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뉴욕에서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봤다. 시간대가 괜찮아서 아무 생각 없이 본 영화였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내가 손꼽게 좋아하게 된 영화를 만남!! 브런치에 영화 관련 글을 제대로 쓴 게 거의 1년 전이니만큼 오랜만에 제대로 본 영화와 그에 대한 직후의 감상이 될 것 같다. 난 씨네필이 아니기 때문에 평론/영화 분석/구도 같은 거 잘 모르겠고 그냥 내 마음에 들어서 좋았다.
영화 materialists (2025)
이 글의 내용 하나하나가 스포이니
혹시 볼 생각이 있는 분은 나중에 보시길.. 그런데 한국에서 개봉 여부는 미지수라고 하네요.
| 줄거리
뉴욕의 매치메이커(중매인) 루시 (Lucy)는 우연히 완벽한 유니콘 부자 해리(Harry)와 데이트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만나게 된 배우 일을 하는 전 남자친구 존(John) 사이에서 갈등한다.
줄거리는 정말로 이게 끝..
| 조건 없는 사랑
이 영화가 이리도 인상깊게 남았던 이유 중 하나는 아마 이 영화의 주인공인 루시에게 내가 많은 공감을 느껴서였을 것 같다. 중매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이지만, 그녀를 찾는 고객들은 각자의 이상형을 이야기한다.
교육 수준, 재산, 직업, 성격, 취미 등 사람들이 원하는 조건의 영역은 가지각색이다. 그리고 이런 사업에서 일하는 루시는 자연히 사람들의 조건을 보고 그들의 조건이 나타내는 등급을 숫자로 계산하는 것에 능한 사람이다.
물론 나는 루시만큼은 아니지만 이런 조건을 가지는 게 전혀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외적 이상형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한없이 적극적이면서, 물질적 조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속물이라고 욕하는 게 어째보면 이중잣대라고도 생각한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materialists는 속물적인/물질적인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물질로 둘러싸인 이 시대에서, 세속적인 생각을 하는 걸 죄악시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의 세속적 사고에서 벗어나 산으로 들어가 자연인으로 살겠다고 선언하더라도, 이제는 그것마저 누군가의 사유지가 된 세상이다.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우리가 상대방을 사랑할 때 온전히 그 사람만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나? 그 사람과 그의 조건은 어떻게 분리할 수 있나?
가난이 문을 두드리면 사랑은 창문으로 도망간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 세속적으로 조건을 보고 그걸 바탕으로 만남을 고려하는 건 너무 natural한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
그래서 이런 조건에 기반한 계산을 단도직입적으로 나타내는 루시의 태도가 오히려 솔직해서 좋았다. 조건은 사람 간의 관계 그리고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게 맞다.
| 결혼
주인공은 연애보다도 결혼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한다. 결혼이란.. 참 어려운 것이
20대 초반인 내 또래에서는 연애만 2년을 넘겨도 오래 만난다고 한다. 하물며 몇 년이 넘어가는 장기연애, 심지어 몇십 년을 함께하는 결혼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사람은 2년 정도가 지나면 처음 상대방에게 느꼈던 콩깍지가 벗겨진다고 하는데, 그럼 2년이 지난 후에는 어떤 감정으로 여전히 서로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고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 그냥 의리로만 몇십 년을 같이 사는 건지 잘 모르겠다.
확실히 결혼은 참 어려운 것이다...
| 조건의 피상성
이런 루시의 사고에 큰 전환을 주는 사건이 하나 생긴다. 회사에서 루시는 인정받는 직원이다. 고객들의 매칭을 위해 심층 인터뷰까지 하면서 조건을 확인하고, 이런 조건이 잘 맞는 사람들의 데이트를 성사시킨다. 그런 그녀가 유독 친밀함을 느끼는 고객인 소피(Sophie)가 있었는데, 안타깝게 나이가 많고 대부분의 조건이 평균은 되지만 '특출난' 요소가 없기에 여러 번 데이트는 성공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다 꽤 괜찮은 조건의 남자 고객을 이어 준다. 다음 날, 소피의 데이트 상대방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받고 기뻐하지만 알고 보니 그녀는 처음 만난 데이트 자리에서 상대방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음을 발견한다. 둘은 수학적으로 너무나도 잘 맞는 조건이었는데, 그 상대방이 어떤 인격의 소유자인지는 알 길이 없었던 것.. 소피는 '박스 안에 조건을 체크하는 것만으로 사람을 모두 알 수는 없다'며 울부짖는다. 조건은 물론 중요하지만, 우리는 이 피상적인 조건만 가지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음을 알고 있다.
