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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포포 매거진 Oct 29. 2019

아이가 없을 땐 몰랐다

엄마도 사람이다

나도 그랬다


아이가 없을 땐 몰랐다.

브런치를 즐기는 유모차 부대가 부러웠다. 

출근 시간은 있으나 퇴근 시간은 없는 대부분의 평범한 회사원의 시선이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엄마, 무임금 노동자


온 몸에 예민한 센서로 무장한 아이는 낮이건 밤이건 두시간 이상 자지 않았다.

다른 엄마들은 잘도 하는 수면육아도 못하냐는 핀잔 속에 자괴감만 들었다.

아이를 안고 붙박이 가구처럼 집에만 있어야 했다.

품에 안겨서도 30분 이상 깊게 자지 않는 아이는 분명 내 뱃속에서 나왔건만

여전히 한몸으로 붙어 떨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기띠를 하고 화장실에 가거나 싱크대에 서서 대충 밥을 국에 말아 마시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오롯이 아이를 위해 존재하다

아주 가끔 찾아오는 또래 엄마와의 점심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외출이었다.

아이를 위한 외출이 아닌 '내' 약속.


그 한 두시간의 콧바람을 쐬기 위해 아이가 갑자기 큰 일을 보거나 토를 하거나 칭얼거리거나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응급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짐을 쌌다.

피난 보따리 마냥 한 짐을 챙겨 나와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아이를 안고 서서 어르고 달래면서도 그 찰나의 외출에 숨통이 트였다.


그토록 어렵게 집밖으로 탈출해 만난 사적인 약속에서도 자연스레 아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이어졌다.

기저귀 특가 세일, 이앓이에 좋다는 얼려쓰는 치발기, 요즘 효과를 보고 있다는 유산균.

여전히 음식은 서서 쓸어담는 수준에 여유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지만

그렇게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위안이었다.

'나'도 살아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모습은 누군가에게 '팔자 좋은 전업주부'라 읽고 ‘맘충’이라 불리는

혀를 끌끌 차게 만드는 대상으로 불리고 낙인찍혔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놀리고


"부럽다."

출근하는 남편이 던지고 간 말에 가슴 깊숙한 곳이 뻐근했다.

분명 그도 천사처럼 잠든 아이를 놔두고 발걸음이 떨어지기 아쉬웠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이와 종일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넌 참 좋겠다."로 애써 해석해본다.


잠깐 놀아주는 것과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는 것의 차이는 극명하다.

'밖에서 돈 벌어오는 존재'와 '집에서 애 보는 존재'라는 말에 담긴 비수를 재차 확인한다.

"피곤해."라는 한 마디에 스며들어있는 진짜 속마음.

'넌 편하게 집에서 애 하나만 보면 되지. 하루 종일 일에 탈탈 털린 멘탈을 간신히 붙잡고 집에 돌아왔는데 나한테 애까지 보라고?'


합의하에 부모가 되었는데 견뎌야 하는 짐의 무게는 왜 이렇게 다른 걸까.

하루 종일 내 새끼 밥 먹이고 치우고 씻기고 청소하고 왜 나를 뺀 가족들을 돌보는 존재로만 남게 되었을까.

물음표만 쌓여갔다.

제대로 한 끼 편하게 먹고, 두다리 뻗고 자고, 마음껏 화장실을 가는 인간의 기본권이 왜 엄마한테는 예외여야 하나.

왜 엄마도 누군가의 금쪽같은 자식이라는 점은 늘 배제되는 것인가.


이렇게 집에서 애만 키울 거면 애초에 그토록 치열하게 인생을 살 필요가 없었다.

전공도 학위도 경력도 구태여 필요치 않았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굴레 속에서 현실을 불평하거나 "다 그렇지 뭐."로 치부하지 않기로 했다.


이건 잘못됐고 당신이 알고 있는 건 사실이 아니며

그 누구도 그 누군가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고 잣대를 내릴 수 없다는 것.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들을 얘기할 의무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 들을 때까지, 귀에 못이 박힐 때까지 반복해서 말하고 인식시켜야 한다는 걸.

그렇게 겪어보지 않은 것에 대해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뼈에 사무치게 배웠다.


내가 침묵하면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고

"원래 그런거야." "당연하지."의 프레임으로 이어진다.


82년생 김지영의 등장은

순종과 여자다움, 희생을 암묵적으로 강요당해 온 여성들의 삶에

이제 용기를 내어 말하는 세대가 등장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희생의 아이콘이라는 진부한 클리셰


영화 속 어린 지영은 해말간 얼굴로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왜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

공부는 엄마가 제일 잘했어도 청계천에서 밤낮으로 미싱을 돌려 남자 형제들의 등록금을 댔다.

“그 땐 다 그랬어.”

엄마의 이루지 못한 교직의 꿈은 지영의 언니에게로 전이된다.

“막 IMF 터졌을 때라 너희도 학교 가야되고. 그래서 교대로 갔지. 엄마가 바라던 것도 있고.”


아이가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서 훈수 두는 엄마를 꽤 많이 목격한다.

“머리가 좀 더 긴 게 예쁘지? 핑크는 여기에서도 썼자나.”

