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직장인이다. 남들처럼 일하고 시간에 따라 보수가 책정된다. 매달 같은 날 월급을 받지만 모든 직장인들이 그렇듯 항상 월급은 통장을 스쳐 지나간다. 때로는 퇴근 후에도 잔무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쉬는 날에도 회사 행사나 교육, 때로는 팀장님의 취미 활동 공유 차 출근을 하기도 한다.
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직장인이다. 출근 전날 밤이면 어김없이 머리가 지끈거리고, 출근과 동시에 퇴근을 생각한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웃고, 떠들며, 속상한 일을 겪기도 한다. 가끔은 퇴근 후에도 업무 생각에 밤잠을 설친다. 쉬는 날에는 동료들과 술 한 잔을 기울이며 고약한 상사의 뒷담화를 안주 삼기도 하고, 바뀔 리 없는 부조리한 직장 시스템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직장인이다. 휴가를 손꼽아 기다리고, 여행 계획을 세워가며, 각박한 일상에서의 일탈을 꿈꾼다. 하지만 이내 현실로 돌아와 과중한 업무에 치여 가며 매일같이 버거운 하루를 견뎌낸다. 업무에 관한 관심보다 오늘 점심 메뉴가 무엇인지, 퇴근 후 어떤 맛집에 찾아갈지에 대한 관심이 많을 때도 있다. 직장 동료들과의 시시콜콜한 농담 한마디가 하루의 활력소가 되기도 하고, 하루의 절반 이상을 함께하는 그들이 가족보다 가깝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렇다 보니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낄 때도 있지만, 가끔은 서운함을 느끼기도 한다.
보통의 직장인들과는 조금 다른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나의 하루는 출근과 함께 직장에서 시작된다.
05:30
겨울의 어느 날. 깜깜한 아침. 어김없이 출근을 알리는 시계 알람이 울린다. 대한민국 직장인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주문을 머릿속으로 외쳐본다.
‘5분만 더…’
이 주문을 딱 세 번 정도 외친 후 시계를 보면, 순식간에 잠이 확 달아나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는 기적을 경험한다. 우리는 이 마법의 효능을 ‘지각’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기본적인 사회생활 영위를 위해 세면을 마쳤지만 아침식사는 사치이므로 당연히 패스한다. 출근 후 회사 유니폼으로 갈아입기 때문에 출근룩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다. 어제 입은 맨투맨 티 위에 내년 봄에나 세탁을 맡길 매일 입는 검은색 점퍼를 무심하게 걸친다. 끈을 안 매도 발이 쑥 들어가는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선다. 출근 준비 완료.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06:00
여름에는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지만 겨울에는 출근길이 유난히 멀게 느껴져 시내버스를 탄다. 우리 회사의 장점 중 하나는 전국 곳곳에 지부가 있어 ‘만원 버스’와 ‘지옥철’로 인한 출근 스트레스가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 우리 회사는 독도에도 지부가 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노래 한 곡이 채 끝나기 전에 회사에 도착한다. 입구에서 속으로 ‘오늘도 무사히’라는 주문을 외운 후 출입문을 열고 들어간다. 모닝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평범한 아침’이 되기를 바라며.