| 유니콘
루시가 만난 유니콘의 남자 해리도 이 영화의 매우 인상깊은 요소이다. 루시와 해리는 그녀가 성사시킨 부자 고객의 결혼식에서 처음 만난다. 해리는 신랑의 형제였고, 역시 부자였다.
키도 크고/잘생겼고/건전한 취미를 가지고 있고/화목한 가정/마약이나 부적절한 행동을 한 적도 없는 이 남자는 이런 중매 시장에서 말 그대로 유니콘인 사람이었다. 이런 유니콘은 부모님의 다툼을 매일같이 보고 힘겹게 자란 루시와는 조건이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해리는 whatever를 외치며 둘 사이의 관계를 시작한다. 루시는 그에게 '너 같은 유니콘이 실제로 있기 때문에 실제로 여자들이 그 많은 판타지를 버리지 못하는 거야' 라고 할 만큼 이상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유니콘은 역시 존재하지 않는가 보다.. 알고 보니 해리는 키 확대 수술을 받았다!!
영화 초반 지나가듯이 언급한 키 확대 수술이 여기서 나올 줄은 몰랐는데, 루시는 우연히 해리의 수술자국을 보게 된다. 해리는 자신의 키 수술 사실을 고백하며, 수술을 받음으로써 내가 받는 시선, 누리는 인기, 똑같이 돈이 많아도 사업 현장에서 느끼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가 모두 달라졌노라고 이야기한다. 해리는 자신의 원래 키를 앎으로서 자신에 대한 감정이 변했냐고 루시에게 묻고, 루시는 '그렇지 않다'며 '그게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말해 준다'고 터놓는다. 해리 또한 본인이 가졌던 키에 대한 콤플렉스로 인해 사랑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말해 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사랑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응원해주며 그들의 관계는 각자의 길을 가는 것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또 해리를 위로해 주려 루시도 본인의 성형 시술 사실을 고백하는데, 해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ㅋㅋ..
아무튼 여기서 루시는 다시 한 번 조건의 취약성을 깨닫는다. 때로 조건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피상적이며/내가 생각한 조건이 아니어도 그 사람은 충분히 괜찮을 수 있다는 것일까??
번외로 키 수술 이슈와 관련해 원래 키를 보여주려 해리가 엉거주춤하게 무릎을 접고 그런 그를 위로해 주는 루시를 담은 장면이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면이었음
| 냉정과 냉소 사이
그렇게 해리와 헤어진 루시는 전 남자친구인 존에게로 향한다.
그들은 오래 전 20대에 만난 사이다. 모두 배우 활동을 했고, 루시는 현실을 위해 배우를 포기했지만 존은 여전히 배우 일을 하고 있다. 20대 때와 여전히 같은 쉐어하우스에서 함께 쪼들리며 사는 룸메이트들과 함께하고/낡은 자동차를 몰고/배우 일만으로는 충분한 수익을 올릴 수 없어 케이터링 뷔페 알바를 뛴다. 이들이 헤어진 것도 돈 때문이었다. 루시의 표현으로는 '구질구질하게' 모든 일에 돈을 생각하기가 싫어서 둘은 결국 헤어졌다.