돈 들어갈 곳이 천지인데 엄마 스스로에겐 돈을 쓰기가 한없이 망설여지는 그 마음을 안다.

엄마 몫의 재료를 가져가 전한다.

“엄마는 엄마 꺼 하세요.”


아이를 위해서라도 엄마 몫의 인생이 있어야 한다.

직업이 아니라 취미 생활일지라도 누구의 엄마도 아내도 아닌 한 개인으로 존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그 수많은 개인의 선택을 아이를 통해 투영시키고 대리만족 하는 건 아이를 주체적인 인간이 아닌 엄마의 꼭두각시로 키울 뿐이다.


엄마의 바람과 요구대로 착실하게 성장했을 신입의 유명한 일화들이 있다.

“엄마 나 점심 뭐 먹을까?”

“엄마 나 얘랑 사귀어도 돼?”

뜨악할만큼 소소한 개인적인 것들의 결정을 엄마에게로 미뤄버리는 경우.

갑자기 전화로 엄마가 퇴사 통보를 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애 더 이상 못 보내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가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지영의 병을 알게 된 엄마는 한 걸음에 달려왔다.

“엄마가 가게 얼른 정리할께. 애기 다 봐줄테니까 우리 지영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지영은 그녀의 할머니가 되어 얘기한다.

“애미야. 그러지마라. 너 청계천에서 미싱 돌리다 손 그렇게 되서 왔을 때 엄마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애들은 알아서 할 거다. 너도 네 인생 살아야지.”


지영이 그토록 원하던 복직 소식을 알렸을 때 시어머니는 앞길이 구만리 같은 아들이 육아휴직을 하기로 했다는 얘기에 격분한다. 지영이 아프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어렵사리 꺼내는 남편의 마음도 복잡하긴 매한가지다. 육아휴직 후 자리가 없어지거나 한직으로 밀려나는 동료들을 볼 때면 한숨이 밀려온다. 그래도 그들은 결정한다. 


영화는 소설과 다른 결말을 제시한다. 그 속에 각자의 자리를 되찾으며 그것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각자의 삶이 있을 때 가족이라는 공동체 역시 균형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은 평화로워 보이는 한 쪽의 일방적인 희생은 어떤 싱크홀이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


엄마의 내일을 준비하는 오늘


영화는 지극히 현실의 풍경을 그려낸다. 

불법 동영상 사이트에서 건진 여자 동료들의 화장실 몰카를 발견한 남자 동료들은 신고는 커녕 해당 영상을 돌려볼 뿐이다.

이유도 맥락도 없이 옥상으로 여친을 불러 “3층 화장실 쓰지마.”라고 얘기하는 남자는 이 사실을 몰래 전하면서 신신당부한다.

"다른 사람한텐 얘기하면 안되!" 

나만, 나에게 소중한 사람만 아니면 되. 하는 극도의 이기심.


"여자애가 치마가 그게 뭐야. 짧잖아."

"여자가 조심성 없이!" 같은 "여자가~"로 시작되는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들은

네가 구실을 제공하니 그런 험한 일을 당하지 같은

피해자가 가해자로 전복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영화'라서 '지영이'라서 겪었던 특수성과는 무관하다.

지금이라도 바뀌지 않으면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도 '여자'라는 이유로 겪어야 할 차별이다. 


침묵하고 조용히 넘어가는 게 외려 입방아에 오르는 것보다 낫다는 암묵적인 교육을 받아왔다.

그러나 잘못된 걸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용기는 하루 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끊어내야 한다.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는 게 왜 이토록 어려워야 할까.


당신이 지영이로, 맘충이라 불리는 사람이 되어보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다.

노을이 질 무렵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마음도, 빈 껍데기처럼 내 안의 나는 소멸된 그 공허함도.

이해해 달라고 부탁하거나 바라지 않는다.

그래도 한 가지는 명확하다.

그 누구도 '맘충'이라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은 없다.

만약 당신의 엄마가, 아내가, 동생이나 누나가 그렇게 불린다면 어떨까? 


이 글을 마무리하던 시청 앞 스타벅스. 12시 30분. 

시청 점퍼를 입은 중년의 공무원이 부하 직원으로 보이는 이들에게 <82년생 김지영>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오름......... 

"영화가 좀 오바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고. 공감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기도 하고. 대부분 여자 몫으로 넘어가잖아. 남자를 도와주는 존재로 살잖아. 자기가 주체가 아니잖아.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건데... 그렇다고 특별히 답은 없잖아. 눈물은 많이 나더라. 슬프더라. 우리는 가부장적인 세대에서 자랐고 너희(부하 직원)랑은 다르지. 나는 충분히 공감하지. 근데 니네는 공감 못할 걸?" 


진짜 소름끼치는 건 이 영화 보면서 86년에 태어난 정유미도 뼈 속 깊이 공감하며 펑펑 울었다는 사실. 

어쨌든 영화를 보고 공감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박수를 보낸다.

새로운 화두를 제시하는 이 작품을 통해 저마다의 다른 생각과 상황에 공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건 어쩌면 이 땅의 수많은 지영이를 80년대에서 끝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소설과는 또 다른 지영이의 새로운 오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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