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청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하늘 사랑>에 격월로 푸드 칼럼을 연재합니다. <이주현의 맛있는 계절>이라는 타이틀 아래 계절과 날씨에 연관된 음식 이야기를 소개하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푸드 칼럼니스트 이주현
2023. March. vol.501 < Weather talk / 맛있는 계절 >
"추위를 견뎌낸 강인한 생명력, 냉이 된장찌개 " - 푸드 칼럼니스트 이주현 -
[ 이주현의 맛있는 계절 ]
추위를 견뎌낸 강인한 생명
<냉이 된장찌개>
계절이 바뀌고 봄이 말간 얼굴을 들이민다. 추위에 종종 걸음으로 빠르게 걷던 사람들의 발걸음에 제법 여유가 묻어난다. 가끔씩 찬바람이 불긴 하지만 상관없다는 듯 따듯한 햇빛은 풍족하게 세상을 채운다. 포근한 공기를 한껏 깊게 들이마셔 봄 내음을 맡아본다. 어쩐지 공기 안에서 희미한 흙냄새와 함께 후각을 자극하는 싱그러운 향이 나는 것 같다. 동시에 입 안에서 씁쓸한 맛이 느껴지면서 저절로 침이 꼴깍 고인다. 식탁 위 봄소식을 가장 빠르게 전해주는 제철 음식 ‘봄나물’이 돌아온 것이다.
겨울철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자란 봄나물은 강인한 생명력을 품고 있다. 그래서일까, 여느 식재료와 나란히 놓아도 그 맛과 향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한다. 봄나물은 긴 겨울 동안 땅 속에서 천천히 자랐기 때문에 이 맘 때면 당도가 가장 높아진다. 볶아도, 튀겨도, 끓여도, 어떻게 조리해도 봄나물의 강렬한 맛과 향은 입 안에 오래 여운을 남긴다. 영양적인 측면에서도 다른 제철 음식에 비해 비타민, 미네랄이 더욱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다. 날씨가 따듯해지면서 찾아오는 불청객인 춘곤증 예방에도 효과적이다. 이쯤 되면 봄날에만 누릴 수 있는 보약이 따로 없다.
한 낯에 내리쬐는 햇빛이 너무나 포근하여 꽁꽁 동여맨 마음의 빗장까지 절로 풀어질 것만 같다. 이 맘 때면 어릴 때 우리 집 식탁보도 화사한 색으로 옷을 갈아입곤 했다. 그러면 어렸던 나는 곧바로 ‘아, 냉이 된장찌개가 등장할 시기구나!’라고 생각하며, 곧 다가올 부엌의 변화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봄이 돌아오면 우리 집 된장찌개에는 귀한 음식이 더해졌다. 엄마는 쌉싸름한 향의 ‘냉이’를 깨끗하게 씻어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에 한 줌씩 척척 넣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냉이를 아주 소량만 넣더라도 이전의 된장찌개와는 아예 다른 요리가 되어버린다는 점이었다. 구수한 풍미의 된장과 향긋한 냉이가 누구 하나 지지 않고 각자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발산하며 뒤섞였다. 이 개성 넘치는 두 조합은 어린 나에게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매력적인 맛으로 다가왔다. 평소에 먹는 된장찌개라면 다른 화려한 반찬에 밀리겠지만 냉이가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위풍당당하게 그 날 식탁의 주인공으로 등극하는 것이다.