시간이 흘러 30대가 된 그들은 다시 만나 드라이브를 하다가 우연히 어떤 커플의 결혼식을 구경하게 된다. 신랑과 신부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행복한 현실 뒤로 부부가 마주하게 될 나름의 고난들을 이야기한다. 젊음은 서서히 사라지고, 감당해야 할 아이들이 생기고 이제 서로에게 더 이상 이전만큼 강한 끌림을 느끼지 못한다. 갈등이 시작될 것이고 나중에는 아이들 앞에서까지 말싸움을 벌이고 이내 그것을 후회하는 생활. 그럼에도 그들은 왜 결혼할까?? 라고 루시는 묻는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생각해 보면 냉소는 쉽지만 냉정은 참 어려운 것 같다. 둘 다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유사할 수 있으나 그에 따른 결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냉소는 그 상황에서 멈춘다. 상황을 세세하게 뜯어보고 이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하지만, 그 상황을 바꾸려는 시도는 쉽게 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냉정은 조금 다르다. 상황이 비관적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마냥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비관적인 상황을 직시하고 거기서 어떤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냉정의 모습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참 많은 냉소의 시대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더 살기 각박해지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2030세대가, 4050세대가 처한 현실에 냉소적인 태도로 임한다.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 데에 사회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에 오롯이 개인만을 탓할 수는 없지만.. 그저 가만히 서서 비웃는 것은 그 상황을 인식할지언정 어떤 방향으로라도 바꾸지는 못한다. 생각해 보면 이런 냉소에서 벗어나 어떤 행동이라도 취할 수 있는 건 용기가 아닐까?
'용기'의 키워드는 주인공 루시를 연기한 다코타 존슨의 인터뷰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녀는 루시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삶'을 선택할지, 아니면 '분명히 힘들겠지만 진정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삶'을 선택할지를 고민하는 여정을 걷고 있어요. 사랑받는 걸 허락하는 건 무섭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도 무서운 일이에요. 이건 결국 용기와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예요. 한 여성이 자신의 마음을 여는 용기를 낸다는 점이 제가 이 이야기에서 가장 사랑했던 부분이에요."
영화 속 루시의 변화는 냉소에서 냉정으로 향하는 과정을 그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 플러스 알파 낙관주의
이 영화는 제일 처음 아주 먼 옛날, 말도 못 하고 동굴에서 생활하고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다녔던 시절의 연인을 비추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수미상관의 구성으로 영화 끝 무렵, 결혼을 한 이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리고 루시는 말한다. 종종 제일 처음으로 결혼을 한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결혼했을지, 왜 결혼했을지를 상상한다. 비슷한 성장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수입을 올려서? 이성적 끌림을 느껴서?
실제로 루시는 해리와의 첫 데이트에서 한 쌍의 커플이 관계를 시작하는 요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영화 막바지에는 '플러스 알파'가 추가된다.
사람들의 조건은 실제로 꽤 많은 것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물질만능주의 시대에서 '조건 따위 필요없다'는 말은 오히려 현실과 동떨어진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대에서조차 위의 요소들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어떤 '플러스 알파'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위에서 말한 냉소와 냉정 사이에 관련한 인상깊었던 문장이 있다.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
이 말을 사용한 안토니오 그람시는 프랑스 문학가 로맹 롤랑의 "나의 지성은 비관적이지만 나의 의지는 낙관적이다 (I'm a pessimist because of intelligence, but an optimist because of will)" 라는 말에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이 속물적인 세상은 확실히 비관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세상은 변하고 삶은 힘들어지고 저출산 등 비관할 만한 일들은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이런 환경에서 가만히 냉소를 띠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완벽한 조건 매칭이 아니어도 사랑을 하고, 슬프게도 모두가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결혼을 하고, 서로에게 사랑을 약속하고 내가 이야기했던 이상형의 조건과는 다른 사람이어도 사랑할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모든 조건의 수학적 공식에 플러스 알파를 추가한 사람들이다. 그 플러스 알파는 때로 양의 값이기도 음의 값이기도 하지만 그 플러스 알파의 낙관주의를 가지고 뛰어드는 사람들은 어찌보면 용기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속물적인 세상 속 사랑이란 참 어렵겠지만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 이성으로 비관하되 플러스 알파 낙관주의의 의지로 낙관하라..
혹시 아나요
생각보다 플러스 알파가 우리가 수학적으로 도출해 낸 이성적 조건에서의 비관보다 더 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