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9월보다 뜨거운 더위였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 우리는 선글라스와 한 몸이었고 쉴만한 그늘 한 곳 없었다. 선선한 날씨의 스위스에서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와서 더 끈적하고 꿉꿉하게 느껴졌다. 한국을 떠나온 지 11일째, 이탈리아 여행이 시작되었다. 베네치아에 도착해 호텔에서 체크인을 하고 한여름 패션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베네치아 하면 떠오르는 작은 섬들이 모여 있는 본섬이란 곳으로 가기 위해 기차표를 끊고 있었다. 여행 준비를 하기 전부터 이탈리아는 다녀온 친구들의 후기가 나쁘지 않았다. 로마가 별로였다는 이야기만 살짝 들었을 뿐 유럽여행에서 한 번쯤 꼭 가봐야 할 정도라고 들어서 기대를 했다.
베네치아의 첫인상은 독특하고 신기했다. 기차역 밖으로 나오니 유명한 운하가 펼쳐졌다. 안쪽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작은 배를 타야 해서 먼저 배고픔을 달래기로 했다. 길거리 아무 곳이나 들어가 피자를 주문했는데 가격 대비 크기며 맛이 훌륭했다.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며 이탈리아의 규모에 놀랐고 자연스럽게 눈길을 끌었다. 프랑스와 스위스와는 다른 모습에 압도되는 기분이 들었다. 유럽여행 내내 좋았지만 이탈리아에서 마무리를 잘 할 수 있겠다란 느낌이 들었다. 너무 이른 판단이 문제였을까. 배를 타자마자 멀미 비슷한 어지러움이 찾아왔다. 관광객은 넘쳐 나서 사람을 빼곡하게 배에 태운다. 파도에 쉽게 배가 출렁거려 울렁거림이 한껏 더해졌다. 원래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내려 걸었다. 바닷길을 따라 걸으며 바람이 쐬니 머리와 배속이 한결 나아졌다. 어느덧 어둑어둑 해진 노을을 바라보며 저녁을 먹고 남편과 대화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호텔로 돌아가기 전, 여행 기념 마그넷과 내일 아침에 간단히 먹을 음식을 구입하기 위해 마트에 들어갔다. 필요한 것을 고르고 계산하는 과정에서 남편이 휴대폰을 꺼내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내가 여행하는 동안 바뀐 일정이나 그날의 기분을 메모한다면 남편은 예산 정리와 실제 계산한 품목과 금액을 기록한다. 나중에 여행기 쓰기에 도움이 되어 어느 순간부터 습관이 됐다. 마트를 나와 기차역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남편이 분주해졌다. 반바지 주머니를 양손으로 빠르게 만지더니 나에게 말했다.
“휴대폰이 없어. 잃어버렸나 봐.”
“응? 휴대폰이 왜 없어? 아까 계산할 때 꺼냈잖아.”
“그러게, 진짜 없어. 바지 주머니에 넣어놨는데…”
사색이 된 남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걸어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 샅샅이 뒤쳐봐도 떨어진 휴대폰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마트로 다시 가서 직원에게 물어봤지만 빈손으로 나와야 했다. 마트에서 나와 불과 100여 미터도 걷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에 휴대폰이 없어지다니. 이탈리아 소매치기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상황 앞에서 힘이 빠지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행 전 남편에게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잔소리가 나오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깟 휴대폰 따위인데 나라 잃은 표정을 하고 있는 남편이 안쓰럽기도 했다. 여행을 오기 바로 직전에 신형 휴대폰으로 바꾼 거였고 모든 정보가 들어있어 분실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고 몇 번을 말했었다. 알겠다고 하는 말투나 폼이 어째 믿음직스럽지는 않았다. 떨어뜨려 액정이 깨지거나 하겠지, 내 이럴 줄은 알았지만 소매치기를 당할 줄은 진심으로 몰랐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자기야, 잘 생각해봐. 휴대폰 위치나 그런 거 찾을 수 없을까?”
“어…… 뭐더라… 자기 휴대폰 좀 줘봐.” (무언가를 계속 검색하더니) “아! 찾았다.”
삼성 휴대폰에 내 디바이스 찾기 기능을 생각해낸 거였다. 다행히 휴대폰은 이 근처에 있었다. 아직 휴대폰을 꺼놓지 않은 상태였다. 위치 추적과 알림 3번 울리기, 초절전모드, 잠금 기능 등을 실행했다. 계속 휴대폰이 있는 주변을 돌며 찾을 수 있길 바랐다. 이미 9시가 넘어가는 시각이라 주민이 사는 주택가 안쪽은 꽤 어두웠다. 살짝 무섭기도 하고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베네치아, 아름다운 도시라면서 뭐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내 생애 최악의 도시를 경험하고 있었다. 나는 이때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소매치기가 가져간 휴대폰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우리 휴대폰 못 찾을 거 같아. 계속 언제까지 찾을 거야? 기차 시간도 있고…”
“좀만 더 찾아보자. 이 근처에 있는데 찾을 수 있을 거 같아.”
그러더니 남편이 허공에 대고 소리를 쳤다. “플리즈~ 깁 미 마이 폰!!! 플리즈!!” 하필 다른 관광객들도 오고 가고 있는데 순간 너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심각한 마당에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 그게 뭐야. 그런다고 휴대폰이 돌아와?” 나도 같이 소리쳤다. 그러고 몇 분이 흘렀을까 이놈이 휴대폰을 껐다 켰다 장난질을 했다. 남편은 계속 위치를 파악하며 어느 건물 한곳에 멈춰 섰다. 여기 어딘 것 같다며 알람을 울렸다. 그때 마치 영화와 같이 마주한 건물 위쪽에서 소리와 함께 불빛이 반짝였다. 땀으로 범벅이 된 남편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펄쩍 점프를 해 손으로 휴대폰을 낚아챘다. “하, 찾았다…” “자기 휴대폰 맞아? 진짜 찾은 거야?” “응, 내 거 맞아. 겨우 찾았다. 그리고 미안해.” 휴, 이날의 지옥같았던 일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됐다. 휴대폰도 망가짐 하나 없이 멀쩡했다. 내가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몇 번을 말했지. 휴대폰 어딨어? 남편은 남은 일주일 내내 이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직까지도 궁금하다. 소매치기는 어떻게 바지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가져 갔을까.
한국으로 돌아와 이 에피소드는 친구들 만날 때마다 유쾌한 대화거리가 되었다. 그때마다 남편의 플리즈~를 얼마나 놀렸던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 당시 나도 너무 덥고 다리도 아프고 힘들었다. 정신 차리고 남편 챙기느라 혼났다. 플리즈는 아직도 웃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