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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포포 매거진 Nov 28. 2023

남루와 비루 사이에서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을 기르듯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내외들이여 그대들도더러는 차라리 그 곁을 누워라

지어미는 지아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지아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라도 자욱히 끼일 일인 것이다.

-서정주 <무등을 보며>



한 때는 너무 좋아서 필사한 채로 들고다니며, 그래 가난은 남루에 지나지 않는구나. 옳다구나 했던 이 구절이, 점점 더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가난이 정말 남루에 지나지 않는가. 유아기를 넘어 학령기에 슬슬 도달하는 아이를 둔 엄마들의 모임에서는 하나같이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학군지학군지를 가고자 하는 이유는 각자 다양하겠지만, 오늘 만난 모임에서는 학군지로 가고자 하는 이유에 대해 학교폭력을 들었다. 점점 비대해지는 폭력의 세상에서 사소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은 좀 더 소소하고 평범한 폭력을 찾아 이동하고자 한다. 지금 있는 곳이 가시덤불 쑥구렁이 아님에도, 옥돌이 아닌 자갈들인 부모들이 이리저리 흔들려 옮겨다니는 길목에서는 항상 상급지로, 상급지로 가고자 하는 얘기가 나온다. 


상급지, 학군지그게 대체 뭘까. 거기는 정말 평화로운 옥토끼의 나라일까. 그럴리가 없다. 학군지의 종착지인 대치동1번가의 학교폭력은 결국 교권침해로 인한 교사들의 비극적인 선택이 발생함에도, 엄마들은 일단 안전을 찾아서 이동한다. 내 자식이 안전했으면 좋겠고, 내 가족이 안전했으면 좋겠다는 지극히 당연하고도 알뜰한 사유로. 맘카페에서는 항상 집 값에 대해, 학원 수요에 대해, 아이들의 학업성취율에 대해 논하고 또 논한다. 그러면서 매번 빈번하게 날아오는 성범죄자의 거취 이동 통보지에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하고, 긴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도 대치동1번가는 못가더라도 아이들이 안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하에 자꾸만 능력에 안되는 이동을 생각하고, 말도 안되는 조건을 이것저것 넣어 고려해본다. 안다. 그 노란 버스를 줄이어 타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고, 그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결과를 끌어내야 하는 학원가에는 인정이 없고, 언제나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해주고자 하루에 한 번도 아이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부모에게는 시간이 없다. 자꾸만 무언가를 잃어가고 없애가는 세상이다보니, 결국 우리의 세상에는 아이가 없다. 



나는 나의 고향이 없다. 어렸을 때부터 쭉 자란 동네가 없다. 점진적으로 가세가 기울어 아래로 또 아래로 이동했기에 추억이 없다. 이리저리 아빠의 흔들리는 직장을 따라 떠밀리며 이동했던 유년시절은 척박하기만 하다. 늘 불안해했고, 늘 멋쩍어했던 유년기를 돌이키자면 그렇다. 맨 처음의 기억. 기껏 몇 년 살았던 동네에서의 고무줄 놀이,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친구와 씽씽이 타던 기억, 그 모든 미화된 추억들은 애써 내 유년을 긍정하는 데 쓰인다. 가구에 붙어있던 빨간 딱지, 허구헌날 오가던 고성, 바스라진 장난감을 움켜쥐며 겨우 참던 울음. 그런 것들은 내 기억에서 없애야 하므로 빨리빨리 기억을 없애고 일찍 어른이 되었다.


떠올려보자면 너무 그리운 것들. 외할머니의 주름진 손, 강아지의 따뜻한 온기, 엄마와 함께 하던 간만의 외식, 항상 아무렇지 않게 내 몫을 내주던 친구. 나를 잘 살게 하지는 못했지만, 겨우 어떻게든 힘을 내고 버텨 살아가게 했던 기억들이 조금 더 안정적으로 싸이고 쌓여 나를 지탱해주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땠을까. 추억할만한, 나의 성장을 지켜봐 준 고향이라도 있었다면 나는 아마 슬픔이나 아픔을 위로받는 데 이처럼 낯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와 나는 반대로 아이를 위한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고향을 앗아가려고 한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 아이의 내일을 위해 오늘의 미소와 어제의 추억을 다 없애버리려고 한다. 이사, 또 이사를 당연시하는 현 세태에 발을 담그려고 한다. 학군지. 언젠가 올 지도 모르는 그 영광을 위해서 우리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거슬러올라가야 하는가. 우리가 누리지 못한 것, 우리가 누리고 싶었던 것을 위해 막상 우리가 누렸던 것을 토해내야 하는 아이는 앞으로 얼마나 불안하고 멋쩍게 미소지으며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될까. 받아들여지지 못할까봐, 적응하지 못할까봐 쭈뼛대는 아이가 나라고 생각해보면, 그 얼마나 비루한 모습일지. 


우리는 자꾸만 남루함을 피해서 자꾸만 비루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제는 남루할 뿐만 아니라 비루해진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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