아침 인사는 사전 예약 없이 방문한 고객들의 고성에 묻히고 만다. 이른 아침부터 문전성시를 이룬 회사 입구는 유명 맛집을 방불케 한다. 우리 회사 고객들은 지난밤 최소 3차 이상의 회식을 마치고, 아침까지 술이 거하게 취한 상태로 회사를 방문한 특별한 분들이다. 그분들의 요구조건은 대부분 이해하기 힘들고, 설령 이해했다 하더라도 이를 수용하고 상호 만족할만한 거래를 성사시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고집 센 고객들만큼이나 우리 회사 임직원들 또한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고객들의 무리한 요구조건과 회사 측의 깐깐한 수용 조건의 한계가 끊임없이 충돌한다. 그렇다 보니 회사는 밤낮으로 활기가 넘친다. 오늘은 유독 아침부터 활력이 넘치는 걸로 보아 순탄한 하루에 대한 기대는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06:30
오늘 아침 역시 모닝커피 한 잔의 여유는 사치다. 서둘러 2층 탈의실에서 회사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1층 사무실로 돌아와 업무 준비를 시작한다. 컴퓨터 전원을 켜는 대신 테이저건이라는 우리 회사 고유 비품을 수령해 배터리를 점검한다. 업무 특성상 사무실에 있는 시간보다 출장이 많기 때문에 미리 차키를 챙겨둔다. 업무 준비를 마치고 사무실을 둘러보니 바닥에 흩뿌려진 핏자국을 닦고 있는 직장 동료 A가 보인다. A는 정신없이 바닥에 물걸레질을 하느라 내가 온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A에게 인사를 건네려는 순간, 또 다른 직장 동료 B가 뛰어 들어온다. 양손에는 또 다른 고객이 회사 차량에 쏟아낸 토사물을 닦은 휴지 더미를 쥐고 있다. B의 유니폼도 이미 토사물로 얼룩진 지 오래다. 그들과 아침 인사를 나누기는 힘들 것 같다.
07:00
전날 야간 근무 팀장님께서 이제 막 출근한 내게 담당 고객을 지정해주신다. 새롭게 지정된 나의 고객은 눈을 감은 채 상대방 없이도 지속적으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묘기를 펼치고 있다. 딱히 대화를 통해 거래를 진행할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되어 그저 고객이 더 큰 불편함이 없도록 옆에서 조용히 지켜본다. 고객은 한참을 혼자 떠들다가 이내 눈을 감고 고개를 떨어뜨리는가 하면, 가끔씩 앞으로 몸이 기울기도 하여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물을 요구하여 갖다 주면 마시지도 못하고 바닥에 다 흘려버리고는, ‘물 가져오라니까 이 새끼야! 물!’이라고 소리를 지르며 빈 종이컵을 집어던지기도 한다. 상당히 까다로운 고객이다. 하지만 일단 내 담당 고객인 만큼 최선을 다해 응대해 본다.
잠시 후 집에서 입는 편한 옷차림의 여성이 조심스레 회사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다. 우리 회사 직원으로부터 남편이 여기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알고 보니 내 담당 고객의 사모님이다. 하지만 담당 직원인 나와는 인사도 나누지 않고 자꾸만 눈을 피하려고 한다. 이내 사무실 한쪽 의자에서 졸고 있는 우리의 고객 중 한 명인 자신의 남편을 발견하자마자 등짝에 연거푸 스매싱을 날린다. 사모님 덕분에 그제야 내 담당 고객의 이름을 알게 된다. 그의 이름은 ‘이웬수’다. 우리가 무슨 수를 써도 잠에 취해 깨지 않던 이웬수씨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사모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른다. 이후 부부는 도망치듯 우리 회사를 탈출한다.
07:30
나의 담당 고객이 떠나고 물이라도 한 잔 마시려고 탕비실 앞으로 간다. 그런데 그 사이 정수기가 박살이 나 있다. 어느 고객께서 우리 회사 정수기 물맛이 영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몇몇 고객들은 볼일을 마친 후 귀가하고, 또 다른 고객들은 보다 중요한 업무를 마무리 짓기 위해 본사로 들어간다. 본사로 들어가는 고객들의 양손에는 우리 회사 고유의 팔찌가 채워져 있다. 출입비표와 같은 이 팔찌는 ‘수갑’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친절히 회사 차량을 이용해 고객들을 본사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린다. 문을 열어드리고, 두 명의 직원이 고객의 양쪽에서 팔짱을 끼고 에스코트한다. 이때마다 고객들은 욕설을 퍼부으며 몸부림을 치는 걸 보면, 고객 입장에서는 우리 회사의 이와 같은 서비스가 썩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우리라고 별 수 있나. 회사 규정인걸.