식사가 시작되면 어린 나는 냉큼 냉이부터 찾았다. 숟가락 안의 작은 우주에 냉이를 잘 안착시키고 국물까지 조심스럽게 담아 곧바로 입 안으로 직진한다. 쓰디 쓴 인삼은 못 먹을 어린 나이였지만 ‘봄의 인삼’이라 불리는 냉이 뿌리는 꼭꼭 씹어 잘도 먹었다. 그러면 부드럽고 구수한 된장 국물과 냉이의 진한 향긋함이 목구멍을 따라 고스란히 퍼져나갔다. 뱃속이 따듯해지면서 마음이 편안히 가라앉는 느낌이 참 좋아서 몇 숟가락이나 국물을 연이어 퍼먹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입 안 가득 전해진 것은 겨울을 이겨낸 봄나물의 강인한 생명력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어른이 된 내가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오면 냉이부터 찾는다. 요리연구가란 직업을 가지고 있음에 봄에 나오는 여러 제철 음식을 두루두루 살펴봐야 하지만, 유독 그 진한 향에 홀렸는지 봄나물부터 찾게 된다. 마트에 가니 제철을 맞은 냉이, 달래, 미나리 등 각종 봄나물이 나란히 대기하고 있다. 비닐봉지로 꽁꽁 묶여 있음에도 강렬한 봄나물 향기가 폴폴 풍겨 나와 넓디넓은 마트 안이 봄 내음으로 채워진다.
수많은 봄나물 중에서도 가장 먼저 손이 가는 것은 역시 냉이다. ‘이번 봄에는 냉이로 어떤 요리를 해볼까’ 계산까지 마치고 장바구니 안에 봄을 가득 담아 가는 발걸음이 들뜬다.
구수한 된장과 고소한 참기름에 조물조물 무친 ‘냉이 된장 무침’은 밥도둑이 따로 없다. 고기를 구워먹을 때도 이 냉이 무침과 함께 먹으면 맛이 서 너 배는 확 좋아진다. 쫄깃한 표고버섯과 냉이의 신선한 향이 쌀알 하나하나에 진하게 배인 ‘냉이밥’도 떠오른다. 갓 지은 따끈한 냉이밥을 간장 양념에 슥슥 비벼 먹으면 봄철에만 누릴 수 있는 별미 중의 별미다. 겨우내 먹은 김장 김치에 봄기운을 한 스푼 섞고 싶다면 ‘냉이 김치’도 좋은 선택이다. 감칠맛 나는 멸치액젓과 매콤한 고춧가루를 섞은 양념에 냉이를 버무려 먹으면 잃어버린 입맛이 후다닥 돌아온다. 평소에 즐겨 먹는 매운탕, 뭇국에도 냉이 한 줌만 넣으면 단숨에 봄 향기 물씬 풍기는 맛으로 보답한다.
이런 저런 냉이 요리를 한 없이 떠올리다가 결국은 엄마가 해주던 ‘냉이 된장찌개’로 결론이 난다. 아마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있지 않았을까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난다. ‘봄 = 냉이 된장찌개’ 라는 하나의 공식이 내 미각 세포에 각인되었나보다.
집에 와 냉이를 살살 흔들어 씻으니 까만 흙가루가 떨어져 나온다. ‘그럭저럭 견딜만한 추위가 아니었을 텐데, 차가운 흙 속에서 얼마나 시간이 더디게 흘렀을까’ 여기까지 무사히 와줘서 고맙다며 비로소 제 시간을 맞은 냉이와 교감을 시도해본다. 살짝 힘을 줘서 물기를 털어주니 따듯한 공기 속으로 냉이 향이 생기발랄하게 퍼져나간다. 겨우내 잠자고 있던 온몸의 감각까지 즐겁게 깨어나는 기분이다.
계절의 흐름을 알고 땅 위로 불쑥 고개를 내미는 음식들을 요리하며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긴다. 계절이 흐르고 날씨가 바뀌듯이 우리의 인생도 결코 멈춰있지 않다. 그러니 지금 혹독한 겨울을 버티고 있다면 조금만 더 견뎌보자고. 추위 속에서 유독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을 봄나물이 이제서야 제 시기를 맞은 것처럼, 우리도 저마다의 빛나는 시기가 있을 테니깐. 부디 모두의 마음에서도 따듯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진정한 봄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 / 푸드 칼럼니스트 이주현