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랑이 Mar 14. 2020

바람이 불지 않으면 노를 저어라

< 어느 지구대 경찰관의 평범한 하루 >

< 어느 지구대 경찰관의 평범한 하루 >

바람이 불지 않으면 노를 저어라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산에 가야 꿩을 잡고 바다에 가야 고기를 잡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와 같은 다양한 속담들은 모두 하나의 뜻으로 귀결된다.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는 만고의 진리. 이제 나는 더 이상 이런 말들에 마냥 가슴이 뛰지만은 않는다. 때로는 쓸쓸한 냉소를 머금기도 한다. 경험이 쌓이는 만큼 몸과 마음의 생채기가 늘어갔고, 그 사이 시건방지게 머리만 커졌다. 가끔은 그립다. 노력으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때가. 이것저것 재지 않고 열정이 곧 신념이던 그때가.          

  





이제 막 야간 근무가 시작된 이른 저녁. 신임 경찰관인 후배와 함께 관내를 순찰하고 있었다. 후배는 순찰차 조수석에 안장 쉬지 않고 차량 조회를 하며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나 역시 그런 후배의 열정에 기름을 부어주기 위해 관내 골목 구석구석을 쉬지 않고 순찰하였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보이는 후배의 긴장을 풀어주고자 한 마디를 던졌다.


  “너 그거 알아? 원래 신임 때는 조회하는 족족 빵빵 터지는 거? 조회할 때마다 도난차량, 대포차량, 수배자… 나는 심지어 실습할 때 어떤 것도 봤냐면… ….”  


  나의 아무런 의도도 담겨있지 않은, 그야말로 순도 100%의 아이스 브레이킹이 성공했나 싶어 후배의 얼굴을 슬쩍 곁눈질로 훑었다. 그리고 보았다. 여름이었지만 선선한 바람이 불던 초저녁, 에어컨까지 틀어놓은 순찰차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후배의 얼굴을! 내가 던진 그 한 마디는 조회하는 족족 아무 일도 없었던 후배에게 어마어마한 부담감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아… 나는 좋은 선배가 되긴 글렀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칠 때였다. 갑자기 후배가 들고 있던 조회기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삐삐삐삐삐]


  노력의 성과가 빛을 발하는 소리였다. 소유주에게 수배가 내려진 차량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차량 소유주의 주소지는 차량이 주차된 곳과는 전혀 다른 지역이었다. 만약 직접 운전을 해서 그곳에 차량을 주차한 것이라면 차량 소유주, 즉 수배자는 분명 근처에 있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순찰차를 멀찌감치 주차한 후 수배가 내려져 있는 차량을 향해 다가갔다.


  운전자는 없었다. 다소 연식이 오래된 차량이었으나 차량 외부는 비교적 깨끗한 상태였다. 그러나 내부는 조금 달랐다. 운전석과 조수석 쪽을 들여다보니 시거잭을 통해 연결된 휴대폰 충전기, 비어있는 커피 캔과 컵라면 용기, 메모지와 볼펜 따위가 너저분하게 널려있었다. 운전석 좌석은 뒤로 완전히 젖혀져 있는 상태였고, 뒷좌석에는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작은 상자들이 너저분하게 쌓여 있었다.


  '차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사람일까?'


  눈에 보이는 대로 가설을 세워보았다. 수배자의 행방은 묘연했고, 차량에는 전화번호도 남겨져 있지 않아 일단은 철수하기로 하였다. 지역경찰은 112신고출동이 우선이기에 수배자를 검거하고자 근처에서 마냥 잠복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제복 입은 경찰관이 수배차량 주변에 너무 오래 머무를 경우, 이를 눈치챈 수배자가 종적을 감춰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검거망에 포착된 이상 계속해서 주시할 필요가 있었다. 삼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였다.


  그날도 몇 차례 신고 출동이 뜸한 틈을 타 차량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특별한 성과는 없었다. 며칠을 차량 주변을 맴돌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새롭게 발견한 단서가 있었다.


  '며칠째 차량이 같은 장소에 주차되어 있다!'


  차량이 주차된 장소는 그대로였지만, 내부에는 변화가 있었다. 컵라면 용기가 사라지고 먹다 남은 도시락이 보였다. 메모지가 사라지고 노트가 생겼다. 차량 내부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는 최초 가설에 신빙성이 더해졌다. 하지만 주변에는 CCTV도 없고 수배자의 사진을 매일같이 확인했지만 주변에서 닮은 사람은 발견할 수 없었다. 가설에 대한 신빙성은 검거에 대한 자신감과 반비례하고 있었다. 어떻게 수배자를 검거할지 고민하던 중, 문득 수험생 시절 간절한 합격을 바라며 독서대 뒤에 멋들어지게 적어놓았던 글귀가 생각났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노를 저어라(If there is no wind, row)'


  매번 순찰차로 주변을 확인했지만 이번에는 직접 걸어 다니며 살펴보기로 했다. 차량이 주차된 곳 주변은 주택가 밀집 지역이었다. 주변을 한 참 걷던 중 언덕 위에 있는 육각 정자에 올랐다. 혹시나 조금 높은 곳에서 보면, 못 보던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정자에는 초저녁 무더위에 밖으로 나온 어르신들이 모여 계셨다.


  “경찰 아저씨가 이런 곳에 어인 일 인감?”


