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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포포 매거진 Dec 21. 2023

끈기 있게 나를 마주할 용기, '여성지휘자'라는 모순

영화 <타르 TAR> 리뷰  


올해로 꽉 채운 20년차 PD가 되었다. 지금의 방송PD는 여성이 많은 직군 중에 하나지만, 처음 방송사에 입사한 2003년만해도 아이템 회의에서 이색 창업으로 설탕공예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다가 부장님께 “그런 건 가정시간에나 해.”라는 피드백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2007년 MBC로 이직 했을 때는 내가 배정받은 다큐멘터리팀 30명의 팀원 중 여자는 막내인 나와 한 살 많은 선배 단 두 명 이었다.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으면 여자 PD들은 일을 지속하기가 어려웠던 때였다. 20여년방송 생활을 하는 동안, 방송 업계가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카메라 감독이나 조명 감독은 수백명 중 하나, 둘 뿐이다. 여PD, 여감독, 여배우… 언제쯤이면 직업이나, 일 앞에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붙이지 않을 수 있게 될까…


올해로 초등학교 1학년이 된 딸을 낳은 뒤부터는 이런 마음이 더 커졌다.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내가 겪었던 차별은 겪게 하고 싶지 않았고, 우리 아이가 성별에 갇힌 사고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성인지 감수성에 대해 공부하고, 의식적으로 다양한 책을 읽었다. 


“하고 싶은 일에 여자와 남자를 구분 짓지 않아도 돼. 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 


깨어있는 엄마라고 자부심 꽤나 가졌던 나를 와장창 무너뜨린 영화가 바로 <TAR타르> 이다.  



영화 <TAR 타르>는 베를린 필하모닉 최초의 여성 지휘자 리디아 타르. 이 이야기는 훌륭한 예술가이자, 많은 이의 존경을 받는 주인공의 정점에서 시작해 여러가지 사건으로 인해 서서히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연출의 훌륭함이나, 주인공 ‘리디아 타르’ 그 자체 였던 케이트 블란쳇의 숨막히는 연기력에 대한 감탄보다 나를 더 숨막히게 했던 것은 나의 부족함을 깊이, 뾰족하게, 여러 방면으로 느끼게 했던 순간이 영화 내내 계속된 점이다. 


영화는 몇백년을 이어온 견고한 남성의 세계에서 ‘여자’라는 성별만으로 이미 소수자인 타르를 ‘레즈비언’이라는 더 소수의 인물로 설정하고, 나처럼 무지했던 사람들에게 오케스트라 지휘의 세계에도 여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도 영화 속 그녀의 모습을 우리가 생각한 여성의 모습보다는 ‘남성’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린다.

 

그렇다. 여기에 모순이 있다. 내가 생각한 여성의 모습은 무엇이고 남성에 가까운 모습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권투를 하고, 폭력성을 가지고 있으며, 권력을 휘두르는 리디아타르의 모습이 ‘남성적’이다…라고 생각 하는 나야말로 정말 편협한 사람이었다. 엄마, 여자, 사람으로 나쁘지 않은 성인지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나의 어줍잖은 자신감을 비웃고, 깊은 내면에 뿌리 박혀 있었던 게 분명한 보수적인 생각과 성숙하지 못한 나의 사고를 반성하게 하며 뼈를 맞는 기분이었다.


타르가 무너지게 되는 미투 사건 역시, 문제가 되는 그 사건이 정말 일어났는지, 어떤 인과관계를 가지게 되는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젊은 여성 예술가들의 재능을 발견하고 키워주지만, 그것이 사랑의 감정인지, 아닌지 모호하게 설명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 데로 생각하게 내버려둔다. 이 인물을 판단하는 나의 시선에는 어떤 편견이 깔려 있을까?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타르> 영화를 보며 올해 여성영화제에서 마주 했던 글을 떠올렸다. ‘지금 여기, 변화할 듯 변화하지 않은 현실 속 여러 층위의 벽과 질문들을 끈기 있게 마주하는 우리’ 라는 슬로건을 생각하며, 끈질기게 ! 끈기있게 ! 마주해야 하는 것엔 여성을 향한 암담한 현실뿐만 아니라, 가장 먼저 나의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성인지감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마음에 취하지 않고, 은연중에 고정관념과 차별적인 시선에 사로 잡혀 있진 않은지… 다른 무엇보다 나 자신을 끈기 있게! 마주해야 하지 않을까. 


처음으로 돌아가자. 내가 ‘여배우’ 라는 명사를 보며, 언제쯤이면 우리는 직업이나, 일 앞에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붙이지 않을 수 있게 될까 하고 생각해온 것 자체가 비겁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누군가에게 바라지 않고 내가 지우면 된다. 여기서 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니까.  


지휘자를 연기한 배우, 케이트 블란쳇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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