고객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나자 그제야 사무실에 발 디딜 틈이 생긴다. 잠시 숨을 돌리려는 찰나, 남아있던 고객 중 한 명이 갑자기 내 팔을 잡아끌더니 우리 사무실에 10시간이 넘도록 있었다며 고객응대 지연에 대한 컴플레인을 제기한다. 고객 파일을 살펴보니 우리 사무실에 온 지 1시간도 안된 고객이다. 뿐만 아니라 이 고객은 본사 방문도 예정되어 있는 VIP다. 수차례 안내를 했음에도 고객은 집에 가고 싶다며 억지를 부린다. 이 고객의 담당 직원은 예정에 없던 다른 고객을 응대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인다. 문득 우리 회사도 우체국이나 은행처럼 대기 번호표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야간 근무에 녹초가 되어버린 다른 팀 직원들이 빨리 퇴근할 수 있도록 남은 업무를 인수받는다. 딱히 내가 선심을 썼다기보다는 우리 회사 업무 시스템 상 당연한 행동이다. 물론 자신의 담당 업무와 고객은 끝까지 본인이 책임지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정도 융통성을 발휘할 줄 아는 것이 우리 회사의 미덕이다. 이후 남아있는 고객들 중 보다 전문적인 상담이 필요한 고객들을 모시고 같은 팀 직원과 함께 본사로 이동한다.
08:00
본사 정문에 들어서자 의무 계약직 인턴 직원이 거수경례를 하며 우리를 맞이한다. 이른 아침이지만 본사 역시 바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지부에 있던 고객들과, 다른 지부에서 온 고객들까지 합류한 탓에 본사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본사 역시 대기 번호표를 뽑는 첨단화된 시스템은 없다. 하지만 본사는 철저히 직원과 고객의 일대일 응대 시스템이기 때문에 고객들은 담당 직원을 배정받기 위해 사무실 한쪽에 비치된 일자형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모든 고객들이 조용히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꾸벅거리며 졸다가 넘어지더니 옆에 있는 사람에게 시비를 하는 고객이 있는가 하면, 대한민국과 대통령을 욕하다가 이내 나라 잃은 백성처럼 꺼이꺼이 우는 고객도 있고, 심지어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말도 없이 갑자기 일어나 그 자리에서 바지를 내린 채 용변을 보는 고객도 있다. 우리는 본사 직원에게 우리 지부에서 온 고객님을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남긴 채 업무 관련 서류들을 넘기고 다시 사무실로 복귀한다.
08:30
예정보다 약 1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야 아침 회의가 시작된다. 주말임에도 사내 공지사항은 한 두 개가 아니다. 그걸 다 듣는 데만 족히 20분이 소요된다. 팀장님은 벌써부터 지친 기색이 역력함에도 애써 웃으며 마무리를 짓고는 티타임을 권하신다. 드디어 모닝커피의 특권이 주어진다. 로스팅 커피는 사치다. 빠르고, 간편하고, 맛도 좋은 믹스커피를 타기 시작한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 덕분에 잠시나마 심신의 안정을 되찾는다. 모두가 마음의 여유를 되찾고 나자 그제야 찜해두었던 맛집, 최근 흥행하는 영화 등 시시콜콜 한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눠본다. 대한민국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지친 현실 속에서 휴가를 이용한 여행과 같은 일탈을 꿈꾼다. 이 소박한 꿈이 우리 직장인들에게는 각박한 현실을 헤쳐 나가는 원동력이 되곤 한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틈 타 팀에서 총무 직책을 맡고 있는 직원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손을 든다. 그가 오늘의 점심식사 메뉴를 추천하려는 찰나, 출입문에 걸어놓은 종소리가 울리며 새로운 고객이 우리 사무실에 방문한다.
“여기가 OO지구대냐? 너희가 어제 내 친구 잡아갔지! 다 죽었어, 이 짭새 새끼들!”
하루하루 각박하고 치열한 현실 속에서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대한민국 직장인들. 사회라는 치열한 전쟁터에서 나만의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대한민국 직장인들. 그들처럼, 그 안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경찰서라는 이름의 회사, 지구대라는 부서에서 일하는 직장인들. 그들에게는 평범한, 그러나 남들과는 조금 다른 하루는 그렇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