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공방

우리가 사는 세상은 폭력적인가 아름다운가

by 포롱쌤

한강 작가는 묻는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지금도 전쟁, 기아, 질병 등 고통스러운 사건들이 존재한다. 내가 겪고 있지 않다고 해서 그러한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식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존재하지 않게 된다. 20대까지는 고통스러운 현실이 나에게 존재하지 않기를 바랐다. 어쩌면 늘 나에게 고통스럽고 힘든 경험이 함께 존재했으나 애써 무시하고 ‘좋은 게 좋은 거지’, ‘힘들 때는 자자’라고 생각하며 잊어버리곤 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은 때론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현실에 안주하고, 좋은 면만 바라보려 노력하니 스트레스도 별로 받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과 마주하지 않으면 진실에서 점점 멀어질 수 밖에 없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는 나에게 특별히 다가온 작품이다. 소재가 무거운 만큼 이전의 나였다면 읽지 않았을 작품이다. 철학을 배우면서 얻은 소중한 태도 중 하나는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용기’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지면서 이전에는 쉽사리 다가갈 수 없었던 인간의 폭력적인 모습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한강 작가가 던진 질문을 되뇌였다. 한강 작가의 소설은 허구지만 진실을 담고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잔인함과 폭력성은 진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잔인함과 폭력성, 고통의 순간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느냐 또한 진실이다. ‘과거는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강 작가가 이어서 던진 질문이다. 과거의 그리고 지금도 나타나는 인간의 폭력성이 나타나는 사건들은 어쩌면 우리를, 우리의 미래를 구할 수 있는 희망이 아닐까. 죽은 자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다다르면 내 삶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아이들의 삶도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처럼 역설적이게도 세상의 폭력성과 잔인함을 마주할수록 삶의 고귀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이데거가 인간은 죽음을 통해 실존을 느낀다고 주장한 것과 같은 이치일까. 수업 시간에 제시된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는 글처럼 인간은 없는 것을 통해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평상시에 당연하게 생각해서 있다는 것 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은 없을 때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공기, 물, 함께 살고 있는 가족들 ... 이전에 아파트 수목관리를 하는 모습을 볼 때는 별 생각 없이 지나쳤다. 생각하더라도 ‘풀이 무성하게 자라서 다듬는구나’ 정도로 넘어갔던 것 같다. 그런데 올해는 아이와 등원길에 수목관리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이는 ‘엄마 왜 이렇게 된 거에요? 예뻤는데..’라며 아쉬움이 섞인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산딸기는 어디로 갔어요?’라고 물었다. 아이가 등하원길에 발견했던 산딸기를 걱정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편리함을 위해 이처럼 자연을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유가 있겠지만, 수목을 관리하는 이유는 엄밀히 말하자면 수목을 위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저 아파트를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한 것일 수 있다. 똑같은 장면을 보고 지나가던 다른 어린이는 ‘우와 깨끗해졌다’라며 밝게 소리쳤다. 누군가는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잘 살기 위해서는 의미를 잘 부여해야 한다. ‘진실의 숫자가 사람 수대로 존재한다고 해서 모든 진실의 가치가 같은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새겨본다. 교사로서 엄마로서 미래의 아이들이 잘 살도록 돕기 위해서는 나부터 이 세상에 대해 의미를 잘 부여해야 할 것이다.

한 순간 사라진 식물들을 떠올리며 아이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떠올렸다. 순간 순간이 참 소중하다는 생각과 만남의 순간을 귀하게 여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마주하는 것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우리는 우연히, 갑작스럽게, 의도치 않게 사건과 마주칠 수 있다. 긍정적인 사건일수도 부정적인 사건일수도 있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인간은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이기에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사건들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수목관리 차원에서 잘려나간 식물들처럼 인간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아도 그런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 전쟁으로 죽은 사람들, 마녀사냥.. 어쩌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다. 이런 사건들을 무시하고 넘어갈 것인가. 마주하고 순간순간 의미를 생각하며 살아있음의 소중함을 느낄 것인가. ‘자세하게 낯설게 보고 의미부여하기 시작하면 모든 일상이 기적이 된다’는 최교수님의 말씀에 공감한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인간은 필연적으로 무언가의 희생을 전제로 산다. 그 사실을 진실로 인지한다면 주변에 감사하고 겸손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 것이 누군가에게, 무엇인가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런 일을 자행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라는 것은 어쩌면 사유하지 않음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사건의 진실공방은 필요 없을지 모른다. 인간은 보고 싶은 데로 보고 믿고 싶은 데로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의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을 형성한다. 그리고 결국 믿는 대로 변해갈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믿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살고 싶은 방향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교사는 인간을 가르치는 직업이기에 더욱 그래야만 한다. 교사에게 철학하기가 필요한 까닭이다. 우리는 ‘교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왜 교사로서 살아가야 하는가’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 진실에 다가가고자 노력하고 동시에 아이들에게 진실이 담긴 거짓말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더 잘 살아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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