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살기 바빠서 입맛 없는 이들에게
식도암 환자와 설암 환자가 만났다. 식도암이 말했다.
“입맛이 당긴다는 말을 이제야 알겠다. (배 쪽을 가리키며) 몸속에서 음식을 당겨주지 않으니까 (음식이) 내려가질 않아. 입으로 열심히 씹어 삼켜 넣어도 밑에서 당겨주질 않으니 목구멍에 얹히기도 하고, 가끔은 코로 나오기도 하고.”
설암이 답했다.
“나는 뱃속에서 자꾸 맛을 당기는데 당최 입이 받질 않어. 혀가 맛을 느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 식욕도 안 생긴단 말이지. 입도 불쌍하고 배도 불쌍하고…”
다행히 두 사람 모두 병세가 호전되는 중이다. ‘요즘 암은 불치병이 아니라’고 위로하다가 문득, 누가 누굴 위로할 수 있는가 회의가 들었다. 낌새를 알아챘는지 (환자들은 정신이 예민해져 상대방의 심중을 금세 꿰뚫는다) 두 암이 나를 위로하는 말을 했다.
“그래도 다행이지. 살 날이 많지 않은 게… 요즘 같은 시대는 오래 사는 것도 민폐야.”
“다만 입맛 잃는 게 싫지. 맛있는 거 못 먹는 게 제일 힘들어.”
세상에, 이처럼 관조적인 사람을 만난 지 얼마 만인가 싶었다. 그들은 그랬다. 하루 한 번이라도 맛을 음미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고.
하지만 맛을 음미할 수 없어짐으로써 얻은 깨달음도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먹고 살기 바빠서 맛을 느낄 겨를도 없었네. 그런데 먹는 게 여의치 않아지니까 이제 겨우 알겠어. 먹고 산다는 게 뭔지. 먹고 사는 건 먹기와 살기 아니겠어?”
먹기 위해 살기냐, 살기 위해 먹기냐를 재론하는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먹는 건 (배를 가리키며) 경제 문제이고, 사는 건 (머리를 가리키며) 철학 문제 아닌가? 배를 채우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그게 먹고 사는 문제야.”
병상에 누웠다 일어났다 반복하는 동안 그들은 열심히 책을 읽었다. 먹는 게 시원찮은 대신 사는 게 뭔지라도 알아야겠다며, 맛있게 지식을 씹는 듯했다.
우리는 종종 흰 접시 위에 책이 올려진 디자인을 접한다. 접시 양옆에 포크와 나이프가 놓인, 한때 모던하게 보였던 디자인의 메시지는 ‘책을 먹고’, ‘생각 좀 하라’는 충고였다. 바로 그것이 ‘먹고 사는’ 방식임을, 그날 암 환자들이 알려주었다.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언감생심 ‘먹고 사는’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