려다 일을 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부산일보 1917년 4월 18일자 제주해녀의 입어료 진정

제주해녀와 접점이 많았던 부산에서는 더 많은 기사가 등장한다. 부산일보 1918년 2월 21일자에는 '제주해녀 입어 제한'을 다뤘다. 울산과 동래, 기장 등에서 제주해녀의 남획을 막기 위해 협의를 했다는 내용이다. 불과 1년 전인 1917년 4월 24일자에 제주해녀들의 운동회가 열렸다는 동향 기사가 나왔던 것과 비교해 온도차가 크다. 심지어 1916년에는 '활동력이 왕성한 제주해녀'를 시리즈로 다룬 기획(매일신보)도 있었다.

불길한 조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매일신보 1913년 6월 19일자에는 입어료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제주해녀를 구제하는 방안이 마련됐다는 기사가 게재된다. 1913년 6월 10일자 기사에는 '제주해녀의 고난은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쓰고 있다. 이후 1920년 '제주해녀 1만명 해녀종업조합 설립'기사가 등장한다. 1920년대 들어서는 해녀분쟁‧입어문제 해결 같은 키워드가 심심치 않게 등장했고 해녀들의 출가 지역이 점점 북상하는 경향을 보인다. 매일신보 1926년 8월 13일자에는 '원산항에서 전복 소라와 해조류 작업을 하는 해녀들이 하루 5원을 벌어 모처럼 얼굴에 웃음빛이 감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린다. 하지만 이듬해인 1927년 제주해녀들의 출가 물질을 허가제로 바꾸면서 한동안 '해녀 문제 해결'을 둘러싼 행정과 지역, 해녀의 갈등이 지면에 오르내린다. 

부산에서 열린 제주해녀운동회 소식 부산일보 1917년 4월 24일자



북쪽으로, 더 찬 바다로


1916년 해녀기획 시리즈는 제주해녀가 벌이 나가는 곳부터 해마다 2000명씩 각처로 나가고 어느 정도를 버는지, 해녀의 처신과 구제법을 다뤘다. 

1915년 출가 해녀 숫자가 경남에 1700명, 남해안 다도해 방면에 300명, 기타 지역 500명 등 2500명이었고 부산의 객주도 1893년 60개에서 1909년 1367개로 급증했다는 내용과 맞물린다. 당시 해녀가 출가 나간 지역에는 함경남도와 황해도까지 등장한다. 1926년 인천에서 조개를 줍는 해녀들의 사진이 실린 것을 보면 꾸준히 북상했음을 가늠할 수 있다.

초반 벌이가 좋았던 사정이 분쟁으로 바뀌면서 바다를 찾아 떠돌아야 했던 해녀들은 그 시절 국경을 넘나들며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했다. 바다에 나가면 절대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나름의 룰이 적용됐던 때문이다. 어쩌면 ‘밀수’라는 단어를 처음 접목할 수 있는 상황을 강예길 할머니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매일신보 1926년 6월 21일자 조개줍는 인천해녀 눈물겨운 하소연

** 모든 글은 직접 취재와 자료 조사를 통해 쓰고 있습니다 [무단 복제 및 도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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