  어르신들은 젊은 경찰관이 동네 쉼터까지 온 것이 흥미로우셨는지 먼저 말씀을 건네셨다.


  '동네 주민들의 이야기는 때론 중요한 첩보이자 범죄 수사의 단서가 될 수 있고, 특히 동네 터줏대감이신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농담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중앙경찰학교 교육생 시절 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첩보 수집 수단의 하나인 풍문은 신빙성이 낮지만, 때론 결정적인 첩보가 될 수 있다'


  이론을 검증해 볼 순간이 온 것이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혹시 저 밑에 있는 차 주인을 아시나요?”


  나는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차량을 가리키며 여쭈었다. 어르신들은 일제히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차를 바라보셨다. 사실 별 기대는 없었다.


  “누군지 모르겠는데, 왜 그려?”


  “더운데 좀 앉았다 가. 우리 손주보다 나이가 많은 감?”


  역시 주목할 만한 정보는 없었다. 이론과 실무는 자석과 같다. 서로를 끌어당기기도 하지만, 때로는 서로를 한없이 밀어내기도 한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딱히 실망도 없었다.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리고 돌아서려는 순간, 한 어르신의 혼잣말이 발길을 붙잡았다.


  “보면 저 차 안에 가끔 사람 자고 있던데… 뭘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풍문'으로부터 '첩보'가 입수되었다. 이제 이 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요리할지는 우리 몫이었다. 나는 어르신께 몇 가지 질문을 더 드리고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간단히 메모했다.


  1. 종종 차 안에서 숙식을 해결.

  2. 동네 주민들과 왕래가 없음.

  3. 신원 불상의 50대로 추정되는 남성.


  퍼즐 조각이 모이기 시작했지만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넓게 펼쳐진 퍼즐 판의 여백은 더 많은 궁금증을 자아냈다.


  '왜 우리가 가는 시간에는 차 안에 없는 거지? 주변에 일터가 있는 건가? 간헐적으로 차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건가?'


  이후에도 대상 차량을 밤낮으로 확인했지만 소유주가 차 안에 타고 있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수배자들은 자신의 수배 사실에 대해 대부분 알고 있고, 그렇기에 최대한 경찰과의 접촉을 피하려 한다. 어쩌면 이미 우리가 주변을 맴도는 것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차가 같은 장소에 계속 주차되어 있다는 것은 기름이 없거나 고장으로 이동할 수 없는 차가 분명했다. 또는 차량의 원래 목적인 '이동'이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한다거나.


  이후 차량 주변을 맴도는 시간을 최소화하였다. 상대방도 우리를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경계심을 늦추도록 작전을 바꾸었다. 그리고 ‘때’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다음날, 어김없이 야간 근무가 돌아왔다. 당시 행여 근무가 없는 날에 수배자가 나타날까 봐 일부러 야간 자원 근무를 빈틈없이 신청하였다. 한여름 일기예보대로 장마가 시작되며 이른 저녁부터 어두컴컴했던 하늘은 장대비를 쏟아 붓기 시작했다. ‘때’가 온 것이다.


  첫 번째 가설, 차를 이동시킬 수 없는 상황이다. 두 번째 가설, 차 안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마지막 가설, 위 가설들이 맞는다면 차 안에서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할 것이다. 그런데 늦은 밤 갑자기 비가 내린다면? 분명 비를 피하기 위해 차를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 부디 운 좋게 위 가설들이 모두 맞기를 바라며 야간 근무를 시작했다.


  신고가 빗발치기 전인 저녁 시간, 순찰차에 타자마자 경광등을 끄고 차량이 있는 현장으로 갔다. 차량에서 떨어진 곳에 순찰차를 주차시키고 언덕 위로 올라가 보았다. 여전히 차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급히 나오느라 우의도 챙겨 나오지 않아 장맛비에 금세 온몸이 흠뻑 젖었다. 멘 땅에 헤딩을 하는 것 같은 무모한 수사에도 옆에서 묵묵히 보조를 맞춰준 후배가 고마웠다. 우리는 차량으로 접근해 뒤쪽에서 조심스럽게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있다!'


  놀라움과 반가움(?)에 하마터면 입 밖으로 소리를 낼 뻔했다. 이른 저녁이었지만 날씨 때문에 주변은 이미 어두컴컴했다. 차량 유리창 안에 있는 사람의 얼굴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분명 처음으로 차 안에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똑똑]


  창문을 두드렸다. 우리를 바라보는 남성의 얼굴이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에 흐릿하게 비쳤다. 그리고 잠시 후, 창문을 열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성은 아무 말 없이 스스로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휴… 갑시다.”


  그는 우리가 신원을 확인하기도 전에 먼저 차에서 내렸다. 신분증을 건네받아 우리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그 사람’ 임을 확인하였다. 소리 없는 추격전 끝에 코너에 몰린 도망자의 빠른 포기였던 것일까. 예상했던 것과 달리 그는 일말의 저항도 없었다.


  “현 시간부로 절도 혐의에 대한 형 집행장에 의거하여 체포하겠습니다. 변호인을 선임하실 수 있고 변명의 기회가 있으며 체포·구속적부심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참 집요하시네요.”     








  그랬다. 우리가 그를 모르고 있던 때에도, 그는 우리를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인식했음에도 멀리 달아나지 않았다. 어쩌면 바람이 불지 않았기에, 우리가 탄 배가 자신이 있는 섬에 올 수 없으리라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