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적연구자로 살아가기

유아 교사로서 존재의 의미

by 포롱쌤

교직에 들어선 지 8년. ‘유아교사는 어떤 존재인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대학원 파견 교사를 지원했다. 나는 내가 만나온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싶고, 좋은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좋은 교사는 어떤 교사인지, 유아교사로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고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2019 개정 누리과정이 시행된지 5년이 지났음에도 나는 여전히 유아의 놀이 속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어떤 배움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철학’이라는 학문은 답을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어떤 교사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을 넌지시 제공해주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실증주의적 관점이 지배적이던 근대철학에서 현대철학으로 구분되는 지점은 문학, 건축, 미술, 음악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 현대철학은 그동안 우리가 믿어온 신념이 옳은 것인가. 끊임없이 자문한다. 그 배경에는 1차,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사건도 영향이 컸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실존적 물음을 탐구한 여러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대부분 세계대전을 겪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이전까지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기 위해 개별 인간의 특수성은 제외하고 인간의 보편적인 특성을 찾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면, 이후로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에 초점을 두고 남들과 다른 나만의 고유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인간의 다양성, 개성을 인정하는 사회적 흐름이 생기고 연구에 있어서도 ‘사소한 것’에 주목하는 질적연구가 탄생했다.

양적연구를 군중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비유한다면 질적연구는 개인(또는 소수)을 연구하는 것이다. 오징어게임이라는 드라마를 보며 양적연구와 질적연구의 관점으로 해석해보았다. 오징어게임에는 456명의 게임참가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일꾼이라고 불리는 게임진행요원들이 등장한다. 양적연구의 관점으로 보면 게임참가자나 일꾼 한 사람, 한 사람은 게임을 수행하는 하나의 객체로 한 명이 죽으면 다른 사람으로 대체가 가능하다. 반면, 일꾼 역할을 맡은 ‘강노을’의 삶과 행동, 드라마에서 그 인물의 의미는 대체가 불가능하다. 강노을은 일꾼 중 한 명으로 북한에서 탈북하다가 딸을 잃어버린 인물이다. 이 때문인지 게임참가자의 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돕고, 마지막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던 중 삶에 작은 희망을 보고 다시 살아가게 된다. 드라마 속 장면 중 기억에 남는 또 하나의 장면은 자기소개 장면이다. 게임참가자들은 서로의 이름을 모른 채 참가번호로 불리고, 알아간다. 그러나 주인공은 함께 게임 하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묻는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라는 문구가 있다. 서로의 이름을 궁금해한다는 것은 더 이상 상대방이 나에게 ‘그저 한 사람’이 아님을 의미한다. 나에게 특정 지어지는 것이다. 그 한 사람, 사소한 것에 관심 갖는 것. 알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질적연구가 아닐까.

질적연구의 관점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나에게 철학하기와 비슷하게 다가온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교사로서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에서 들뢰즈와 니체를 만났다. 들뢰즈를 통해 각자 고유한 의미를 생성하는 인간의 소중함과 나에게 의미있는 대상들에 대한 존엄성을 느끼며 내가 만난 그리고 앞으로 만날 아이들을 생각했다. 니체를 통해 익숙한 것 낯설게 보기, 나의 욕망과 힘에의 의지에 대해 믿고 나아가는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이는 질적연구에서 주목하는 ‘사소한 것’, ‘낯설게 보기’와 연결된다. 자연스럽게 나는 질적연구를 수행하기로 결심했다.

인간은 어쩌면 모두 주관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살아갈지 모른다. 우리는 같은 미술작품을 보고도, 같은 여행지를 방문하고도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고 각자의 의미를 생성한다. 그래서 서로를 궁금해하는 마음이 생기고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서로 알아가면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 생긴다. 알면 미워할 수 없다는 말처럼. 결국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인간사 아닐까. 그리고 그걸 도울 수 있는 것이 교육이 아닐까. 우리 사회에서는 어떠한 기준에 따라 편견을 가진 채 상대방을 판단하는 모습이 비일비재하다. ‘이 사람은 이러이러하니까 이럴 거야’ 마치 MBTI가 유행하는 것처럼. 이러한 관점에서는 상대방이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궁금하지 않으면 알고 싶지 않고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다. 그 끝은 혐오다. 우리 사회에서 ‘혐오’가 만연한 것은 결국 사람의 존엄성에 대해 잊고 ‘그저 한 사람’으로 여기는, 마치 기계의 한 부품처럼 여기고 기르는 사회와 학교 교육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교육에 답이 있지 않을까. 학생들과 마주하는 교사. 유아교사는 어떤 존재인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교사가 학생을, 유아를 존엄하게 바라보는 것. 관심을 갖고 알려고 하는 것. 마치 개별 학생에 대한 질적연구자가 되어 그들을 이해하고 함께 의미를 생성할 수 있다면 물음에 답할 수 있지 않을까.

중용 23장은 큰 울림을 준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삶에 정성을 다하고 싶다.

배움, 육아, 교육,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