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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포포 매거진 Dec 12. 2023

가난한 사랑 노래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일은 해야지. 아빠가 집에서 늘어난 팬티를 입고 배를 긁으며 넌 뭐가 되고 싶냐 얘기했을 때, 나는 허겁지겁 일을 마치고 돌아와 대충 끓여져 있는 잡탕 찌개에 헐레벌떡 밥을 지어 먹는 엄마가 눈에 더 들어왔다. 뭐가 되고 싶냐고?


나는 그 때 사랑하는 이 땅에서 만족해 마지않는 여자로 태어난 고난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나는

사회를 위해 아이도 낳아야 하고,

가정을 위해 아이도 길러야 하며,

경제를 위해 일도 해야 하는 워킹맘이다.



이 중에서 살림을 제외했다는 걸 떠올려볼 때 나는 전세대 엄마에 비해서는 낫다.

로봇청소기와 건조기, 식기세척기 "이모님"이 없었다면 나는 진작 돌아버렸을 지도 모른다.

  

아침에 아이의 발이나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면서 꺄르르 웃으며 일어나는 상상을 하지만

실제로는 피곤에 찌든 얼굴로 늦게까지 잠들어있는 아이를 보고는 일어나, 늦는다. 이제 엄마 나간다. 하는 반 협박조의 엄한 목소리로 눈도 덜 뜨인 아이를 안아다가 세수를 시킨다.

엄마는 너무해! 나도 더 자고 싶은데, 엄마 너무해! 하는 짜증 섞인 아이의 소리가 가슴을 할퀴고 간다. 엄마도, 엄마도 힘들어. 소리가 절로 올라오지만 내뱉으면 안된다는 걸 안다. 꾹 참는다. 엄마가 미안해.


이제는 좀 컸다고 등원시간에 웃으며 헤어지기는 하지만, 아이가 좀 더 어렸을 때는 너무도 애를 먹었다. 한없이 내 옷깃의 뭐라도 움켜잡기 위해 작은 손을 뻗으며 엄마 가지마! 엄마 가지마! 하고 눈물자국 가득했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면 나는 아직도 회사 구석자리로 들어가 잠시 마음을 진정시켜야 한다.


오전 일과 내내 어제 급하게 처리하느라 실수들을 되돌이켜 죄송하다는 사과와 함께 다시 처리하는 일들을 반복한 후, 회사의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구내식당 밥은 별로여도, 차려진 밥이 제일 맛있지? 하며 찡긋하던 또다른 워킹맘 친구의 말이 떠올라 혼자 고개를 끄덕인다. 잠깐 커피라도 한 잔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좋다. 때로는 바로 들어가서 일 수습을 마쳐야 한다.


차려진 밥상. 그게 언제적 기억이었던지. 엄마는 어떻게 일을 하면서도 마른 반찬들을 냉장고에 꼭꼭 쟁여놓고 김장은 제철에 하며 아침에 밥을 차려줄 수 있었을까. 너 이거 좋아하잖아. 하고 아침 0교시 가기 전 어떻게든 밥을 먹이겠다며 나보다 먼저 눈을 떠 밥상 앞에 차려주던 반찬들. 좋아하는 미역줄기와 손이 많이 가는 애호박전. 눈을 겨우 부비며 아 엄마 나 안먹고 더 자고 싶어, 하면 아침은 먹어야 돼. 하고 일직선으로 찍 길어지던 엄마의 엄하던 입매. 그 생각을 할 때면 엄마가 보고 싶다.


오후부터는 이제 내일이면 다시 사과해야 할 일을 시작한다. 가끔 나는 바보인가 자책도 하지만, 의미없다. 바보라면 나 때문에 사과해야 할 일이 생기고, 똑똑하면 남 때문에 사과해야 할 일이 생긴다. 대충 죄송하다, 진행하겠다, 감사하다 세 가지 단어면 하루는 어찌저찌 굴러간다. 


눈 감았다 뜨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있다. 일이 많으면 빨리 지나가고, 일이 적으면 또 천천히 지나가는 게 시간은 모두 상대적이구나. 싶다. 연말은 항상 시간이 빠르다. 집중해서 일하다 보면 시간도 금방 간다. 가끔 창밖을 내다보면 운좋게 산책나온 아이들을 볼 수 있다. 직장어린이집의 장점이기에 웃으면서 아이들을 보다가 일해야지, 하면서도 기어코 내 아이를 찾아낸다. 아이가 친구하고 얘기하고 있으면 기분이 좋고, 아이 혼자 뭔가 하고 있는 것 같으면 어라, 싶다.


퇴근을 알리는 알람과 동시에 부리나케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아이에게 뛰어간다. 멀찍이서부터 달려오는 엄마를 창문으로 보고 있다가 엄마다, 싶어지면 방방 뛸 때도 있고, 친구들과 잘 놀고 있다가 엄마, 나 조금만 더 놀다 갈테니까 기다려줘. 할때도 있다. 뭐가 더 마음에 드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어쨌건 하원하는 아이가 품에 꼭 안기면 이 시간을 위해서 오늘 하루가 우당탕탕 굴러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끔 야근을 하게 될 때는 남편에게 아이를 맡긴다. 하원 알림을 보고 모니터를 보고 있자면 오히려 오후 일과 시간보다 머리가 청명하게 맑아져 올 때가 있다. 아이 간식먹이기, 한글 공부하기, 책 읽어주기, 목욕시키기, 양치시키기, 샤워하기 등 저녁에 해야하는 일 목록이 몹시 간추려지고, 오로지 일하기 하나로만 대체된다. 야근 후 항상 밝은 달이 떠있다. 예전에는 달빛을 벗삼아 해가 뜰 때까지 술 한잔을 기울이던 때도 있었건만, 지금은 희뿌연 달빛이 떠오르면 부리나케 집에 가기 바쁘다. 엄마! 보고싶었어! 하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헐레벌떡, 또 허겁지겁. 나도 엄마처럼 집으로 돌아간다.


아이가 자고 나면 이제부터 내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미뤄왔던 인터넷 서핑이며 뭐며를 시작한다. 어찌나 시간이 잘 가는지. 이번 주말엔 우리 아이가 어떻게 놀고 싶을까. 우리 아이는 어떤 걸 하고 싶을까. 이모저모 찾다가 평일에 시간을 내어 이른바 핫플을 방문한 사람들의 글들을 본다. 나도 연차를 낼까, 생각하다가 언젠가 아이가 아플 날이 있을 지도 모르니 일단 아껴둔다. 나의 휴가는 이제 내가 아플때는 쓰지 못하고, 아이가 아플때를 위해 보호자 역할로만 남아 있다. 남편과 농담처럼 아플 거면 회사 가서 아프자고! 한다.


그러다 나도 어느새 잠들 시간을 놓친다. 이렇게 되면 다시 반복이다. 새벽에 잠들고 아침에 느지막히 깨서 일어나! 일어나! 하고 반복할 모습을 떠올리니 내 자신이 너무 싫다. 정신없이 바쁘게 지낸 하루가 너무 고되어 간난하다. 누구 하나에게 충실하지도 못했고, 무엇 하나 현명하지도 못했던 하루가 이렇게 또 더께로 남는다.


엄마에게 아빠를 사랑하냐고 물었을 때 엄마는 몰라, 사랑해야 되는 줄 알았어. 라고 얘기했지만,

엄마는 자기 감정을 속이는 데 굉장히 능숙해서 자기자신마저도 속이는 사람이었기에 엄마의 매번 반복되는 증언에도 불구하고 실은 엄마가 아빠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존경했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아니라면.

사랑이 아니라면

이런 삶을 견뎌냈을 리 없다.

  

나는 신경림 시인의 시를 읽을 때면 언제나 고개를 처박고 울음짓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특히나 엄마가 되고나서는 <가난한 사랑 노래>는 울면서 읽었다. (이 글은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의 감상문이나 다름 없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이런 구절들은 어느새 내 기억 속 등원하는 아이의 애원하던 모습으로 대치된다.


가난하다고 해서, 일하는 엄마라고 해서 왜 그렇지 않겠는가.

나도 아이의 모든 웃는 순간을 함께 하고 싶다. 아이가 엄마의 찌푸려진 표정보다 미소 가득한 표정을, 엄한 목소리보다 상냥한 목소리를 기억했으면 좋겠다. 잠들기 전에 아이가 "엄마 오늘 화내지 않아줘서 고마워." 같은 말들을 내뱉기보다 "오늘도 엄마랑 있어서 너무 좋았다." 같은 꿈결같은 말들을 내뱉었으면 좋겠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물론 가난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일하고 싶어서 일한다. 사실은 일하지 못할까봐 일한다. 앞으로도 일해야 하니 일한다. 


그러니 엄마들은

해줄거다 해줄거다 떵떵거리기만 했지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아이의 돌봄을 위해서

다시 오지 않을 반짝거리는 순간들을 흘려보내며.

미안하다, 고맙다 등의 말들로 얼렁뚱땅 하루를 넘기고,

그 모든 간난의 과정을 거치며 또 이 모든 욕심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9-6시, 혹은 그 이하, 또는 이상의 근무시간을 일하며 당연한 보상을 보장받기 위해

나 뿐 아니라 아이의 그 시간들을 때로는 견디고 넘겨버려야 한다는 것을.


단지 그것들을 내가 모르겠는가.

그저 다 지나가리라 라고 견디기엔

너무도 외롭고 두렵고 그리울 이 시간들을

내가 하냥 노래만 부르면서 보내버려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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